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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아메리카사 > 미국/캐나다사
· ISBN : 9788968490828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14-01-27
책 소개
목차
1부 아메리카 원주민과 뉴잉글랜드 청교도
1장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
1.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복음화 / 18
2.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의 논쟁 / 33
3. 바야돌리드 논쟁의 유산 / 38
2장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의 만남
1. 유럽인 도착 이전의 북아메리카 / 47
2. 유럽인과 원주민의 초기 관계 / 51
3. 청교도와 원주민의 문화 충돌 / 56
4. 식민지인과 원주민의 갈등 / 65
5. 미국 정부의 원주민 정책 / 69
3장 원주민의 포로가 된 백인 여성
1. 뉴잉글랜드 영국인의 원주민 인식 / 82
2. 원주민의 포로가 된 청교도 여성 / 86
3. 종교, 성, 인종의 정치학 / 95
4장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가족문화와 신앙
1. 부부생활 / 108
2. 부모와 자녀의 관계 / 112
3. 가정생활과 공동체 문화 / 121
2부 버지니아의 반란과 농장주들
5장 1676년에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
1. 정치개혁인가, 원주민 약탈인가? / 130
2. 17세기 후반 버지니아 식민사회 / 141
3. 베이컨 반란의 발단과 전개 / 146
4. 베이컨 반란의 성격과 의의 / 160
6장 버지니아 농장 사회의 삶과 가치관
1. 농장주의 지위와 역할 / 166
2. 농장주의 가족 / 171
3. 농장주의 가치관 / 177
7장 버지니아 농장주의 일상생활
1. 농장주는 누구인가? / 185
2. 농장주의 하루 일과 / 191
3. 농장주의 가족생활 / 197
3부 ‘특별한’ 지역, 미국 남부
8장 미국 역사에서 ‘남부’란 무엇인가
1. 남부와 북부의 차이 / 216
2. 남부 신화의 허구 / 225
9장 선진 북부, 후진 남부?
1. 농장 신화(plantation myth): 농장주 귀족주의 / 237
2. 남부 경제 성장론 / 241
3. 남부 중간계급론 / 245
10장 신화로서의 남부
1. ‘남부’의 등장 / 257
2. 남부 이미지 분석 / 268
주석 / 279
찾아보기 / 341
저자소개
책속에서
[머리말]
감추어지고 소외된 미국 역사의 낯선 모습들
미국은 식민지인이 영국으로부터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선언한 1776년을 그 위대한 역사의 기원으로 삼는다. 따라서 그 이전에 200여 년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펼쳐진 유럽 식민지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 간의 혼합된 삶의 역사는 종종 소략하게 다루어진다. 더구나 베링해협을 건너온 원주민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궈온 거의 2만년의 역사(prehistory)는 오랫동안 미국 역사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 1607년에 영국 식민지인이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Jamestown)을 건립하며 시작된 미국 식민지 시대의 역사 그리고 그 시기 인종간의 만남과 교류의 역사는 미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낯선 역사’로 남아 있다.
또한 미국 역사는 다분히 ‘북부’ 중심의 역사로 기록된다. 노예제라는 ‘독특한’ 제도가 미국 건국 이후 북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후에도 남부에서는 남북전쟁까지 지속되었고, 그 이후 남부는 미국 안의 ‘주변’ 혹은 마치 별종의 지역이자 ‘타자’로 여겨지며 미국 주류 역사 발전에서 소외되었다. 남북 전쟁에서 자유노동의 기치를 내건 북부가 노예제 사회인 남부에 맞서 승리함으로써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은 곧 ‘북부’와 동일시되었다. 1960년대의 민권운동 이후 남부는 경제적으로도 비약을 거듭하며 부상했고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미국 내의 예외적인 지역 그리고 ‘특별한’ 역사를 지닌 지역이라는 이미지는 아직도 강하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미국 역사의 낯설고 구석진 면을 다루고 있다. 미국 역사서의 타이틀 페이지를 장식했던 미국혁명, 미국헌법, 노예제도, 남북전쟁, 산업혁명, 서부개척, 재건, 뉴딜 등 정치ㆍ경제ㆍ사회 발전의 주된 흐름이 아니라 미국 교과서에도 간헐적으로밖에 등장하지 못하는 이면의 역사들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소위 정통 표준 역사의 흐름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다소 초점에서 벗어난 주제와 시각들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심’의 역사와 ‘주변’의 역사의 경계가 모호해진 새로운 역사관에서 보면 이 글에서 다루는 미국사의 낯선 풍경들이 미국 역사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기보다 오히려 그 감추어진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의 구성은 크게 3부로 나누어진다. 식민지 시대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의 만남을 비롯하여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삶을 다룬 1부, 베이컨 반란과 버지니아 농장주의 삶을 다룬 2부, 그리고 미국 남부에 대한 신화와 이미지를 다룬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지난 이십여 년간 발표한 여러 논문들을 10편으로 정리하여 묶은 것이다.
