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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한국학/한국문화 > 한국문화유산
· ISBN : 9788989011927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5-10-29
책 소개
목차
Ⅰ. 당간, 세속과 피안의 경계
1. 무심천변에 쌓은 읍성, 당간을 돛대 삼다__10
2. 우리의 당간·당간지주__29
Ⅱ. 방방곡곡 당간지주를 찾아
1. 옛 백제 땅에 세운 당간지주 ―경기, 충청편__64
2. 돌로 만든 당간, 이야기와 꿈을 남기다 ―전라편__144
3. 옛 길 곳곳에 자리한 보물을 찾다 ―경상편__192
4.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 사람들의 터전 ―경주편__250
5. 백두대간이 나눈 동서의 옛길에서 ―강원편__282
Ⅲ. 다시 용두사지 철당간을 찾다
1. 시민이 지켜온 철당간__314
2.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톺아보기__318
당간·당간지주 일람표__322
찾아보기__326
저자소개
책속에서
1. 무심천변에 쌓은 읍성, 당간을 돛대 삼다
철당간은 주성舟城의 돛대
청주의 옛 이름 중 하나는 주성舟城이다. 주성은 여러 학교의 이름에도 온전히 남아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옛 기록에 전한다.
구리 돛대[銅檣]는 고을 성안 용두사에 있다. 절은 폐사되었지만 돛대는 남아있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 세상에 전하길, ‘처음 주州를 설치할 때 술자術者의 말에 이것을 세워 배가 가는 형국을 나타내었다.’ 한다. 이승소李承召, 1422 ~1484의 시가 있다.
우뚝 서서 백 자나 높이 솟았으니
지나는 사람이 일러 떠도는 것 같다 하네.
누가 구리 기둥을 남쪽 땅 개울가에 옮겼을까.
한漢 나라 궁궐 정원 구리 기둥[金莖]인가 싶구나.
뿌리는 깊이 박혀 지축地軸을 잇고
꼭대기는 구름 밖에 치솟아 은하수를 꿰뚫었네.
옛사람이 세운 뜻이 없지 않으니
큰 고을과 더불어 한 지방을 지키기 위함이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5 청주목 고적.
술자述者의 말을 빌어 청주는 물길을 가는 배의 형상이라 하였다. 곧 둥근 모양의 읍성을 배로 본 것이다. 따라서 이후 읍성 내에서는 우물을 파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철당간을 마치 배의 돛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당간이 있는 곳은 용두사 터였다. 절 앞에 세운 철당간을 고려하면 옛 청주읍성 터 대부분이 절터였다. 고려 말 용두사는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고 그 자리에 읍성을 쌓았다. 그 후 사람들은 철당간을 무심천에 떠가는 배의 돛대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쇠로 만든 당간
당간은 절 앞에 높이 세워 예불이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던 곳이다. 대부분의 당간은 나무로 만들어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용두사지 철당간은 원래 30단段 60척尺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높이 60cm 안팎의 철통 20단만 남아있다. 용두사 절터도 현재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철당간을 제외하면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밑에서 3번째 철통에 당기幢記가 있어, 건립 목적과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철당간을 세운 이유는 청주사람 김예종金芮宗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세울 것을 부처님께 맹세한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사촌 김희일金希一이 그 뜻을 살려 철당간을 완성하였다. 또 당간기의 끝부분에 준풍峻豊 3년,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에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용두사철당기
전 한림학생 김원金遠이 짓고 썼으며 새긴 사람은 손석孫錫이다.
일찍이 당간을 만드는 이유는 불문의 아름다운 표시이며, 당은 보전을 단장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고 들었다. 그 형상은 마치 학이 푸른 하늘을 맴돌아 날고 용이 푸른 하늘을 뛰는 것과 같아 이를 세운 자는 신심이 크게 되고, 바라보는 자마다 티 없이 맑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진실로 마귀를 굴복시키는 철장대요, 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이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호족이며 권세 있는 집안인 당대등 김예종金芮宗이 갑자기 질병에 걸리자 경건히 철당간을 건립하여 사찰을 장엄하게 할 것을 부처님께 맹세하였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멈출 수 없고 황혼은 저물기 쉬워 몇 년 목숨을 연장하는가 싶더니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에 종형인 당대등 김희일金希一 등이 그의 바람을 살려 마침내 30단의 철통鐵筒을 주성하여 60척의 당간 기둥[幢柱]을 세우니, 구름을 뚫어 해를 받들고 안개를 꿰어 하늘을 의지함과 같았다. 노씨의 구름 사다리로도 용머리까지 오르기 어렵고, 감녕甘寧의 호화로운 밧줄도 이 깃발에는 견줄 바 아니었다. 가히 간절한 정과 깊은 마음으로 금강金剛(당간)을 세우니 영원할 것이며, 사찰도 무궁할 것이다.
