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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조광조·조식 (조선 사림의 실천적 지성)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일반
· ISBN : 9788936481117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26-02-20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 사회사상/사회사상사 일반
· ISBN : 9788936481117
· 쪽수 : 268쪽
· 출판일 : 2026-02-20
책 소개
창비 한국사상선 제6권 『조광조·조식: 조선 사림의 실천적 지성』은 16세기 조선 사림파의 대두를 대표하는 조광조와 조식, 이 두 사람의 핵심 저작을 정리한 책이다. 이 두 사람의 실천은 당대에 미완에 그쳤지만, 그 씨앗을 후대 사림들이 꽃피우면서 조선왕조 통치철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시대의 모순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책무는 무엇인가
공부와 실천을 하나로 여긴 조선 사림파 사상가들
창비 한국사상선 제6권 『조광조·조식: 조선 사림의 실천적 지성』은 16세기 조선 사림파의 대두를 대표하는 조광조와 조식, 이 두 사람의 핵심 저작을 정리한 책이다. 조광조는 중앙 정계에서, 조식은 주로 지방에 은거하면서 활동했다는 차이점은 있으나,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 현장이나 민생에 적극 반영하는 방안을 실천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조선의 현실에 성리학 이념이 구현될 때 성리학이 최종 목표로 삼는 민본정치가 실천될 것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조광조는 한동안 유명무실해졌던 경연을 부활시켜 왕이 앞장서서 학문을 닦을 것을 강조했으며, 조식은 향촌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이 두 사람의 실천은 당대에 미완에 그쳤지만, 그 씨앗을 후대 사림들이 꽃피우면서 조선왕조 통치철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개혁정치가, 조광조
조광조(1482~1519)는 조선 개혁정치를 명실상부하게 대표하는 인물로, 어린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왕의 총애를 받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극적인 일대기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7세에 아버지의 부임지인 평안도 어천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당대 영남사림의 핵심인물인 김굉필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유학을 배웠다. 이는 조선의 정치권력의 핵심 계파 중 하나인 사림파가 김종직-김굉필에 이은 계승자를 찾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29세인 1510년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1515년에는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다가 왕이 제시한 질문에 지체 없이 답하며 민본정치의 기본을 일깨우면서 중종의 눈에 들게 됐다. 당시 조광조가 제출한 대책문은 그의 핵심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
옛적의 명석한 임금은 천변만화함이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아서,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를 펴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도를 펴기 때문에 정치를 함에 인을 얻고 사물을 처리함에 의를 얻어서 사물마다 하나도 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어, 부자의 윤리와 군신의 구분이 각각 그 이치를 얻고 하늘과 땅의 경륜도 또한 귀결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요, 순, 우의 중용의 도입니다. (19~20면)
조광조의 대책문에 깊이 감화한 중종은 조광조를 사간원 정언의 자리에 앉혔고, 이후 조광조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반발하는 가운데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등 기득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왕에게는 언론을 탄압하지 말고 수용할 것을 치밀한 논리로 주장했다. 왕의 신임 속에 대사헌(현재의 검찰총장)까지 오른 조광조는 개혁세력의 선두에서 다양한 정책들을 급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조광조 개혁정치의 요체는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함에 따라 그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왕과의 경연을 활성화하고 『소학』을 보급하고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성리학 이념을 백성들 사이에 퍼뜨리고자 했다. 또한 균전제를 통해 기존 지배계층의 토지 집중을 완화하고자 했다. ‘위훈 삭제’는 이 같은 개혁 조치 중 하나였는데, 바로 중종반정 공신들에게 준 훈작 중에 허위의 공훈을 가려내 가짜 공신을 박탈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훈구파들은 왕에게 조광조를 모함하는 한편, 그 유명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趙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 글귀를 유포함으로써 중종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그리하여 중종은 조광조를 중앙 정치로 발탁한 지 4년 만인 1519년 그를 숙청하고 만다. 이른바 기묘사화라는 이 비극은 조광조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가 뿌린 개혁의 씨앗들은 이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의 사림파가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후대에 집권한 사림파는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방울과 칼을 차고 실천 유학을 부르짖은 학자, 조식
남명 조식(1501~72)은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아갔지만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직선적인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한 ‘실천하는 지성’이었다. 그는 김종직, 김굉필 등 영남사림파의 학문적 전통 위에서 성장했고 중종 곁에서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조광조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 조식이 19세가 되던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당시, 그의 숙부 또한 죽임을 당했고 부친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1545년 을사사화 때에는 자신과 절친했던 이들이 크게 화를 입었다. 이 두 사화를 거치며 조식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처사의 삶을 지키면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살고자 했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 ‘이윤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32면)
조식은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이론 탐구보다는 실제 삶에서 유학을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조식 사상의 핵심인 경의(敬義)는 경(敬)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실천하는 의(義)를 강조한 사상으로, 일례로 조식은 평소에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고 의의 상징으로 허리춤에 칼을 찬 것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칼은 외부에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면 이에 과감히 실천으로서 맞서야 한다는 조식 고유의 실천 유학을 상징한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는 언뜻 연상되기 힘든 이미지이지만, 조식은 이러한 모습을 과감히 현실에서 내보였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후학들에게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강경한 대왜(倭)관을 심어주었다. 조식이 이처럼 처사로 자처하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그가 살던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남명학파가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식의 문하에서 가장 많은 의병장이 배출되고 선조 대 후반에 사림파의 또다른 계파인 북인(北人)이 형성된 데에는 조식의 영향이 크다. 북인은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정통 성리학의 입장 말고도 불교, 도교 등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했다.
