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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91196407605
· 쪽수 : 219쪽
책 소개
목차
책을 펴내며.................................3
01. 신라 동궁의 변화와 임해전의 성격(전덕재) ................9
02. 고려 동궁의 전각명과 구조에 대한 검토(나용재) .............67
03. 조선시대 궁궐의 동궁 건물(김문식) ...................95
04. 중국 수.당 장안성 동궁의 구조와 성격
-위진남북조 도성의 동궁과 연관하여(최재영) ...............129
05. 고대 일본의 동궁에 관한 연구(강은영) .................165
찾아보기..................................209
저자소개
책속에서
동궁(東宮)은 국왕이 거처하는 정궁(正宮)의 동쪽에 위치한 건물이라는 의미로서 춘궁(春宮) 또는 청궁(靑宮)이라고도 불렀고, 거기에 태자(또는 세자)가 거처하였기 때문에 태자(또는 세자)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함께 사용되었다.
중국에서 처음에 동궁은 주(周) 왕실이 분봉한 제후를 지칭하거나 또는 지명과 방위상 동쪽에 있는 건축물을 가리키는 범칭이었다. 전한시대(前漢時代)에 동궁은 태자뿐만 아니라 황태후(皇太后) 또는 황태후의 거처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고 알려졌다. 후한대(後漢代)부터 비로소 동궁이 태자를 가리키거나 또는 태자가 거처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위진남북조에 이르러 동궁제도가 체계적으로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6세기 말 이후에 차기 황위계승자가 정전의 동남쪽에 위치한 전각에 거처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율령체제가 성립된 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동궁에 황태자가 거처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동궁과 관련된 여러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한 것으로 확인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통일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태자가 거처하는 공간을 동궁이라고 부르고, 태자를 동궁이라고 별칭하였음을 알려주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삼국사기.에 679년(문무왕 19)에 신라에서 처음으로 동궁을 건립하였다고 전하지만, 통일신라에서 태자를 동궁이라고 별칭하였다는 구체적인 자료를 발견할 수 없다.
고려시대에 태자(또는 세자)가 정궁의 동쪽에 위치한 동궁에 거처하고, 그것이 비로소 태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지금까지 고려의 태자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사 및 책봉의례, 동궁 부속 관서의 운영실태를 밝히는 연구가 중심을 이루었고, 개경에 위치한 고려 동궁의 규모나 거기에 위치한 전각의 구조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흡한 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 동궁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고, 게다가 동궁의 건물 명칭과 배치를 기재한 도면도 다수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동궁의 구조와 건물 배치, 동궁제도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상당히 심화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본서에서는 먼저 신라 동궁의 운영과 동궁에 부속된 관청, 동궁 내에 위치한 임해전의 성격을 규명한 논고를 게재하였다. 이 논고에서는 한국 고대의 문헌과 금석문, 목간 등에 전하는 신라 동궁과 거기에 위치한 당호 및 문호의 기능, 동궁 및 월지 구역에서 발굴 조사된 건물지의 성격과 용도를 검토하고, 이와 더불어 신라 동궁 및 그와 관련된 제도의 변천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어서 고려와 조선시대 동궁의 성격 및 건물 배치 현황, 동궁제도에 대해 검토한 논고를 게재하고, 마지막으로 한국 동궁의 기원과 변천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해 선진시대(先秦時代)에서 수·당대(隋·唐代)에 이르는 중국의 동궁 및 동궁제도의 변천을 다룬 논고, 고대 일본 동궁의 성립과 변화과정 등을 살핀 논고를 수록하였다.
본서를 통해 우리나라 동궁의 역사에 대한 종합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이해가 어느 정도 가능해질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중국에서 정비된 동궁제도가 한국, 일본으로 전래되면서 어떻게 변모되었는가에 대한 이해도 심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우리나라 동궁과 중국 및 일본 동궁에 대한 비교 검토를 통해 우리나라 동궁의 특징적인 면모, 동아시아 궁궐사에서 차지하는 우리나라 궁궐 및 동궁의 역사적 위상을 규명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널리 주목을 받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향후 신라와 고려, 조선의 동궁 건물 복원을 위한 계획을 수립할 때에도 본서가 커다란 참고가 될 것으로 확신하는 바이다.