1부는 유럽인의 원주민 인식을 비롯하여 영국에서 건너 와 종교와 문화 이식을 시도한 청교도, 원주민의 포로가 된 백인여성의 생존경험, 그리고 뉴잉글랜드 식민지인의 생활 모습을 다룬 글들로 구성되었다. 1장은 아메리카 대륙에 백인 최초의 식민지를 세운 스페인의 원주민 인식과 태도를 검토한 글이다.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후에 그 원주민을 어떻게 보고 상대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세풀베다(Juan Gin?s de Sep?lveda)와 라스 카사스(Bartolom? de Las Casas)의 유명한 논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2장은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의 만남의 역사를 기술했다. 원주민이 지역별로 다양하게 발전시켜 온 역사와 문화의 차이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특히 영국 청교도가 정착한 뉴잉글랜드에서 지역 원주민과의 협력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주목했다. 청교도 선교사들이 벌인 개종활동의 성과와 한계 그리고 그 의의도 정리했다. 3장은 뉴잉글랜드 청교도 여성인 메리 로랜슨(Mary Rowlandson)이 원주민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온 후 발간한 포로담을 소재로 삼아 식민지 백인의 포로 경험을 살펴보았다. 4장은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가족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가치관을 기술했다. 매사추세츠의 지도자였던 새뮤얼 수얼(Samuel Sewall) 목사가 남긴 일기를 주요 사료로 삼아, 낯선 땅에 도착한 청교도가 신앙과 도덕 윤리를 어떻게 실현하며 적응했는가에 주목했다. 이 네 편의 글은 북아메리카에서 전개된 백인과 원주민의 관계, 특히 뉴잉글랜드 청교도와 원주민의 다양한 만남의 양상과 발전 단계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청교도 정착민의 삶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부는 미국 독립혁명에 100년 앞서 일어난 정치 개혁운동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베이컨 반란’을 살펴보고, 18세기 미국 중심 식민지였던 버지니아 식민사회와 그 주역인 농장주의 삶과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고찰한 글들로 구성되었다. 5장은 1676년에 일어난 버지니아 식민지인의 반란인 베이컨 반란을 다루었다. 과연 베이컨(Nathaniel Bacon) 일파의 반란이 최초의 식민지 정치개혁 시도이자 독립을 도모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원주민 약탈 야욕에서 비롯된 식민지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었는지 살펴보았다. 6장은 영국 식민지 중에서 가장 부유했던 버지니아에서 대농장주로 살며 정치ㆍ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그들의 삶의 가치와 공동체 윤리를 살펴보았다. 7장은 버지니아 농장주로서 자세한 일기를 남긴 윌리엄 버드 II세(William Byrd II)와 랜던 카터(Landon Carter)를 중심으로 그들의 일상생활을 재구성해 본 글이다. 특히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그리고 하인ㆍ노예와의 관계 등 농장주의 가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아보고자 했다. 이 세 편의 글은 18세기 버지니아 식민지의 역사와 그 농장주의 일상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3부는 미국 역사에서 과연 ‘남부’는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남부에 대한 여러 이미지와 신화들을 분석하고, 특히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사회를 정체된 열등 사회로 정의해 온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를 검토하는 글들로 구성되었다. 8장은 미국 역사에서 ‘남부’가 어떻게 정의되고 인식되어 왔는가를 살핀 글이다. 미국 국가 건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버지니아를 비롯하여 남부 지역이 농장 작물 경작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다가 남북전쟁 이후 침체를 거듭하며 미국 역사의 주역에서 소외되었고 다시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이미지로 변모해 온 과정을 살펴보았다. 9장은 남북 전쟁 이전 舊남부의 사회와 경제에 관한 글로서, 남부가 당시 세계경제의 선진지역으로서 경제 생산과 소득에서 북부와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남부가 대농장주가 아닌 다수의 소농장주와 요맨으로 구성된 사회였다는 해석도 소개한다. 10장은 미국 ‘남부’에 대한 여러 가지 신화적 이미지들을 검토하여 정치적 보수성, 경제적 후진성으로 대변되는 남부 인식의 허구성을 살폈다. 현재에서 소급하여 이루어진 남부 역사 해석이 실제의 반영인지 신화인지를 구별할 필요를 제안한다. 이 세 편의 글에서 주요 논지가 다소 반복되는 것에 대한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의 ‘낯선’ 역사가 미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나 학생들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일반 독자들도 미국 역사에 흥미와 호기심을 갖고 색다른 시각에서 미국 역사를 바라보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고대한다.