실천하는 지식인의 눈으로 본 유교사회의 이상과 현실
조광조와 조식은 사림파의 전통에서 성장해, 성리학의 이념을 중앙과 지방에 구현할 정책을 제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에서 두 인물의 주요 저작을 살펴봄으로써 이 두 인물이 16세기 사림파의 성장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는 일은 유교사회의 이상과 현실을 보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조광조와 조식은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16세기에 이를 정치 현실과 민생 문제 해결에 적용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푸는 데에 자신의 생을 바쳤다. 이러한 역할은 비단 이 두 사람을 16세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조선 중기와 후기에까지 현실 정치철학으로서의 유교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큰 초석이 되었다. 성리학의 실천이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던 시대, 조광조와 조식이 남긴 글을 통해 그 사상의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길 권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공부와 실천을 하나로 여긴 조선 사림파 사상가들
창비 한국사상선 제6권 『조광조·조식: 조선 사림의 실천적 지성』은 16세기 조선 사림파의 대두를 대표하는 조광조와 조식, 이 두 사람의 핵심 저작을 정리한 책이다. 조광조는 중앙 정계에서, 조식은 주로 지방에 은거하면서 활동했다는 차이점은 있으나,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 현장이나 민생에 적극 반영하는 방안을 실천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조선의 현실에 성리학 이념이 구현될 때 성리학이 최종 목표로 삼는 민본정치가 실천될 것이라 믿었다. 이를 위해 조광조는 한동안 유명무실해졌던 경연을 부활시켜 왕이 앞장서서 학문을 닦을 것을 강조했으며, 조식은 향촌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주력했다. 이 두 사람의 실천은 당대에 미완에 그쳤지만, 그 씨앗을 후대 사림들이 꽃피우면서 조선왕조 통치철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개혁정치가, 조광조
조광조(1482~1519)는 조선 개혁정치를 명실상부하게 대표하는 인물로, 어린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왕의 총애를 받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극적인 일대기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17세에 아버지의 부임지인 평안도 어천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당대 영남사림의 핵심인물인 김굉필을 만나 그의 문하에서 유학을 배웠다. 이는 조선의 정치권력의 핵심 계파 중 하나인 사림파가 김종직-김굉필에 이은 계승자를 찾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29세인 1510년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1515년에는 성균관 유생으로 지내다가 왕이 제시한 질문에 지체 없이 답하며 민본정치의 기본을 일깨우면서 중종의 눈에 들게 됐다. 당시 조광조가 제출한 대책문은 그의 핵심 사상을 오롯이 담고 있다.