부족한 내가 재주도 없이 겨우 한 세상을 살고 있던 중, 갑자기 권하여 짤막한 문장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당간이 새롭게 서니 하늘 가운데 닿으며
정교한 형상은 불법을 장엄하게 하도다
양가형제가 영을 받아 선업을 닦는 마음으로
주철 당간을 세우니 끝없이 영원하여라.
당사 주지 석주 큰스님, 시주 및 주관 김희일, 정조 김수현金守玄 대등, 김석희金釋希 대등, 김관겸金寬謙 대등, 감사 상화상신학信學○○, 전시랑 손희孫熙 대말, 전병부경 경주홍慶柱洪 대말, 학원경 한명식韓明寔 나말, 전사창 경기준慶奇俊 대사, 학원랑중 손인겸孫仁謙 주조○○
준풍峻豊 3년 임술년 3월 29일 쇠로 만들다.
당간기를 쓴 사람은 김원이고, 새긴 사람은 손석이다. 그리고 처음 철당간을 세우려했던 이는 김예종이고 이를 이어 완성한 이는 김희일이다. 이어 승려를 비롯하여 철당간 건립에 참여한 여러 인물이 보인다.
철당기에 보이는 여러 인물을 통해 고려 초 지역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철당간 건립에 참여한 김씨·손씨·경씨·한씨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청주 12개 토성土姓에 포함된다. 고려 초부터 자리 잡기 시작한 본관本貫의 자취로, 철당기의 인물들은 청주의 토성으로 본다.
그리고 이름 앞뒤로 관직과 관등이 보인다. 한림학생이나 정조사단은어대 등은 고려 초 조정으로부터 받은 벼슬이다. 그런데 당대등이나 대등, 말·대말은 신라 때의 관등이다. 철당간을 세운 때가 비록 고려 초이기는 해도 여전히 통일신라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려는 성종 때 안팎의 관직이 갖추어지니 아직 옛 것과 새로운 것이 같이 쓰이던 때다.
그런데 전시랑前侍郞 이하 여러 관직이 문제이다. 특히 학원경學院卿과 학원낭중學院郎中은 청주가 예로부터 교육도시라는 근거로 보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반론이 있지만, 지역세력들은 성종 이전에 다양한 자체 조직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성종 때 창부倉部를 사창으로 바꿨는데, 이미 경기준慶奇俊의 관직에 보이고 있다. 또한 전사창前司倉이라 하여 이미 사창을 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이것을 중앙 관직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통일신라 말부터 지역세력이 중앙을 본떠 자체 통치조직을 갖춘 예에 불과하다. 오히려 철당기에 보이는 관직과 관등은 온전히 통치조직을 갖추지 못한 고려 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편 철당기의 인물이 해당 성씨의 족보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청주가 아닌 다른 본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족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유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직계를 기록하다보니, 세계世系를 달리하면 족보에 기록되지 않았다.
용두사 철당기는 962년 당시 통치조직의 변화와 지역세력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철당간을 만든 이유와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지만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철당간을 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또한 철당간을 세운 용두사에 대한 이해도 거의 없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용두사
지금까지 용두사지 철당간은 철당기에 주목하여 왔다. 당간을 세운 이유와 때가 분명하여, 당시 청주지역 호족세력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철당기를 통해 호족세력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했던 기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당시 청주를 본관으로 했던 호족세력들의 첫 모습도 드러난다.
그렇지만 철당간이 있던 용두사의 창건과 폐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철당기를 제외한 모든 기록에는 단지 구리 기둥인 동장銅檣 뿐이다. 용두사가 언제 만들어지고, 언제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여기서는 남아있는 몇몇 자료를 통해 용두사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용두사가 폐사된 시기를 추정해 보자. 첫 번째 단서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있다. 청주목 고적조에 보살사菩薩寺 금구가 보인다.