2014. 1.
이영효
1부 아메리카 원주민과 뉴잉글랜드 청교도
1장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
15세기 말에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이후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책은 크리스트교 전도와 함께 그 땅과 원주민을 지배하는 식민화를 추구했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스페인의 가톨릭 공동왕에게 새로 발견한 땅의 지배권을 주었으며 원주민을 크리스트교로 전도할 사명도 함께 부여했다. 교황의 칙서는 스페인 왕정의 확산을 토대로 교회의 권위와 복음을 전파하려는 전략의 하나였다. 스페인 왕정이 선교 사업을 지휘함으로써 아메리카 복음화는 그 식민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시작되었다.
그런데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 정복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고, 정복자들의 재원과 군사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세력과의 오랜 전투를 통해 국토를 회복한 ‘전투 귀족’들로서 그 여세를 몰아 해외로 진출한 셈이다. 이들 정복자들은 신세계에서 거의 무한대의 권한을 누렸다. 정복자들은 군사 책임자인 총사령관이면서 동시에 정복한 땅의 사법적, 행정적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아메리카 토지와 원주민을 전리품으로 나누어 갖고 원주민을 노예로 팔거나 소유했다.
하지만 1511년에 에스파뇰라에서 전도 활동을 하던 도미니크 수도회의 몬테시노스 신부(Fray Antonio de Montesinos)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잔혹한 행위를 고발한 이후 아메리카와 본국에서 정복의 도덕성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신들은 무슨 권리로 이 무고한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가?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자기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그들을 잔혹하게 죽이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어떻게 당신들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며 그들을 억압할 수 있는가?… 그들은 사람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이성적인 영혼이 없는가? 당신은 스스로를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는가?”
스페인의 학자와 성직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 지배 및 그 방법의 정당성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스페인의 인문학자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는 원주민이 타고난 노예이며 그들을 정복하고 강제로 개종시키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열등한 존재이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고, 인신공희와 식인이라는 죄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그들과의 전쟁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스카사스(Bartolom? de Las Casas) 신부가 반박의 선봉에 나섰다.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미개인은 아니며, 아메리카 원주민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이성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되고, 개종은 평화적인 설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잔혹한 원주민 학살을 고발하는 글을 발표하여 소위 ‘검은 전설(Black Legend)’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본성과 능력에 대한 논란은 1550년 바야돌리드(Valladolid) 논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논쟁을 전후하여 스페인에서 벌어진 거의 1세기 간의 논란은 라스카사스와 세풀베다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초래했다. 라스카사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대부이자 인권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은 반면, 세풀베다는 아메리카 정복을 합리화하고 더 나아가 근대 인종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토도로프(Tzvetan Todorov)는 1492년을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종교와 인종의 동질성이 성립된 해이며 동시에 유럽인종주의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타자’에 대해 승리를 거둔 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콜럼버스는 인종주의적 유럽문화의 포로였다.
