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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문인에세이
· ISBN : 9788991934993
· 쪽수 : 176쪽
· 출판일 : 2011-09-16
책 소개
목차
Letter 1. 지극하긴 하였는가!
Letter 2. 통곡의 집을 지나
Letter 3. 안항 뒤에서
Letter 4. 날갯소리
Letter 5. 눈석임 물 불어나지만
Letter 6. 존재의 뒤편
Letter 7. 우일신하는 마음으로
Letter 8. 공부라는 말
Letter 9. 놀이 속의 빛들은 또 어찌해야 합니까
Letter 10. 갓 낳은 달걀
Letter 11. 창을 봐야 할지 책을 봐야 할지
Letter 12. 아름다움을 아는 이
Letter 13. 봄꽃 찬란한 때를 기다려
Letter 14. 흘러가는 강물처럼
Letter 15. 모란이 피어
Letter 16. 소포와 손수건
Letter 17. 소랑한 일들
Letter 18. 무등산 옛길
Letter 19. 보이지 않는 눈동자
Letter 20. 남쪽으로 난 창
Letter 21. 조그만 설렘 혹은 서글픔
Letter 22. 땅에 떨어진 살구에 대하여
Letter 23. 되살아나는 귀맛
Letter 24. 야생의 기억을 찾아서
Letter 25. 눈동자를 보고 싶습니다
Letter 26. 사랑의 기울기
Letter 27. 어떤 종묘사를 상상함
Letter 28. 최초의 신발
Letter 29. 다시 조그만 여정
Letter 30. 펜과 끌과 호미와 재봉틀
리뷰
책속에서
지금 제가 잠시 머물고 있는 데는 강원도 인제입니다. 강원도에 오면 다른 무엇보다 나무들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겨울이니 겨울나무들입니다. 엊그제는 가까운 곳에 산보를 다녀오다가 얼핏 나뭇가지들의 기색이 좀 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아주 조그만 변화였습니다만 분명 먼 데서 온 미소가 틀림없었습니다. 봄의 예감입니다.
동지冬至에 대해 생각합니다. 겨울의 지극한 지점, 하여 이제 내리막으로 향하는 거기. 《주역周易》이었던지 동지 지나면 봄으로 친다는 구절을 본 적 있습니다. 황진이의 그 절창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하는 시 또한 생각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의미도 새삼 새겨 봅니다. 지금 우리 나이가 꼭 그 지점을 지나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나이로 치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한 꼭짓점의 안팎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을 향하는 질문이 하나 그 옛날 삐뚜름하게 붙였던 우표처럼 따라 나옵니다. ‘헌데 지극하긴 하였는가?’ 지극하긴 하였는가!
남녘에 먼저 오는 봄의 예감을 기대합니다. - <지극하긴 하였는가!> 중에서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오늘의 절박한 슬픔에 대해 쓰자. 마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내 동생, 아름다운 영혼 나혜민에 대해 쓰자. 마음을 간신히 일으켜 보았지만, 지난 2주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새벽 1시, 고속도로 순찰대의 전화를 받고 낯선 도시의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동생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밤길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는 순간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까.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까. 손끝에 만져지는 냉기와 어머니의 오열하는 모습 사이에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굳게 감긴 동생의 눈을 다시 한 번 쓸어내리고 복도에 앉아 사망진단서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장례를 마치고 동생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다이어리 첫 장에 적힌 짧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문태준 시인이 천양희 시인의 시 <뒤편>에 붙인 단상이었습니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뒤편을 감싸 안는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뒤편에 슬픈 것이 많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마치 비 오기 전 마당을 쓸 듯 그의 뒤로 돌아가 뒷마당을 정갈하게 쓸어 주는 일이다.”
이 말처럼 모든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뒤편이 있고, 슬프고 남루한 것들은 주로 그 뒤편에 숨겨져 있기 마련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그곳까지 눈과 귀와 손과 발을 정성스럽게 기울이는 일이라는 것을 제 동생은 잘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런 마음과 태도로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듯합니다. 장례식장에 찾아와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 가족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지, 얼마나 품이 깊고 온화한 사람이었는지 뒤늦게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이 존재의 뒤편을 남김없이 보여 주는 일이라면, 그가 남긴 뒤란은 소박하고 정갈했습니다. - <존재의 뒤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