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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31023718
· 쪽수 : 720쪽
· 출판일 : 2024-08-30
책 소개
목차
편집자의 말
서문
1부
스미스대학 1950~1955
2부
케임브리지 1955~1957
스미스대학 1957~1958
3부
보스턴 1958~1959
영국 1960~1962
옮긴이의 말
연대기
리뷰
책속에서
나는 영영 행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오늘 밤만은 만족스럽다. 고작해야 텅 빈 집과, 딸기 포기들을 세우느라 지샌 하루 뒤에 찾아오는 다사롭고 몽롱한 나른함과, 차갑고 달콤한 우유 한 컵, 생크림을 듬뿍 얹은 블루베리 한 접시가 전부지만. 이제는 나도 사람들이 어떻게 책도 없이, 대학도 없이 살아갈 수가 있는지를 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쓰러져 잠이 들고, 다음 날 새벽이 되면 또 손질해야 할 딸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렇게 흙을 벗 삼아 살아가는 거지. 지금 같은 때엔, 더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바보스럽게만 여겨진다…….
내게 있어, 현재는 영원이고, 영원은 무상하게 그 모습을 바꾸며, 처연히 흘러가다가는 형체 없이 녹아내린다. 찰나의 순간은 삶 그 자체. 순간이 사라지면 삶도 죽는다. 그러나 매 순간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는 없으니, 기왕 죽어버린 시간들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이건 마치 물에 밀려 흘러가는 모래와 같다……. 헤어날 가망이라곤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소설 한 편, 그림 한 점이 어느 정도 과거의 감회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으론 충분치가 못하다, 아니 턱없이 모자란다. 실존하는 것은 현재뿐인데, 벌써부터 나는 수백 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힌다. 백 년 전에도 어느 여자아이가 지금 나처럼 살아 있었겠지. 그러다 죽어갔으리라. 지금은 내가 현재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흐르면 나 또한 사라지리라는 것을 안다. 절정에 이르는 찰나, 태어나자마자 사라지는 찬란한 섬광, 쉼 없이 물에 밀려 흘러가는 모래. 그렇지만 나는 죽고 싶지가 않은걸.
오늘 밤 나는 추녀다.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믿음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여자라는 동물에게는 참 딱한 질병이다. 사회적 접촉도 최저점에 닿아 있다. 나를 토요일 밤의 쾌락과 이어주던 유일한 끈마저 끊어져버리고,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단 한 사람도. 나 역시 하나도 아쉽지 않으니 피차 미련 따위는 없는 셈이다. 이성을 끌어당기는 매력이란 도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