지난 경신庚申 8월 고을 사람들이 땅을 파다가 옛 종을 얻었는데, ‘대안6년용두사금구大安六年龍頭寺錦口’라는 글씨가 새겨있고 그 형태가 기이하고 소리가 몇 리 밖까지 들렸다.
대안 6년은 1081년, 1090년, 1214년 등이다. 1081년은 서하西夏의 연호이니 일단 제외하면, 1090년과 1214년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1090년은 요遼나라 연호를 따른 것이고, 1214년은 금金나라 것이다. 금나라 연호를 쓴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없고, 왕이 바뀌어 대안 3년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대안 6년은 1090년이며, 용두사가 적어도 11세기 말까지는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금구를 가지고 용두사의 폐사 시기를 알기는 어렵다. 용두사가 폐사된 뒤 보살사로 옮겨 사용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용두사가 글귀가 남아있는 다른 예가 더 있다. 1993년 10월 청주 무심천변 제방에 전신주를 세우다 발견한 사뇌사思惱(內)寺 유물이다. 480여 점 가까이 출토된 유물 중 용두사가 찍힌 그릇이 있다. ‘용두사동량복진龍頭寺棟梁福眞’이란 글이 새겨진 청동 바리다.
사뇌사는 용두사와 같은 시기에 있던 절이었다. 사뇌사의 존속 시기를 알 수 있는 유물이 있다. 태평太平 15년(1035) 을해乙亥에 만든 청동 접시와 태화泰和 5년(1205)이 새겨진 향을 피운 그릇 등이다. 또 이 절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이 1226년 여름 수행을 했던 곳이다. 따라서 사뇌사는 11세기 전반 이전에 세워 13세기 전반 이후까지 유지된 절이다.
그런데 사뇌사 유물이 한 구덩이에 수백 점 묻힌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예불에 쓰이던 귀중한 제기들을 한 데 묻어버린 것이다. 커다란 변란이 있어 임시로 묻어둔 것은 아니었을까. 난리가 지난 후 다시 찾으려 했으나 묻은 이가 희생되면서 그대로 칠백 년 이상 묻혀 있던 것이다.
제기를 한데 묻고 되찾지 못할 만큼 다급한 상황은 아마도 외적의 침입 등 커다란 변란을 암시한다. 가장 유력한 시기는 바로 고려 때의 몽골과 연이은 이민족의 침입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기록 속에서 청주까지 치달은 외적은 합단哈丹이 유력하다. 1287년(충렬왕 13) 원의 반란 세력인 합단이 진압을 피해 고려로 들이닥쳤다. 그해 5월 이들은 고려의 동북쪽을 따라 내려오며 약탈을 일삼다 원주, 충주 등에서 크게 패하고 청주를 거쳐 세종시 연기에 이르러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아마도 합단의 침입이 고려 후기 청주를 위협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합단이 충주를 거쳐 청주로 몰려온다는 소식은 공포 자체였을 것이다. 피난을 떠나고 산성에 올랐을 것이다. 이때 사뇌사의 승려들은 급한 대로 소중한 제기들을 땅에 묻었을 것이다. 7백여 년이 지나 발견된 것은 묻은 이가 목숨을 잃었던 연유일 것이다. 이때 청주의 커다란 사찰은 거의 불타지 않았을까. 사뇌사는 물론 용두사마저. 이후 이곳에 다시 사찰이 들어서지 못하였다.
합단의 침입 이후 용두사는 다시 복구되지 못한 채 철당간만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362년(공민왕 11) 왕이 청주에 6개월 가까이 머물렀음에도 용두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안동까지 피난 갔다 되돌아온 왕이 이곳에서 과거를 실시하고 팔관회 등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두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따라서 합단의 침입으로 용두사는 불타고 돌로 만든 당간지주와 쇠로 만든 철당간만 남아있을 수 있었다. 비록 추정에 불과하지만 이로써 용두사가 폐사된 시기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용두사를 세운 시기는 언제일까. 당연히 준풍 3년인, 962년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 철당기로 인해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고, 여기서 분명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두사지 철당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혹 철당간 이전 다른 재질의 당간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따라서 철당간이 세워진 962년 이전 이미 용두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