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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인문 에세이
· ISBN : 9791190234931
· 쪽수 : 308쪽
· 출판일 : 2023-03-16
책 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15
지하에서|29
프로이트의 그늘 아래에서, 파트 1|43
프로이트의 그늘 아래에서, 파트 2|67
카바피의 침대|88
제발트, 허비된 삶들|105
슬론의 가스등|122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모드 혹은 규방의 철학|134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클레르 혹은 안시호수의 소소한 소란|169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클로에 혹은 오후의 불안|197
햇빛 비추는 밤의 배회|216
스크린의 다른 어딘가|242
스완의 키스|251
가단조의 베토벤 수플레|272
거의 다 오다|282
코로의 빌다브레|289
페르난두 페소아에 대한 미완의 생각|293
감사의 글|306
책속에서
자꾸만 생각나고 또 생각나는 네 문장이 있다. 몇 년 전 내가 쓴 문장인데 지금도 내가 그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마음 한편에서는 그 네 문장을 철두철미하게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게 하려다 말로는 전달될 수 없는 의미를 완전히 꺾어 버릴까 봐 두렵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가 더 깊이 숨어들 여지를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거의 이런 느낌이다. 그 네 문장이 작가인 나조차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를 바라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 내가 말을 부여했으나 그 의미는 내 것이 아닌 셈이다.
예술은 삶이 아니라 형태를 추구한다. 삶 자체는, 그와 더불어 이 세상 역시 사물, 그것도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사물의 문제다. 반면 예술은 혼돈으로 설계와 논리를 착상하는 것이다. 예술은 형태를 통해, 단순히 형태를 통해 지금까지 보이지 않은 것이자 앎이나 이 세상이나 경험이 아닌 형태만이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을 불러일으키길 원한다. 예술은 경험을 포착해 그 경험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형태 자체로 경험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며, 형태가 경험이 되면 더욱 좋은 시도가 된다. 예술은 노동의 산물이 아니라 사랑의 노동이다.
나는 언제나 딱히 그곳에 없는 것을 찾는다. 그곳에 있다고들 말하는 것에 등을 돌리면 그 외의 더 많은 걸 찾기 때문이다. 그중 상당수는 처음엔 비실재적인 것 같지만 일단 말을 가져다 붙이며 탐색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결국은 더 실재적인 것이 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 오래전에 허물어진 건축물, 가 본 적 없는 여행지, 계속해서 우리를 이끌어 준 삶과 아직 오지 않은 삶을 살펴보노라면, 어느 순간 갑자기 알아채는 일이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더라도 뭔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 뭔가가 더 명확해진다. 내가 아직은 딱히 존재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찾는 이유는, 마침표를 찍지 않음으로써 숨어서 때를 기다리는 뭔가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장을 끝맺지 않으려는 이유와 똑같다. 내가 모호함을 탐구하는 이유는 모호함 속에서 사물들의 성운,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들이나 한때 존재했다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빛을 내뿜는 것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속에서 내 시간의 오점을 발견한다.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일어나진 않았으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비실재적인 것은 아니며 여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되 이번 생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봐 초조한 그런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