이 글은 16세기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의 초기 인식과 태도를 바야돌리드 논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논쟁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살피기 위해 스페인 정복자들의 원주민 인식을 비롯하여 스페인 왕실의 식민정책과 교회 성직자들의 복음화 활동을 살펴보겠다. 그리고 논쟁의 양대 대표자였던 세풀베다와 라스카사스의 주요 주장과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고찰한 후, 논쟁의 결과와 그 역사적 유산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과 복음화
(1) 정복자들의 원주민 인식
15세기 유럽인의 지식은 주로 성서나 그리스·로마의 철학, 역사, 문학책을 통해 얻는 것이었고, 그들의 지식 범위는 고대 지중해 세계나 근동지방, 그리고 유럽세계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당시 유럽인이 이질적인 타문화와 외부인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매우 자연스럽고 보편적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스페인인의 초기 인식도 유럽의 문화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정의한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용기, 관용, 정직, 신뢰를 지닌 황금 낙원의 ‘고상한 야만인(noble savage)’이거나 혹은 구원받아야 할 어린아이 같은 미개인인 ‘무시할만한 야만인(ignoble savage)’이었다. 심지어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햄족의 후예이거나 ‘악마의 자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마치 지상의 낙원에 살고 있는 ‘행복한 미개인’을 발견한 것처럼 기록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탄탄한 근육,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 검지도 희지도 않은 피부색 등 원주민의 육체에 감탄했으며, 비옥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낙원계곡에 비유하고, 원주민을 온화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로 묘사했다. 이는 자연 속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해 유럽인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이상과 꿈을 투영한 것이었다. 유럽인은 인간이 선하고 완벽하고 행복했던 풍요와 자족의 황금시대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시대의 인간은 태초의 모성애적 자연 속에서 자유와 순수함을 상징하는 존재 즉 영적인 순결과 지복을 가진 존재였다. 이에 이탈리아의 인류학자 코치아라(G. Cocchiara)는 “미개인은 발견되기 전에 이미 발명되었다.”고 하면서, 역사 이전의 낙원에 관한 신화를 바탕으로 ‘발명된 미개인’이 16세기 이후 유럽의 감수성 속에서 번성했음을 지적했다.
물론 콜럼버스의 묘사는 스페인 가톨릭 공동왕의 재정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새로운 땅의 풍요로움과 주민들의 선량함을 부각시키거나 과장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원주민에 대한 콜럼버스의 인상기는 이후 다른 스페인인들의 기록에서도 반복되었고, 특히 라스카사스의 원주민 묘사와 가장 유사한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가톨릭 공동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온순한 원주민’의 이미지를 부각하고 그들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새로운 땅을 스페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강변했다.
“이 곳 사람들은 종교가 없고 우상도 숭배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매우 온순하고… 무기도 없으며 겁이 많습니다. 기도문을 말해 주면 금세 따라 외우고 십자가도 긋습니다.… 이들을 쉽게 크리스트교도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국왕 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려 그들을 크리스트교도로 만드셔야 합니다. 이 일을 시작하면 단기간에 수많은 사람을 우리의 성스러운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또 큰 영토와 부와 그 땅의 모든 사람을 스페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곳에 막대한 양의 황금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곳은 땅도 비옥하고, 춥지도 덥지도 않고 온난합니다.… 두 국왕폐하께서는 가톨릭교도가 아닌 외국인은 누구든 이 곳에 발을 들여놓거나 거래하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선량하고 온순한 사람들은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반면 코르테스(Hern?n Cort?s)가 만난 원주민은 크리스트교를 순순히 받아들일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사회도 전혀 단순하거나 소박하지 않았다. 코르테스가 묘사한 아스텍 사회와 그 문명은 유럽에 비견할 만큼 잘 발달된 효율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519년에 카를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코르테스는 아스텍 제국의 수도인 테노치티틀란과 그들이 건설한 도시 문명을 유럽의 도시와 비교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이 도시는 너무도 놀랍고 대단하다.… 그라나다보다 훨씬 크고 도시의 방벽도 훨씬 잘 되어 있다. 집들은 아름답고 도시의 인구는 함락 전의 그라나다 인구보다 훨씬 더 많다. 식량과 음식 또한 훨씬 뛰어나다. 이 도시에는 매일 3만 명 이상이 몰려드는 시장이 있으며… 금, 은, 보석들도 즐비하다. 보석 상점은 세계 어느 시장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이용원, 공중목욕탕도 있다. 효율적인 치안 체제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치안 관리들은 사리 분별과 이성을 갖고 행동한다.… 사람들을 특별히 제약하는 법률이 없다는 점에서 베니스, 제노바, 피사의 공화국들과 아주 흡사하다.… 이 도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스페인 사람들과 아주 유사하다. 이들은 스페인 사람처럼 질서와 조화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이 신을 모르고 문명 세계와의 교류가 차단된 미개한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나라 전역에서 유지되는 질서와 나무랄 데 없는 통치에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아스텍 정복에 동행했던 디아스(Bernal D?az)도 아스텍인이 에스파뇰라와 인근 카리브 연안 섬들의 원주민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거대한 도시와 다리 및 기념물, 전사들의 용맹, 웅장한 의식, 카누들이 즐비한 호수, 그리고 지도자의 리더십 등을 찬탄했다.
