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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시대 일반
· ISBN : 9791167374714
· 쪽수 : 244쪽
· 출판일 : 2024-11-3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1장
『운천호종일기』에 수록된 임진전쟁기 선조의 외교 의례 시행과 의미 • 신진혜
머리말 | 임진전쟁기 외교 의례의 양상 | 『운천호종일기』 선조 26년 8월의 의례 기록 분석 | 맺음말
2장
권문해의 『초간일기』에 기록된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사례와 그 의미 • 김성희
머리말 | 권문해의 생애와 『초간일기』 | 『초간일기』 수록 기양제의 기사의 역사성 | 『초간일기』 수록 기양제의 치제 기록 분석 | 맺음말
3장
18세기 대구 옻골 최흥원 가족의 기제사 실천 양상 • 박미선
머리말 | 백불암 최홍원과 그의 가문 | 기제사 실천의 양상 | 기제사 실천의 특징 | 맺음말
4장
『하와일록』을 통해 본 안동 사족 류의목의 일생 의례 • 윤혜민
머리말 | 부친 류선조에 대한 상례 | 관례와 혼례의 실행 | 맺음말
5장
일기를 통해 본 승문원 관원의 면신례 시행 양상 - 『계암일록』과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 임혜련
머리말 | 문과 급제자의 승문원 분관과 면신례 | 면신례의 시작, 신급제 침희 | 승문원 권지의 회자 | 허참례 시행, 면신례의 마침 | 맺음말 : 면신례의 폐해, 그럼에도 중요한 의미
저자소개
책속에서
『일기로 본 사족의 의례 생활』은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 심층연구 포럼의 결과물로, 임진왜란 때 외교 의례의 생생한 모습,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조선후기 사족들의 관례·혼례·상례·제례의 실제적 사례, 승문원 관원의 면신례 모습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담고 있다. 『운천호종일기』, 『초간일기』, 『역중일기』, 『하와일록』, 『계암일록』, 『청대일기』 등에는 조선시대 사족들의 의례 생활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2023년 5명의 연구자가 모여 1년 동안 ‘조선시대 일기 속 사족의 의례’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같이 공부하고 서로 질문을 던지며 논의를 심화시켜 나가면서 의례 생활에 대해 다각도에서 검토했다.
-- 머리말
임진전쟁기에 선조가 명 장수에 대해 시행했던 접대와 제반 의례가 어떤 형식으로 시행되었는가에 대해 『선조실록』과 『운천호종일기』를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명에서 군사를 파견한 이후로는 명 사신을 대접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 의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선조 25년 임진전쟁이 발생했던 초반에는 명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였기에, 선조는 명 사신과의 접견과 연례 절차를 초라하게 준비하면서 조선이 처해 있는 힘겨운 상황을 전달하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조 26년 평양 탈환 이후 강화교섭 시기에 접어들면서 선조는 몸소 명군을 예우하는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면서 그들의 조력을 이끌어 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선조가 직접 명 장수에 대해 감사의 뜻을 담은 배례인 사배와 고두례를 행하거나 몸소 나서서 명 하졸들까지 모두 아울러 예우하려 했다. 국왕인 선조가 직접 『국조오례의』에 정해진 절차가 아닌 사배를 추가로 시행한다거나, 황제가 아닌 명 제독을 위해 고두례를 시행했던 것은 당시 조선이 처해 있었던 특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선조는 이렇게 명나라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한편으로는 절박함을 전달하고 협상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 『운천호종일기』에 수록된 임진전쟁기 선조의 외교 의례 시행과 의미
『초간일기』에 수록된 기우제·여제·해괴제·기청제 치제 기록에 대한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권문해는 대구 부사로 있던 시절 사직단 등지에서 기우제를 지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그가 1588년(선조 21) 윤6~7월에 설행한 기우제는 조선 성종 연간에 제정된 기우제 설행 차제와 내용이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16세기 후반 무렵에는 국가에서 제정한 기우제 규정이 지방 각처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준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1589년(선조 22) 6월 10일에 권문해가 장님 무당과 승려들을 모아 기우제를 설행했던 사실은 비유교적 의례 속성이 당시까지 잔존하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사례로 인식된다. 한편, 『초간일기』에는 당시 권문해가 직접 지어 사용한 기우제 제문 2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비를 염원하는 목민관 권문해의 간절한 마음과 더불어 권문해가 의례 수행 시 그 의례의 내용과 속성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갖추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권문해는 대구 부사로 있던 시절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거나 억울하게 죽어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는 여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제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1590년(선조 23) 2월 15일에 권문해가 거행한 여제는 도내에 창궐한 역병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는 죽은 자의 영혼이 흩어지지 않고 맺혀 있으면 그 원기로 인해 역병이나 가뭄 등의 변괴가 초래된다는 유교 관념에 기반을 둔 의례 행위다. 한편 권문해는 여제를 지내기 3일 전 성황단에서 발고제를 거행하였는데, 이는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여제 의주에 정확히 부합하는 여제가 주현 단위에서 거행되고 있었던 사실을 증언하는 사례다.
셋째, 권문해는 대구 부사로 있던 시절 사직단에서 해괴제를 거행한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해괴제는 성변이나 지진과 같이 괴이한 재이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한 조치로 거행되던 기양제의였다. 권문해는 1590년(선조 23) 2월 3일 지진으로 인해 해괴제를 거행하였다. 앞선 연구를 통해 조선 시기의 해괴제는 단종 대를 기점으로 그 설행 사유가 지진으로 단일화되는 경향이 있음이 확인되었는데, 권문해의 해괴제 설행 사실은 이와 같은 기왕의 입론과도 정확히 부합하는 내용이다. 해괴제는 조선 전기의 국전 또는 법전 등에 독립된 의례 항목으로 편제되지 않고 『대전통편』에서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을 뿐이지만, 권문해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향축을 받아 사직단에서 해괴제를 거행한 사실을 통해 문종 연간 이래 중앙과 외방의 해괴제가 일정한 정식에 의해 거행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넷째, 권문해는 경중에서 기청제를 지낸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그는 1583년 3월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동년 6월에 사직하고 귀향하였는데, 이즈음인 1583년(선조 16) 6월 4일 일기에 기청제 거행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권문해는 이로부터 사흘 후인 6월 7일 서울을 떠나 귀향길에 오르는데 고향인 예천으로 내려가는 길에 목격한 물난리의 참상을 계속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기청제가 홍수로 인해 설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기 도성에서 거행된 기청제는 도성의 사대문 안쪽에서 거행되었으며, 산천신을 대상으로 설행되던 제사다. 비록 기청제와 관련한 정확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홍수에 대응하는 조치로서 기청제 설행 사실을 확인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 권문해의 『초간일기』에 기록된 16세기 후반 외방 기양제의 사례와 그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