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6622987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16-11-11
책 소개
목차
007 체스의 모든 것 Everything About Chess
079 창작노트 Writer’s Note
093 해설 Commentary
119 비평의 목소리 Critical Acclaim
리뷰
책속에서
그리고 국화가 가장 못 견뎌한 건 함께 무언가를 먹고 더치페이 할 때 잔돈을 돌려주지 않는 선배의 버릇이었다. 사실 나도 알고 있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는데─왜냐면 의도라기보다는 실수 같았으니까─국화는 가차 없었다. "선배 그러다 그 돈 모아서 집 사겠어요."라고 해서 선배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 국화가 입을 열 때마다 선배는 힙하고 쿨한 우울한 청춘에서 어딘가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흔한 20대로 달라졌다. 그만 하면 화낼 만도 한데 노아 선배는 이상하게 분노에 휩싸이지도 속을 끓이지도 않았다. 선배는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 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대학에서 만난 1998년의 세상을. 이런 걸 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공장들이 문을 닫고 일자리를 잃어선 안 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어디를 가도 그런 행렬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죽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법으로 여기를 빠져 나갔고 우리는 스무 살을 통과해 그때 그들의 나이였을지 모를 나이가 되었는데, 우리는 왜 체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마음을 누르는 어떤 불행에 대해서는 솔직히 이야기하고 위안 받지 못할까. 지금도 생각을 한다. 그런 건 왜 그렇게 어려워. 지난 일이니까 지난 일은 지난 일대로 보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구제불능의 술꾼”들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가상이 파괴되고 드러난 맨얼굴, 패배한 자들의 한심하고 고통스런 얼굴에서 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는 자의 서늘한 마음 한편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만이 아니라 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사랑이 존재한다.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이 시대에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윤리적 감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