옛적의 명석한 임금은 천변만화함이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아서,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를 펴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도를 펴기 때문에 정치를 함에 인을 얻고 사물을 처리함에 의를 얻어서 사물마다 하나도 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어, 부자의 윤리와 군신의 구분이 각각 그 이치를 얻고 하늘과 땅의 경륜도 또한 귀결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요, 순, 우의 중용의 도입니다. (19~20면)
조광조의 대책문에 깊이 감화한 중종은 조광조를 사간원 정언의 자리에 앉혔고, 이후 조광조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반발하는 가운데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등 기득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왕에게는 언론을 탄압하지 말고 수용할 것을 치밀한 논리로 주장했다. 왕의 신임 속에 대사헌(현재의 검찰총장)까지 오른 조광조는 개혁세력의 선두에서 다양한 정책들을 급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조광조 개혁정치의 요체는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함에 따라 그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왕과의 경연을 활성화하고 『소학』을 보급하고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성리학 이념을 백성들 사이에 퍼뜨리고자 했다. 또한 균전제를 통해 기존 지배계층의 토지 집중을 완화하고자 했다. ‘위훈 삭제’는 이 같은 개혁 조치 중 하나였는데, 바로 중종반정 공신들에게 준 훈작 중에 허위의 공훈을 가려내 가짜 공신을 박탈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세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훈구파들은 왕에게 조광조를 모함하는 한편, 그 유명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趙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 글귀를 유포함으로써 중종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그리하여 중종은 조광조를 중앙 정치로 발탁한 지 4년 만인 1519년 그를 숙청하고 만다. 이른바 기묘사화라는 이 비극은 조광조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가 뿌린 개혁의 씨앗들은 이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의 사림파가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후대에 집권한 사림파는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방울과 칼을 차고 실천 유학을 부르짖은 학자, 조식
남명 조식(1501~72)은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룬 인물이다. 평생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아갔지만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직선적인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한 ‘실천하는 지성’이었다. 그는 김종직, 김굉필 등 영남사림파의 학문적 전통 위에서 성장했고 중종 곁에서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조광조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았다. 조식이 19세가 되던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당시, 그의 숙부 또한 죽임을 당했고 부친은 관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1545년 을사사화 때에는 자신과 절친했던 이들이 크게 화를 입었다. 이 두 사화를 거치며 조식은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지방에서 처사의 삶을 지키면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살고자 했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 ‘이윤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32면)
조식은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이론 탐구보다는 실제 삶에서 유학을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조식 사상의 핵심인 경의(敬義)는 경(敬)을 바탕으로 과감하게 실천하는 의(義)를 강조한 사상으로, 일례로 조식은 평소에 경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고 의의 상징으로 허리춤에 칼을 찬 것으로 유명했다. 여기서 칼은 외부에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면 이에 과감히 실천으로서 맞서야 한다는 조식 고유의 실천 유학을 상징한다.
‘방울과 칼을 찬 선비 학자’는 언뜻 연상되기 힘든 이미지이지만, 조식은 이러한 모습을 과감히 현실에서 내보였다. 조정에 잘못이 있을 때마다 상소문을 통해 문제점을 지적하고, 후학들에게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강경한 대왜(倭)관을 심어주었다. 조식이 이처럼 처사로 자처하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그가 살던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남명학파가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식의 문하에서 가장 많은 의병장이 배출되고 선조 대 후반에 사림파의 또다른 계파인 북인(北人)이 형성된 데에는 조식의 영향이 크다. 북인은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정통 성리학의 입장 말고도 불교, 도교 등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했다.
실천하는 지식인의 눈으로 본 유교사회의 이상과 현실
조광조와 조식은 사림파의 전통에서 성장해, 성리학의 이념을 중앙과 지방에 구현할 정책을 제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에서 두 인물의 주요 저작을 살펴봄으로써 이 두 인물이 16세기 사림파의 성장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는 일은 유교사회의 이상과 현실을 보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조광조와 조식은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16세기에 이를 정치 현실과 민생 문제 해결에 적용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푸는 데에 자신의 생을 바쳤다. 이러한 역할은 비단 이 두 사람을 16세기 사림파를 대표하는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조선 중기와 후기에까지 현실 정치철학으로서의 유교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큰 초석이 되었다. 성리학의 실천이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던 시대, 조광조와 조식이 남긴 글을 통해 그 사상의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길 권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목차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조광조·조식의 시대와 사상
핵심저작
【 조광조 】
1장 명문의 답안지
2장 개혁 의지를 담은 상소문들
3장 조광조 사상의 증언들
부록
【 조식 】
1장 『학기류편』, 성리학 사상에 대한 주요 어록을 정리하다
2장 조정을 울린 상소문
3장 백성은 물과 같은 존재이다
4장 엄광론, 처사의 삶을 지향하다
5장 대책문제
6장 조식이 지리산을 유람한 까닭은
7장 편지에 나타난 조식의 사상과 처세
조광조 연보
조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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