하지만 이처럼 질서 정연한 아스텍 도시의 모습은 벌거벗고 우상을 숭배하며 인육을 먹는 원주민의 이미지에 곧 희석되었다. 아스텍인의 인신공양은 그들이 이성적이고 문명화된 종족이 아닌 미개인이라는 주장에 불을 붙였다. 콜럼버스는 직접 식인종을 만나지 못했지만 식인풍습을 가진 원주민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기록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푸줏간에 걸려 있는 돼지고기처럼 소금 친 인육 조각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원주민을 ‘법도 사유재산도 신앙도 없이’ 사는 미개한 종족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 탐험에 나섰던 카베사 데 바카(Alvar Nunez Cabeza De Vaca)는 원주민의 인신공희를 두려워하던 동료 크리스트교인들이 오히려 식인을 범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쨌든 식인 풍습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본성과 스페인 정복의 정당성에 대한 이후 논란에서 중요한 근거로 활용된다.
“동료를 잃은 우리의 재앙을 보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이성도 없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찌 보면 야수와도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우리의 처지를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집으로 가면 우리를 산채로 제물로 바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대부분 아메리카 원주민을 따라가겠다고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집에서 추위를 참지 못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해변가 움막에 있던 크리스트교인 다섯 명은 극한 상황에서 비극적인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들은 동료를 잡아먹었고 결국 마지막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더 이상 자기를 잡아먹을 사람이 남지 않을 때까지 서로 싸웠던 것이다.”
콜럼버스와 코르테스 등이 만난 원주민이 달랐고 그들의 원주민 인식에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 아메리카를 부의 획득의 장소로 그리고 원주민을 개종의 대상으로 보았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가 경제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으며, 코르테스 역시 자신이 정복한 땅이 스페인 영토의 일부라고 믿었고 또 원주민을 크리스트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당시 정복자들이 이해하고 있던 ‘개종’의 개념은 원주민이 ‘가톨릭 공동왕의 다른 신민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트교도로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복자들의 실제 목표는 황금을 구하고 봉건 영주의 지위를 얻는 것이었지만 명분은 항상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노골적으로 “원주민을 개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황금을 빼앗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구와 그것을 종교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태도는 해외팽창을 십자군 운동의 연속이자 ‘용감한 크리스트교도들의 모험’으로 여겼던 당시 포르투갈인의 태도와 유사한 것이었다.
(2) 교회와 성직자들의 활동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를 부의 획득 장소로만 보지 않은 것은 새로 발견한 땅과 주민에 대한 지배권을 교황에게서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1455년에 교황 니콜라스 5세는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에게 그가 정복하는 땅과 항구, 섬과 바다를 지배할 권한을 부여했고, 1493년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새로 발견한 땅들을 스페인과 포르투갈에게 나누어주는 콘스탄틴 증여(Donation of Constantine)를 선언했다. 이 칙서는 교황이 ‘대리 그리스도’로서 정신적 권위를 행사한 것으로, 사제와 수도사들이 아메리카 정복자들을 동반하게 된 근거였다. 즉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해외 팽창은 단순히 무역 이익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식민화의 목적이 분명했고 그것은 복음화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스페인 성직자들의 개혁 열망은 더욱 커져 갔고, 그것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개종하려는 수도사들의 의지로 이어졌다. 성직자들 중에는 원주민이 사악한 사람들이며 신앙을 받아들일 판단능력이 없고 개종과 구원에 필요한 미덕도 갖추지 못했다고 본 사람도 있었지만, 도미니크회의 몬테시노스와 라스카사스 신부 등은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엔코미엔다(encomienda)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왕을 직접 만나 서인도 문제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고, 1515년에는 쿠바에 원주민 자치 마을을 세울 계획을 승인받았다. 