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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97137839
· 쪽수 : 340쪽
· 출판일 : 2021-08-15
책 소개
책속에서
오빠는 결혼을 계기로 일본 국적을 취득했는데, 이제 와 재일 교포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곤란하다며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살고 있었다. 또 준코 언니와 고타도 오빠가 한국인으로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오빠네 가족은 ‘문이애(文梨愛, 일본식 발음으로 분리에)’라는 본명을 쓰는 리에와 딱히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머니가 생전에 “네가 한국 이름을 쓰니까 입장이 좀 난처한가 봐. 오빠 상황도 이해해줘”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빠뿐만이 아니다. 아버지 자신도 ‘후미야마 도쿠노부[文山?允]’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아왔다.
집안에서는 한국 음식과 한국 방식을 고집하는 아버지였지만, 밖으로 나가면 일본인인 척했다. 숨기고 사는 편이 거북한 상황을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리에는 아버지의 그런 모순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 다닐 때도 사회인이 된 지금도 ‘분리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때 오빠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것에 반발이라도 하듯 ‘후미야마’라는 성을 ‘분’으로 되돌렸다. 그때 어머니는 반대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한국식 한자 읽기로 ‘문이애’라고 하지 않고, ‘분리에’라고 일본식으로 부르고 있다. 결국 자신도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처지다.
드디어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이제 자유롭게 우리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내 기분을 읽었는지 안철수는 “잘 들어라” 하며 한 명씩 눈을 맞추고 다시 한번 얘기했다.
“여기는 조선이 아니다. 일본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야. 오늘은 상대가 약해서 내가 어떻게 제압했지만 나는 늘 조선인이란 걸 감추고 있다. 불필요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서지. 아까 그 자식의 볼이 푹 꺼진 얼굴을 생각해봐. 자기 처지 때문에 누군가에게 분풀이라도 하고 싶어 하던 그 얼굴을.”
다리를 절면서 걸어가던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씁쓸했다.
“앞으로는 일본인들 틈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각자 이름을 부를 때도 일본식으로 바꿔 불러라. 박영옥이, 너는 박朴씨니까 기노시타[木下], 김태룡이, 너는 김金씨니까 가네다[金田], 끝으로 문덕윤, 너 문文씨니까 후미야마[文山]다. 알겠느냐?”
조선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었는데 도망쳐 왔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거기 그대로 있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제강점기 시절처럼 일본식 이름을 또다시 써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문덕윤文?允도 후미야마 도쿠노부[文山?允]도 어차피 가짜 이름인데, 일본식으로 부른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기가 좋아졌지만 수많은 동포의 생활은 여전히 힘겨웠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서도 남과 북, 양쪽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증오만 더해갔다. 날품팔이 현장에서도 동기들끼리 남북으로 나뉘어 말싸움을 하다가 폭행으로까지 번진 것을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에서는 군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의용군으로 참가한 도요타 형님도 전사했다. 우리가 편지를 부탁한 안철수는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우리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도, 가족들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공화조약을 거쳐 GHQ 점령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것을 계기로 동인은 제일호텔을 그만두고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와세다대학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동인에게 자극을 받아 호세이대학 야간학부 시험을 치르고 간신히 입학했다. 진하는 공부는 질색이라며 대학에는 가지 않았지만, 신바시 여관 주인이 새롭게 시작한 파친코 가게 일을 돕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