- 머리말
1장 신라 동궁의 변화와 임해전의 성격
2. 동궁의 내부구조와 성격 변화
1) 동궁의 내부구조
월지, 즉 안압지에서 ‘사정당(思正堂)’이란 명문이 새겨진 철제자물쇠가 발견되었는데,49 이에서 동궁 내에 사정당이란 당호(堂號)를 가진 건물이 존재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애장왕 5년(804)에 동궁에 만수방(萬壽房)을 지었다고 한다. 이밖에 목간을 통하여 동궁에 우궁(隅宮)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정당(思正堂)은 ‘정사(政事)를 바르게 행하기를 생각하는 건물’이란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남조시대 동궁의 정전(正殿)이 숭정전(崇正殿)이며, 이것을 숭정전(崇政殿)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에 의거하여 사정당(思正堂)을 사정당(思政堂)으로 표기하여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경복궁의 편전(便殿)이 사정전(思政殿)인데, 정도전(鄭道傳)은 ‘매일 아침 이 전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殿下)에게 모두 품달(稟達)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기 때문에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신은 이 전을 사정전(思政殿)이라고 명명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언급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정황을 두루 감안하건대, 사정당이 동궁 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 즉 태자가 정무를 처리하거나 태자가 학문을 닦거나 또는 태자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의례를 거행하던 건물이었다고 보아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최근에 안압지 동편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여러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1호 건물지는 정면 9칸 이상, 측면 4칸을 가진 동향 건물이고, 남·북 양 끝에 계단시설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건물지의 평면 크기는 정면 16.4m, 측면 13.2m이며, 한 칸의 규모와 형태는 정면 2.4m×측면 3.2m의 장방형 또는 2.4m×2.4m나 3.2m×3.2m의 정방형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발굴보고자는 이 건물을 7세기 후반에 조성된 전각건물로 추정하였다. 1호 건물지와 관련이 있는 남북방향으로 설치된 1호담장지와 그것과 연결된 회랑지는 현재까지 95.6m 이상의 길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1호 건물지와 담장지는 7세기 후반 동궁을 조성할 때에 적어도 정면 9칸 이상의 전각 건물과 아울러 그 동편에 담장을 둘러 동궁의 경역을 분명하게 설정하였음을 시사해주는 고고학적인 자료로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애장왕 5년(804)에 건립한 만수방을 1호 건물지와 연관시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궁에 동문(東門), 서문(西門), 북문(北門), 개의문(開義門)이 존재하였다. 우궁은 사방에 문이 있는 건물이었고, 각 문마다 교대로 문을 지키는 수위(守衛)들을 두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같은 우궁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1호 건물지를 우궁과 연결시켜 이해하기는 힘들고, 아마도 태자와 그의 가족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동궁에 임해전(臨海殿)이 있었는데, 그것은 월지 서편에 위치하였다.58 이처럼 만수방과 우궁, 임해전 등을 1호 건물지와 연결시키기 어렵다고 한다면, 일단 1호 건물지와 사정당과의 연관성을 한번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1호 건물지와 동궁 영역 전체를 발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1호 건물지를 사정당과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여기서는 단지 그 가능성만을 제시해두는 차원에서 머물고 싶으며, 차후에 발굴조사가 더 이루어진다면, 사정당과 1호 건물지와의 관계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2) 동궁의 성격 변화
경덕왕 11년(752) 동궁관을 설치하기 이전까지 동궁의 여러 잡다한 업무를 처리하던 포전, 급장전 및 월지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월지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의 여러 관청을 내성에서 관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동궁 역시 내성에서 관할하였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에서 경덕왕 11년 이전까지 동궁 역시 내성에서 관할한 양궁, 사량궁, 본피궁, 영창궁 등과 같은 성격의 이궁(離宮)으로 인식되었음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경덕왕 11년(752) 8월에 동궁관·동궁아를 설치하면서 내성이 아니라 동궁아가 동궁의 여러 건물과 관청을 관할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동궁은 태자의 공간임을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덕왕은 왜 하필이면 752년 무렵에 동궁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하였을까가 궁금하다.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는 삼모부인(三毛夫人)이었다. 그녀는 경덕왕 즉 위 이후에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출궁(出宮)당하였다. 경덕왕은 743년(경덕왕 2) 4월에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王妃)로 삼았는데, 이가 바로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만월부인은 한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경덕왕 17년(758) 7월 23일에 건운(乾運)을 낳았다. 경덕왕이 애타게 아들 낳기를 바랐음은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 표훈대덕(表訓大德)으로 하여금 상제(上帝)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겨우 아들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가 전하는 사실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경덕왕은 소망하던 아들을 얻자, 겨우 만 2살밖에 안 된 건운을 경덕왕 19년(760) 7월에 서둘러 태자로 책봉하였다. 경덕왕이 건운의 태자 책봉을 서두른 이유와 경덕왕 11년(752) 동궁의 위상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한 것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녔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