그는, 원주민을 별도의 마을에 정착시켜 농경지와 목초지 뿐 아니라 소, 돼지, 양, 말 등 가축을 주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따르며 살게 하는 공동체 건립을 시도했다. 그리고 원주민이 식민지인을 위해 광산과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시간을 제한했다. 하지만 이 노력이 원주민 인구의 급감으로 실패하자, 라스카사스는 스페인 농민의 아메리카 이주와 정착을 장려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워 카를 5세의 허가를 받았다. 농민들의 배삯과 토지, 임금, 농기구, 가축, 흑인 노예 등을 이주 장려금으로 제공했지만 왕실 재정이 끊기면서 이 시도는 실패했다. 라스카사스가 1519년부터 1522년까지 베네수엘라에 원주민 공동체를 세우려 했던 계획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라스카사스는 카리브 해를 떠나 멕시코와 페루 등지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여전히 원주민 학대를 막고 그들을 노예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구상한 원주민 공동체에서 원주민은 스페인어와 크리스트교 교리 교육을 받아야 했고, 엔코미엔다 체제에서보다 경감되었다 해도 식민지인을 위한 노동에도 여전히 종사해야 했다. 또한 스페인 농민을 이주시키려는 그의 계획은 4천명의 흑인노예를 수입하는 계획과 병행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원주민 노예제를 흑인 노예제로 대체하려 했던 라스 카사스의 의도를 보여주는데, 그는 나중에 흑인 노예제를 용인했던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한편 아메리카 엔코멘데로(encomendero)들의 횡포와 원주민 착취에 대한 이야기가 본국에 계속 전달되면서 아메리카 정복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와 논란이 확산되었다. 이 때 스페인의 아메리카 지배권에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의 신학 주임교수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였다. 살라망카 대학과 바야돌리드 대학의 교회법 교수였던 루비오스(Palacios Rubios)나 양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파스(Matias de Paz) 등이 이노센트 4세 교황과 알렉산더 6세 교황의 칙서를 근거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권리를 옹호했던 것과 달리, 비토리아는 황제나 교황 모두 아메리카를 지배할 합법적 권한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원주민이 비이성적이지도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무능이나 식인 등 어떠한 이유로도 스페인인들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권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비토리아는 1538년 강연에서 아메리카 지배권에 대한 7개의 논리를 자연법에 입각하여 비판했다.
(1) 크리스트교 황제가 세계의 지배자이므로 원주민 지배자를 대신하여 사법권을 가진다는 주장은 틀렸다. 황제는 신의 법에 의해 통치권을 양도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2) 교황이 스페인 군주에게 통치권을 양허했다는 것도 맞지 않다. 교황은 세속 지배자가 아니고, 그의 권리는 영적 문제에 그것도 크리스트교 세계에만 국한된다. 원주민이 개종을 거부한다고 해도 전쟁의 근거가 될 수 없고 크리스트교로 개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3) 새 땅에 대한 ‘발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 땅의 진정한 소유주는 원주민이다. (4) 원주민의 불신앙을 문제 삼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킬 목적으로 개전하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다. 크리스트교를 몰랐던 사람에게는 불신앙의 죄가 없다. 신앙은 폭력을 통해 강제할 수 없다. (5) 원주민의 인신공희, 식인 등 자연에 반하는 죄를 들어 전쟁을 정당화할 수 없다. 교황이나 군주는 이들의 죄를 다스릴 권한이 없다. (6) 원주민이 스페인 군주를 받아들였다는 주장도 잘못되었다. 주권양도의 전제조건은 ‘자발적인 선택’이며 공포감이나 무지 상태에서의 양도는 잘못된 것이다. (7) 하느님에 의해 서인도제도가 스페인에게 양도되었다는 논리도 틀렸다. 구약성서 어디에도 하느님이 신세계를 양도했다는 전거를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비토리아의 생각은 소토(Domingo de Soto)를 비롯하여 신학자와 법학자들로 구성된 살라망카 학파(Salamanca School)의 견해를 대변한 것이었다. 비토리아는 세속권력과 교권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아메리카의 소유권과 지배권이 원주민과 그 통치자에게 있음을 밝혔다. 살라망카 학파의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법 대신에 자연법 및 자연권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존엄권을 비롯하여 생명권, 사유재산 소유권, 사상의 자유, 그리고 부당한 정부에 복종하지 않을 저항권을 옹호했다. “모든 인간은 같은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이들의 주장은, 당시 유럽에서 퍼져가던 왕권신수설 등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