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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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 모스크바에서 의사였던 아버지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슬하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공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842년 소위로 임관하여 공병 부대에서 근무하다 1844년 문학에 생을 바치기로 하고 중위로 퇴역한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 같은 작가들과는 달리, 유산으로 받은 재산이 거의 없었기에 유일한 생계 수단이 작품을 쓰는 일이었다. 1849년 4월 23일 페트라솁스키 금요모임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형집행 직전 황제의 사면으로 죽음을 면하고 시베리아에서 강제노역한다. 1854년 1월 강제노역형을 마치고 시베리아에서 병사로 복무한다. 1858년 1월 소위로 퇴역하고 트베리에서 거주하다 1859년 12월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다. 1857년부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함께했던 아내 마리야 이사예바가 1864년 4월 폐병으로 사망한다. 그해 6월 친형이자 동업자였던 미하일이 갑자기 사망한다. 1866년 잘못된 계약으로 급히 소설을 완성해야 했던 작가는 속기사 안나 스니트키나를 고용하여 《도박사》와 《죄와 벌》을 완성하고 이듬해 1867년 2월 속기사와 두 번째로 결혼한다. 1867년 아내와 함께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의 여러 도시를 떠돌며 《백치》, 《영원한 남편》, 《악령》 등을 쓴다. 해외에서 거주하는 동안 세 아이가 태어난다. 작가가 46세일 때 태어난 첫 달 소피야는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사망한다. 작가에게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안나 스니트키나는 작가의 마지막 날까지 든든한 옆지기로 남는다. 1881년 1월 28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를 구상하고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앓던 폐기종이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1881년 2월 1일 장례식을 찾은 6만여명의 인파가 떠나는 작가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도스토옙스키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티흐빈 묘지에서 안식하고 있다. 대표작은 《가난한 사람들》, 《백야》, 《분신》,《죽음의 집의 기록》, 《지하에서 쓴 회상록》, 《도박사》,《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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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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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1881년 저쟝 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의 투옥과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난징의 강남수사학당과 광로학당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공부했으며,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02년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 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다 환등기에서 한 중국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그저 구경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국민성의 개조를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갔다. 도쿄에서 잡지 《신생》의 창간을 계획하고 《하남》 에 「인간의 역사」 「마라시력설」을 발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9년 약 7년간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항저우 저쟝양급사범 학당의 교사를 시작으로 사오싱, 난징, 베이징, 샤먼, 광저우, 상하이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신해혁명 직후에는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루쉰이 문학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18년 5월 《신청년》에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이다. 이때 처음으로 ‘루쉰’이라는 필명을 썼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이 수록된 『외침』을 비롯하여 『방황』 『새로 엮은 옛이야기』 등 세 권의 소설집을 펴냈고, 그의 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잡문(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화개집』 『무덤』 등을 펴냈으며, 그 밖에 산문시집 『들풀』과 시평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루쉰은 평생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분노하고 저항했는데, 그 싸움의 무기는 글, 그중에서 잡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루쉰을 일컬어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으로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 혁명가”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루쉰은 1936년 10월 19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발한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 문학단체 조직, 반대파와의 논쟁, 강연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중국의 부조리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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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누트 함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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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년 노르웨이의 구드브란스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크누드 페테르센. 1862년에 가족 모두 노르웨이 북부 하마뢰위에 있는 함순으로 이사했는데, 훗날 이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다. 가난 때문에 어린 시절 삼촌 집으로 가서 일을 도왔고, 청소년기에는 상점 점원, 제화공, 잡상인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876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두 번 건너가 몇 년씩 체류했으나 크게 실망하고 미국의 현대문명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1890년 『굶주림』이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노르웨이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신비』 『목신 판』 『빅토리아』 등을 발표해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1911년 농장을 구입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시대의 아이들』 『세겔포스 마을』 『땅의 혜택』 등 목가적인 작품을 주로 썼다. 그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땅의 혜택』은 문명의 공허함 안에서 인간성을 되찾고 위대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함순이 1920년 노벨문학상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친독일적인 발언을 한 일로 전쟁이 끝난 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다. 1947년 벌금형을 받아 재산의 대부분을 벌금으로 낸 후 집으로 돌아왔고, 1949년 『풀이 무성한 오솔길에서』를 출간했다. 1952년 9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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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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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루마니아 북쪽 몰도바의 라스보에니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틴 게오르규는 뻬트리까니에서 정교회 사제로 봉직했다. 1928년부터 1936년까지 키시너우에 있는 군사기숙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고, 그 후 부쿠레슈티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1942년과 1943년 사이,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 정권 아래서 크로아티아 주재 루마니아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44년 소비에트 군대가 루마니아에 주둔하자 망명을 떠났다가,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유로 연합군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고, 우여곡절 끝에 1948년 프랑스에 정착했다. 1949년 파리에서, 수용소에 있는 동안 집필했던 소설 『25시』를 출판했다. 1963년 47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루마니아 정교회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1969년 루마니아 정교회 유스티니아누스 총대주교는 전례적, 문학적 활동에 대한 공훈으로 총대주교의 십자가를 수여했다. 1971년 콘스탄티노플의 아테나고라스 세계총대주교로부터 공훈을 기리는 세계총대주교의 십자가를 수여 받았다. 1974년, 1976년, 1984년에 한국을 방한하였다. 1992년 75세의 나이로 안식하여 파리의 파시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대표 작품으로는 『25시』, 『불멸자들의 민족』, 『뻬트로다바의 집』, 『내 이름은 왜 비르질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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