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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평전

안창호 평전

김구, 이광수, 안병욱, 안창호 (지은이)
청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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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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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안창호 평전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운동 > 사회운동가/혁명가
· ISBN : 9788995545904
· 쪽수 : 370쪽
· 출판일 : 2005-07-10

책 소개

60평생 민족독립을 위해 살았던 혁명가이자, 학생과 청년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던 교육자이며, 웅변가, 사상가였던 도산 안창호의 말과 글, 삶의 모습들을 담은 책.

목차

추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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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창호 일화

약속을 꼭 지켜라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질서와 정돈
그 돈이 어떤 돈이길래
저는 죄인이올시다
손이 떨려서 시무(視務)할 수가 없소
단정한 태도로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나는 지금 7가지 병이 생겼다 하오
낙심마오
당신은 인물이오
깨끗이 된 손을 다시 더럽히지 말라
성내지 마시오
내가 거짓말할 사람같이 보입니까
몸과 마음을 깨끗이
그 정열을 조국에 바쳐라
사람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서로 마음이 괴로웠네


2. 안창호 일기

1920년 1월 16일 일기
1920년 1월 17일 일기
1920년 1월 30일 일기
1920년 1월 31일 일기
1920년 6월 12일 일기
1920년 7월 8일 일기
1920년 7월 9일 일기
1921년 2월 4일 일기
1921년 2월 15일 일기
1921년 2월 17일 일기
1921년 2월 18일 일기


3. 안창호 편지

1908년 11월 20일 서울에서 써 보낸 편지
1920년 5월 18일 상해에서 써 보낸 편지
1920년 8월 3일 홍콩에서 써 보낸 편지
1932년 1월 16일 상해에서 써 보낸 편지
1932년 5월 27일 체포된뒤 상해에서 써 보낸 편지
1933년 6월 1일 대전감옥에서 써 보낸 편지


4. 도산을 애도하는 글


5. 도산 안창호

투쟁생애편
소년시대- 쾌재정의 웅변
미주 유학시대- 교포의 조직과 훈련
신민회시대- 한말 풍운과 민족 운동
망명- 실국 전후의 극적 사안
미주 활동시대- 살아 있는 태극기와 애국가
상해시대- 임시정부에서 대독립당까지
피수순국(被囚殉國)시대- 민족정신의 수호자

국민훈련편
자아혁신
송태 산장
흥사단
동지애
이상촌 계획
상애(相愛)의 세계

안창호 연보
참고도서

저자소개

김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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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 현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매우 중요한 작가이면서,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이자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여, 일찍 부모를 여의고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유학을 통하여 근대사상과 문학에 눈뜨고 이를 한국적 사상 및 문학 전통에 접맥시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어나갔으며, 한국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붓을 놓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놀라운 창작적 삶을 이어간 작가였다. 그는 『무정』, 『재생』, 『흙』, 『유정』, 『사랑』 등으로 연결되는 본격 장편소설들을 통하여 한국 현대소설의 ‘제1형식’을 창출하였고,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 신문과 『조선문단』, 『동광』 등의 한글 잡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문필 활동을 펼침으로써 현대 ‘한국어 문학’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그는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단종애사』, 『이순신』, 『세조대왕』, 『원효대사』, 『사랑의 동명왕』 등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왕조에 이르는 시대적 사건과 인물을 소설화함으로써 민족적 위기의 일제강점기에 역사의 기억을 소설의 장에 옮겨 민족적 ‘자아’를 보존하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한국 현대소설의 성립을 증명한 『무정』의 작가요, 도산 안창호의 유정 세계의 꿈을 이어받은 사상가요, ‘2·8 유학생 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가담한 민족운동가요, 민족적 ‘저항’과 ‘대일협력’의 간극 사이에서 파란만장하고도 처절한 생애를 살아간, 험난한 시대의 산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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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호는 이당(怡堂). 1920년 6월 26일 평남 용강 태생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졸업하고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강의했으며, 《사상계》주간과 숭전대 교수를 지냈다. 국내에 읽을 만한 철학 교양서가 드물었던 시절, 수많은 저술과 대중 강연을 통해 동·서양 사상의 핵심을 설파, 방향 감각을 상실한 현대인과 현대 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 주고자 한 숱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우리 사회의 인간성 상실과 가치관 혼란을 지적했다. 1985년 인하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부터 1985년까지 숭실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도산아카데미연구원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숭실대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평생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전하는 데도 힘썼던 그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토대로 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동양적 세계’ 관련한 내용의 많은 집필을 했다. ‘철학의 대중적 전파’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강원 양구군에 한국 철학인으로는 처음 ‘안병욱 철학의 집’이 세워졌다. 2013년 10월 10일 향년 94세로 양구에 묻혔다. [저서] 「회고와 전망」(1954), 「자유의 아포리아」(1958), 「기계의 논리와 윤리」(1960),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립」(1963), 「사랑과 신념과 사명」(1965), 「현대의 삼강오륜」(1968), 「창조와 혼돈의 장」(1968)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서양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현대사상 강좌’라는 제목으로 『사상계』에 연재한 「휴머니즘」, 「생의 철학」, 「프래그머티즘」, 「허무주의」, 「실존주의」, 「현대적 세계관」 등을 묶어서 낸 것이 첫 저서 『현대사상』(1957)이다.『사색의 향연』(1962), 『철학노우트』(1963), 『행복의 미학』(1966),『인생은 예술처럼』(1968), 『진리의 샘터에서』(1970) 외 숱한 저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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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지은이)    정보 더보기
20세기 초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독립운동가. 청년 시절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했다. 귀국 후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진흥했다. 1913년 미국에서 흥사단을 재창설하고, 3·1운동 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세계를 무대로 해외 한인의 조직활동을 진작했으며 국내외 운동노선을 통합해 민족혁명을 이루고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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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도산은 상해(上海) 계실 때에 소년들을 무척 좋아하여, 소년단을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다. 어느날 한 소년이 소년단의 5월 행사에 돈이 필요하다고 도산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도산은 그때 몸에 돈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4월 26일에 돈을 갖다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도산은 그 어린 소년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그날 돈을 준비해 가지고 그 소년의 집을 찾아갔다.

그날은 바로 독립투사 김구(金九)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 백천 대장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킨 날이다.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을 하는 한국 애국지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여러 곳곳에 몰려 잠복을 하고 있었다. 도산은 그 소년에게 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날 그 소년의 집에 갔다가 그 집에 잠복한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서 한국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대전에서 3년 반의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이다.

도산은 어린 소년과의 약속도 틀림없이 지키었다. 그는 신의(信義)가 한없이 두터운 분이었다. 약속을 꼭 지키어라, 이것은 도산의 생활신조요, 행동원칙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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