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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유럽사 > 독일/오스트리아사
· ISBN : 9791192913025
· 쪽수 : 484쪽
· 출판일 : 2023-02-20
책 소개
목차
지도: 1942~1943년 폴란드 및 루블린 구역
한국어 초판 서문
초판 서문
1 | 유제푸프에서의 어느 아침
2 | 치안경찰
3 | 치안경찰과 최종해결: 1941년 러시아
4 | 치안경찰과 최종해결: 강제이송
5 | 101예비경찰대대
6 | 폴란드에 도착하다
7 | 집단학살의 서막: 유제푸프 학살
8 | 집단학살에 대한 성찰
9 | 워마지: 2중대의 추락
10 | 8월 트레블링카행 강제이송 열차
11 | 9월 말의 학살
12 | 다시 시작된 강제이송
13 | 호프만 대위의 이상한 병
14 | “유대인 사냥”
15 | 마지막 집단학살: “추수감사절 작전”
16 | 그 이후
17 | 독일인, 폴란드인, 유대인
18 | 아주 평범한 사람들
2판 후기
3판 후기: 이후 25년
감사의 말
부록: 101예비경찰대대가 사살・이송한 유대인 수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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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초판 서문
‘학살자들의 이야기’ 같은 주제를 다루는 역사 서술은 관련자들을 단순히 악마적 존재로 규정하는 어떠한 시도도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강제이송을 담당했던 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이 작전에 참가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거나 은밀하게 회피했던 다른 대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모든 학살자나 회피자의 행위를 최대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한다면 동일한 상황에서 스스로 학살자 또는 회피자─양자 모두 인간─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인정은 사실상 두 가지 행동 양식으로 감정을 이입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나는 설명이 변명을, 이해가 용서를 의미한다는 식의 상투적인 옛 설명 방식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설명은 변명이 아니며 이해는 결코 용서가 아니다. 범죄자들을 인간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는 이 연구뿐 아니라 조잡한 일차원적 캐리커처 수준을 넘어서 홀로코스트 학살자들을 깊이 있게 다루는 어떠한 역사 연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유대계 프랑스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직전 이렇게 썼다. “우리의 연구를 이끄는 목표는 결국 오직 한 단어 ‘이해(understanding)’이다.” 나는 바로 이 정신에 입각해서 이 책을 집필하고자 했다.
5.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의 평범한 대원들의 절대 다수는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약 63퍼센트는 노동자 계층 출신이었으나 숙련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 대원들의 평균 연령은 39세였으며 그중 절반 이상이 정규군으로 복무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고 간주되는 37세에서 42세 사이여서 1939년 9월 이후 예비경찰직에 집중 징집되었다. (…)
전체적으로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은 독일 사회에서 낮은 계층 출신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신분 상승이나 지리적 이동을 경험하지 않았다. (…) 나이로 볼 때 그들이 성장한 시기는 모두 나치 이전이었다. 그들은 나치의 이념과는 다른 정치적 가치들과 도덕 규범을 아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가장 덜 나치화된 지역으로 명성 있던 함부르크 출신이었으며 다수는 정치문화적으로 반(反)나치 정서를 갖고 있던 사회계급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치의 비전, 즉 ‘유대인 없는 인종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한 집단학살자를 배출하기에 매우 유망한 집단은 아니었을 것이다.
8. 집단 학살에 대한 성찰
유제푸프에서는 500명 가운데 단 12명 정도의 대원들만 트라프 소령의 제안에 본능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임박한 집단학살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애초부터 사살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 대원들의 수는 왜 이렇게 적었을까? 트라프의 제안이 갑작스러웠다는 것이 부분적인 원인일 수 있다. 대원들은 유제푸프 작전에 대해 들은 순간 매우 “당황했다”. 그들은 아무런 사전 경고도 받지 못했고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트라프의 제안에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없었을 때 그들은 그만 첫 번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 그날 아침 유제푸프에서 트라프의 제안에 따라 앞으로 나서는 행동은 대원들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자신이 너무나 “약한” “겁쟁이”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한 대원이 나중에 강조했듯이, 그 누가 “감히” 집결한 부대원들 앞에서 “체면을 잃고자” 하겠는가? 여러 차례 사살을 집행한 끝에 결국 사살조 면제를 요청했던 한 대원은 “만약 누군가 내게 도대체 왜 처음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사살조에 참가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겁쟁이 취급을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사살을 거부하는 것은 우선 노력하다가 나중에 더이상 계속 사살할 수 없게 된 것과 전혀 다르다고 덧붙였다. 대열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정말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훨씬 잘 알았던 또 다른 대원은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다. “나는 겁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