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88961963800
· 쪽수 : 148쪽
책 소개
목차
커다란 아치
색채의 언덕
철학자의 고원
늑대의 점프
뽕나무 길
그림들의 그림
차가운 들판
팽이의 언덕
커다란 숲
해설
리뷰
책속에서
최근에 나는 운터스베르크1의 눈 덮인 정상에 서 있었다. 내 머리 바로 위, 거의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공중에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 속을 활공하고 있었다. 까마귀의 몸통으로 당겨진 발톱의 노란색은, 새의 이상적인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햇살을 받아 빛으로 일렁이는 날개는 금색이 섞인 갈색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푸른색. 그 세 가지는 드넓고 편평한 공중에 널찍한 색채의 띠를 만들며 흘러갔고, 그래서 순간 나는 허공에 휘날리는 세 가지 색의 깃발을 본 듯했다. 그것은 주장이 없는 깃발, 오직 색채만의 사물이었다.
나는 화가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감사조차 저버리고 있었다. 부속물이라고 오해하기는 했지만 간혹 가다 최소한 시력검사판 역할이라도 해주었고, 되풀이되는 생명과 환상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 적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색상과 모양 자체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항상 그림으로 그려진 어떤 특별한 대상 자체였다. 대상이 없는 색채와 형태는 너무 무의미했고, 익숙한 일상의 자리에 있는 대상은 너무 흔했다. 여기서 ‘특별한 대상’은 딱 맞는 말은 아니다. 원래는 평범한 물체인데, 이를 화가가 특별한 모습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내가 이것을 비로소 ‘마술적’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무지를 궁핍으로 느낀다. 거기에서부터 특별한 목적이 없는 지적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호응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관념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뭔가 이해할 만한 계기가 하나 주어지면, 그것으로부터 ‘정신의 단초’가 싹튼다. 그렇지 않다면 늘 막연한 갈망 차원에서 그치고 말았던 탐구가 그런 계기를 만남으로써 진지한 결과를 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