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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64950531
· 쪽수 : 371쪽
· 출판일 : 2013-06-20
책 소개
목차
책을 펴내며
서장
제1장 일제강점기 철도의 성격
1. 문제의 제기
2. 선행연구 분석
3. 일제강점기 철도의 성격분석
4. 결론 및 향후연구 과제
제2장 일제강점기 사설철도망의 형성과 유형
1. 들어가며
2. 조선 사설철도망의 형성과정
3. 조선 사설철도의 성격별 유형
4. 맺으며
제3장 철도문화 : 철도문화유산 현황 및 전망
1. 철도문화재 현황
2. 철도문화유산 연구
3. 철도문화유산의 발굴
제4장 철도박물관
1. 국내 철도박물관
2. 국외 철도박물관
제5장 철도차량 기술의 발전
1. 철도 수송의 역사
2. 철도차량의 발전
3. 차륜과 레일의 발전
4. 철도의 속도 향상
제6장 철도의 운전
1. 들어가면서
2. 운전관계 규정의 변천
3. 열차운영다이아의 발전
4. 동력차의 발전
5. 교육 및 훈련기관
6. 각국의 기관사 등용 비교분석
7. 기관사 양성과 직무훈련
8. 결론
제7장 한국의 도시철도
1. 들어가며
2. 도시철도의 시작
3. 도시철도의 전환
4. 도시철도의 발전
5. 맺으며
제8장 대륙철도의 활용
1. 문제의 제기
2. 대륙연결 국제철도망
3. 국제철도의 이용가능성 검토
4. 결론 및 향후 연구과제
제9장 세계 철도시장과 우리나라
1. 철도시장 분석
2. 세계 철도시장
3. 우리나라의 위상
4. 결론
제10장 우리나라 철도의 해외진출 현황과 과제
1. 문제의 제기
2. 세계 철도 시장 동향
3. 우리나라 해외 철도공사 수주 현황
4. 향후 해외 철도 수출의 전망
5. 해외 철도 수출 활성화를 위한 제도개선 방안
[부록]
한국 철도의 초창기 주요쟁점
한국 철도 연표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과연 철도는 노량진~인천 간 개통된 것일까, 아니면 인천~노량진 간 개통된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영등포~인천 간 개통된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경인철도 건설당시 인천을 기점으로 잡아 공구번호를 붙여나갔고 개통식도 인천에서 했으니 당연히 인천~노량진 간으로 해야 한다는 인천광역시 쪽의 주장이 있고, 경인철도 혹은 경인선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수도인 서울이 먼저가 되어야 하니 노량진~인천이 되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이 있다.
여기서 철도 상식을 하나 이야기해보자. 우리 철도에는 상행, 하행이라는 개념이 있다. 서울을 기준으로 해서 서울 쪽으로 가는 열차가 상행, 그 반대방향으로 가는 열차가 하행이다. 서울과 관계가 없는 지선의 경우, 중요한 간선으로 가는 열차를 상행으로 삼는다. 이 기준에 따라 열차번호(고유이름)가 붙어서 홀수는 하행이 되고 상행열차에는 짝수번호가 붙는다. 객차의 번호도 그렇게 서울 쪽이 1호차가 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지금과 좀 달랐다. 일본 쪽으로 가는 열차가 상행, 대륙 쪽으로 가는 열차가 하행이었다. 경부선을 놓고 본다면 지금과 상하행이 반대가 되는 것이다. 당시 철도를 놓은 일본 입장에서야 공사편의를 위해서 인천을 기점으로 삼을 수도 있고, 경인철도를 인천~서울(혹은 경성) 간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지금 우리가 따라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일까?
그러면 33.2km는 맞는 것일까? 그 당시 일본은 킬로미터 단위가 아닌 마일 단위를 썼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 거리에 대한 서로 다른 내용이 나온다.
조선총독부 발행 《조선철도사》 제1권 창시시대엔 22마일(430쪽), 《한국 철도 100년사》(53쪽)를 보면 21마일이라고 나오고, 앞서 언급한 《조선교통사》에 따르면 21.8마일까지 공사를 마치고 21마일까지 임시영업을 개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1마일은 1,609,344mm이다. 21마일이든 22마일이든 33.2km는 나올 수 없다. 21마일이 정설이라고 했을 때 계산하면 약 33.796km가 된다.
9·18과 관련된 또 하나의 논의는 개통식에 대한 것이다. 개통식을 한 장소와 당일의 행사내용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경인철도인수조합은 1899년 말까지 경인철도 전 구간을 개통시킬 계획이었다. 뜻하지 않은 홍수로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열차운행이 가능한 노량진까지를 부분 개통시킨 것이 9월 18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철도사》는 이날 행사에 대해 거의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당시 발행됐던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을 통해 그날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이미 소개된 바 있으므로, 전문을 싣는 것은 지양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소개한 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날의 행사는 인천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서울의 귀빈을 영등포로 모시러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천역에서 개통기념식을 거행하고 준비된 음식을 나눈 후 열차는 서울에서 온 귀빈들과 인천지역 유지들을 태우고 영등포까지 왔다가 귀빈들이 내린 후 지역유지들을 태우고 인천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행사가 모두 끝났다.
이 기록을 통해 개통식 장소가 노량진이냐, 인천이냐 하는 부분은 명확하게 정리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커다란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왜 당시의 신문 기록에 노량진역은 없고 영등포만 계속 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실마리는 <황성신문>의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마포 대안(對岸) 영등포에 정거장을 권설(權設)하고…….” ‘권설’이라고 하는 단어는 요즘엔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임시로 짓는 것을 말한다. 영등포에 임시역사를 지었다는 것인데,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조선철도사》(제1권 창시시대편 431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7개 역 중에서 유일하게 노량진역은 임시역사였다. 1900년 6월 한강교량이 준공되고 같은 해 7월 8일 노량진~경성(서대문) 간 4.3마일의 개통과 함께 새롭게 용산, 남대문, 경성 3개역이 개설되었다. 경인철도 전통과 함께 노량진은 본역을 한강교량 근처에 새롭게 개설하고, 영등포에 설치했던 종래의 노량진임시정거장은 그 영업을 중지했다. 다만, 열차운전상의 필요에 대비해 구내시설은 남겨두었는데, 이곳에서 열차를 이용하려는 여객의 수가 점차 증가하자 같은 해(1900년) 9월 1일 이곳을 본역으로 개설하기로 결정하여 역명을 영등포로 하고 여객과 화물취급을 개시했다.”(요약)
이렇게 해서 영등포에 대한 의문은 가셨으리라고 본다. 사족을 달자면, <독립신문>이나 <황성신문>에 언급된 영등포는 영등포역이 아닌, 영등포지역에 가설된(노량진 쪽은 홍수와 공사 때문에 역사를 지을 수 없었다.) 노량진임시역사였던 것이다. 이 부분이 이해되면 개통거리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린다. 왜 최초의 개통거리에 대한 기록이 22마일, 21.8마일, 21마일 등으로 다양하게 나오는지.
정확한 궤도부설 거리는 21.8마일이 맞을 것이다. 이것을 《조선철도사》는 22마일로 적었고, 실제 영업거리가 21마일이 된 이유는 노량진역이 궤도종단이 아닌 영등포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