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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연론

양명학연론

정인보 (지은이), 한경애, 이재황
살림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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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연론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양명학연론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유교철학/주역 > 양명학
· ISBN : 9788952243089
· 쪽수 : 476쪽
· 출판일 : 2021-07-23

책 소개

조선 양명학파인 석학 정인보의 양명학 입문서를 교주본을 만들고 그 교주본을 바탕으로 우리말 문장을 사용, 번역한 현대의 고전서다.

목차

책머리에
1. 이 글을 쓰는 연유
2. 양명학이란 무엇인가
3. 왕양명의 생애
4. 「대학문」과 「발본색원론」
5. 양명학의 계승자들
6. 조선의 양명학파
7. 글을 마치며
[부록] 양명학연론 교주(校注)
참고 자료 『양명학연론』 및 그 재출간본들의 오류 연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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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정인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鐘峴, 현 종로성당 부근)에서 정은조(鄭誾朝)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열다섯 살이 되었던 1907년 위당은 충북 진천으로 이사했다. 위당 집안은 한국 양명학을 이어 왔던 몇 가운데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위당 자신은 열세 살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문하로 들어갔던바, 난곡은 당대 한국 양명학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난곡이 별세했던 1939년까지 남다른 사승 관계를 지켜 나갔으니, 위당 사상의 기본좌표는 양명학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열일곱 살 되던 1909년 위당은 단발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위당은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로 건너가서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原堡)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때 삼원보에는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주동이 되어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한 신흥 강습소가 세워졌는데, 위당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정리해서 여기에 군자금으로 건넸다. 1913년에는 상해로 건너가서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인 성씨가 산고(産苦)로 별세한 까닭에 위당은 상해에 머무른 지 7개월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위당은 검은 옷차림으로 일관했던바, 여기에는 부인의 죽음과 더불어 나라 잃은 상황까지 아울러 곡한다는 의미가 겹쳐 있었다. 1922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부임한 뒤에도 그의 상복 차림은 여전히 이어졌다.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 유릉지문(裕陵誌文)을 찬술했으며,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도 국학과 동양학을 강의했다. 위당의 이력에서 ≪시대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 활동도 빼놓기가 곤란하다. 빼어난 논설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최남선,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천재로 이름을 날렸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저술인 ≪조선 고전 해제≫라든가 ≪양명학 연론≫, ≪오천 년간 조선의 얼≫ 등을 남긴 것도 이 시기다. 1931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경매물로 나오자, 이를 민족의 수치로 여겨 충무공의 유적을 보존하는 한편 현충사를 조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으며, 1935년에는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함으로써 실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38년 일제가 조선어 강좌를 폐지하고, 조선학(국학)을 탄압하자 위당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고, 자신을 향한 일제의 회유와 압박이 거세지자 경기도 양주군으로 낙향했다가 1943년에는 전라북도 익산의 산속으로 거주지를 옮겨 은둔에 들어갔다. 해방을 맞이하자 국학대학 설립에 나섰고, 1947년 국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얼이 올곧게 세워져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판단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1년여간 감찰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 그의 날카로운 사정(司正) 활동에 의해 1949년 2월 조봉암 농림장관이 물러나게 되었고, 6월에는 임영신 상공장관이 경질되었다. 임영신 장관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게 되자 위당은 감찰 위원장 자리를 사임했다. 사임 후 국학 연구에 매진했던 위당은 1950년 7월 31일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에게 피랍(被拉)당했고, 납북 중 58세를 일기로 10월 24일 병사했다. 위당의 시신은 현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199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당이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바는 “내 뜻을 굽히지 않고 내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不降其志 不辱其身)”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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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황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공부하고 한국방송(KBS), 내외경제(현 헤럴드경제), 중앙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역사와 언어, 문자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한자의 재발견》, 《기발한 한자사전》, 《가장 빨리 외워지는 한자책》 등을 썼으며, 조선왕조실록을 재편집하고 우리말로 옮긴 《태조·정종본기》, 《태종본기》(전3권)를 비롯해 정인보의 《양명학연론》 교주본을 냈다. 《실크로드 세계사》로 제58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으며, 그밖에 《바다의 황제》, 《신의 기록》, 《로마 황제는 어떻게 살았는가》, 《아시아 500년 해양사》, 《기후변화 세계사》, 《지중해 세계사》 등의 영문서와 《맹자》, 《순자》 등 동양 고전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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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애 ()    정보 더보기
성균관대 대학원 미술학과(동양미술사, 석사)와 같은 대학원 유학과(동양미학, 박사)를 졸업했다. 장안대ㆍ성균관대 겸임교수, 서예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지내고 현재 신안산대 겸임교수로 인천대ㆍ단국대 등에서도 강의하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인 「조선후기 예술론의 심학미학적 연구」를 쓰면서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양명학 입문서인 『양명학연론』을 현대어로 다듬었다. 이 책과의 인연을 계기로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山問答)』(번역 제목 『우물 안 학문을 버려라』)과 『대학(大學)ㆍ중용(中庸)』(번역 제목 『학문은 왜 하는가』)을 번역했으며, 「조선 후기 성리학의 심학화 경향과 예술적 지향」 등 조선 후기 예술에 끼친 양명학의 영향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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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러니 시대가 지나고 사회 분위기가 흐트러짐에 따라 그 학문은 ‘빈껍데기 학문’밖에 남지 않았고, 그 행동은 ‘거짓된 행동’뿐이었다. ‘참마음’의 입장에서 보면 그 학문은 빈껍데기이니 개인적인 계산으로 보아 꽉 찬 것이라는 얘기일 뿐이고, ‘참학문’의 입장에서 보면 그 행동은 거짓된 것이니 위선적인 습속으로 보아 꽉 찬 것이라는 얘기일 뿐이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조선 사람들의 참마음과 참행동은 학문 영역 이외에 구차스럽게 간간이 남아 있었을 뿐이며, 온 세상에 가득 찬 것은 오직 거짓된 행동과 빈껍데기 학문뿐이었다.


사람이란 예나 이제나 자신과 자기 집안을 중심으로 삼는 이기심에 의해서 부림을 당하는 존재다. 참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해 제지하거나 절제하지 않은 채 오직 ‘남의 말’에만 의지한다면, 그 ‘남의 말’은 언제나 밖에서만 빙빙 맴도는 것이니 참마음을 만만히 보는 그 속에는 이기심이 쉽사리 들어서게 되고 그럴수록 참마음에 대한 경시는 더해지며, 참마음에 비추어 살피지 않은 남의 말이기 때문에 어느덧 이기심의 이용 대상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옛사람들의 책을 보면, ‘우리 대명(我大明)’이라고 한 것이 있다. 허어, 대명이 우리 대명이란 말인가.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군대를 섬멸했다고 상국(上國)을 범한 죄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어, 그대로 두 번 절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인가. 어린애는 고사하고 바보천치에게 물어봐도 나와 남, 내 나라와 적을 구별하지 못할 리 없건만, 학문이 본심의 ‘애틋함’에서 떠났으니 본심 아닌 말, 본심 아닌 일을 해도 일시적으로 울리는 ‘본심 아닌 헛소리’를 추종하고 부르짖는 것을 도리어 빛나는 일로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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