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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91164459162
· 쪽수 : 704쪽
· 출판일 : 2024-03-30
책 소개
목차
12. 벨기에_ 안트베르펜 Antwerpen /1885년 11월 말~1886년 2월 말
13. 프랑스_ 파리 Paris /1886년 3월~1888년 2월 20일
14. 프랑스_ 아를 Arles /1888년 2월 21일~1889년 5월 8일
15. 프랑스_ 생 레미 St. Remy /1889년 5월~1890년 5월
16. 프랑스_ 오베르 쉬르 와즈 Auvers sur Oise /1890년 5월 21일~7월 29일
빈센트 반 고흐 연보
옮긴이의 글
책속에서
오늘부터는 내가 묵고 있는 이곳의 카페 실내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에 가스등을 켜놓은 분위기를. 여기 사람들은 <밤의 카페>라고 부르는데(여기 사람들 단골집이야) 밤새도록 문을 열어. 그래서 ‘밤의 부랑자’들이 숙박비가 없거나 술에 너무 취해 받아주는 곳이 없을 때 안식처처럼 찾아오곤 해. 가족이나 조국 같은 것들은, 가족은 물론이고 조국도 없이 근근이 버텨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그 어떤 현실보다 매력적일 수 있어. 나는 나 자신이 언제나, 어딘가의 목적지를 향해 떠도는 여행자 같다고 느껴. 하지만 그 어딘가, 어떤 목적지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이성적이고 진실된 자세인 것 같다.
(……) <밤의 카페>라는 그림에서, 카페가 사람들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미치광이가 되고, 범죄자도 되는 공간임을 표현하려고 했어. 은은한 분홍색과 시뻘건 빨간색과 와인색, 루이 15세풍의 은은한 초록색과 베로니즈그린, 황록색과 진한 청록색 등등을 대비시켜서 연한 유황이 끓고 있는 지옥의 가마솥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지. 싸구려 술집의 어두운 구석이 뿜어내는 음침한 힘을 보여주고 싶어서. 하지만 일본식의 밝은 화풍과 타르타랭처럼 쾌활한 분위기도 어느 정도는 살려봤다.
테르스테이흐 씨는 이 그림을 보고 뭐라고 할까?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 가장 은밀하고 섬세한 시슬레의 작품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 양반이잖아. “화가가 다소 취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고밖에 볼 수 없군.” 그러니 내 그림 앞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겠지. 극심한 섬망 상태에서 그렸다고
_518번 편지, 534번 편지
두 번째 그림은 별이 총총히 뜬 밤하늘을 배경으로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는 카페의 외부 전경이야.
이번 주의 세 번째 그림은 내 자화상인데, 거의 색을 쓰지 않은 무미건조한 분위기야. 연한 베로니즈그린 바탕에 회색조를 많이 썼다. 모델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자화상이라도 그리려고 일부러 쓸 만한 거울을 하나 샀어. 왜냐하면 내 얼굴의 색조를 잘 살려서 그려낼 수 있으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다른 이들의 얼굴도 그럴듯하게 그릴 수 있거든.
야경과 밤의 효과들, 밤의 실체를 현장에서 그리는 일이 어마어마하게 흥미롭단다. 이번 주에는 먹고, 자고, 그림만 그렸다. 그러니까 12시간을 내리 그림을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6시간씩 나눠서 그리기도 하고, 아무튼 그후에 12시간을 내리 자는 식이었어.
_537번 편지
<씨 뿌리는 사람> 크로키네. 넓은 밭이 온통 쟁기질한 흙덩어리들인데, 거의 자주색이야.
잘 익은 밀밭은 황갈색과 노란색 색조에 양홍색이 아주 살짝 들어간 느낌이고.
크롬옐로 1호로 칠한 하늘은, 거기에 흰색을 더한 태양만큼이나 밝고, 나머지 하늘도 크롬 옐로 1호와 2호를 섞은 색이야. 한마디로 샛노랗다는 거지.
씨 뿌리는 남자의 작업 셔츠는 파란색이고 바지는 흰색이야. 캔버스 크기는 25호.
바닥 흙에도 노란색을 사용했는데, 자주색을 섞은 무채색 색조야. 솔직히, 색상을 예쁘게 뽑아내는 것에는 관심이 없네. 차라리 낡은 시골 달력처럼 그리는 게 더 좋아. 늙은 농부의 집에 걸려 있을 법한, 우박, 눈, 비, 화창한 날 등을 완전히 원시적으로 그린 그림 말이야. 앙크탱의 <추수>가 딱 그런 분위기지. 자네에게 털어놓았듯이 난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시골이 싫지 않아. 오히려 과거의 기억 조각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이나 짚단더미를 보면 그 시절 영원한 것을 동경했던 마음이 되살아나면서, 또다시 매료되어 버린다네.
그런데 줄곧 그려보고 싶었던 별이 빛나는 밤 풍경은 언제나 그릴 수 있으려나. 아, 아쉬워! J. K. 위스망스의 『결혼 생활』에서 대단한 친구, 시프리앙이 이렇게 말했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그러나 실제로는 결코 그리지 않을 그림이다” 하지만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위대하고 완벽한 자연 앞에서 내가 한없이 못나고 무능하다고 느껴져도, 기어이 그리게 될 거야.
_베7번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