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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세계사 일반
· ISBN : 9791186096567
· 쪽수 : 576쪽
· 출판일 : 2017-12-31
책 소개
목차
펴내는 글
들어가며 일본군국주의의 성격
제1절 압박 받는 나라에서 압박하는 나라로
제2절 제국주의 확립
제3절 전반적 위기
제4절 파국: 다시 압박당하는 국가로
제1편 만주사변
제1장 세계의 변모
제1절 중국혁명과 열강
제2절 세계공황과 국제정세의 변모
제2장 공황 속의 일본
제1절 금융공황과 산둥출병
제2절 이노우에(井上) 재정과 시데하라(幣原) 외교 9
제3장 만주사변
제1절 절박한 만몽문제
제2절 만주사변과 상하이사변
제3절 5·15사건
제4절 국제연맹 탈퇴와 탕구(塘沽)정전협정의 체결
제4장 비상시국
제1절 군수 인플레이션과 농업 공황
제2절 파시즘의 진전
제3절 비상체제와 언론탄압
제4절 만주 경영과 화베이 침략
제2편 중일전쟁
제1장 파시즘과 인민전선
제1절 베르사유체제의 붕괴
제2절 반파시즘 인민전선
제2장 2·26사건과 준전시체제
제1절 2·26사건
제2절 준전시체제화와 일독방공협정
제3절 인민전선운동의 전개
제4절 하야시(林) 내각에서 고노에(近衛) 내각으로
제3장 중일전쟁의 발단
제1절 전쟁 전야의 중국
제2절 중일전쟁의 발발
제3절 전쟁의 전개와 그 영향
제4장 중일전의 장기화와 국내정세
제1절 장기전 속의 중국
제2절 전시경제와 독점자본
제3절 문화탄압과 저항
제5장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일본
제1절 일독군사동맹 문제와 국제대립의 격화
제2절 뮌헨협정
제3절 아베(安部)·요나이(米?) 내각의 동요
마치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일본의 자본주의는 대공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감행한 만주사변을 통해 전시경제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일단 재기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심각한 모순과 위기를 내포한 것이었다.
‘재정의 베테랑’으로 불리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대장성 대신으로 임명한 이누카이 내각의 초기 경제시책은 금 수출 재금지였는데, 이것은 국제자본시장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엔화를 평가절하(환율인상)함으로써 덤핑 수출을 늘려 결국 미국·영국과의 통상 경쟁에 도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전쟁과 시국 수습을 위한 경비를 공채로 메워나가는 재정 인플레이션을 초래함으로써 침략을 위한 경제체제 굳히기에 들어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선 다카하시 대장대신은 이전 내각의 긴축재정, 채권발행 자제 방침, 증세계획 등을 폐기했다. 1932년도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5억 엔이 늘었고, 공채 발행액은 이미 1932년도에 10억 엔에 달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은 직접군사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적자공채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다카하시 대장대신은 일본은행의 국채매수1와 공채시장 조작이라는 방법을 동원했다. 이것은 산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거대은행에 집중된 막대한 잉여자본에 국채라는 유리한 투자대상을 제공하고, 한편으로는 전쟁비용 조달이라는 군 부의 요구와 투자난에 고심하는 금융자본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한 이것은 직접적인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도자들은 이 방법을 ‘일석삼조’의 ‘묘안’이라고 자화자찬했으나, 결국 일본의 재정적 곤란을 해결할 수 없었고 인플레이션도 막지 못했다.
류타오거우(柳條溝)에서 발생한 한 발의 폭음이 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된 것처럼 8년 동안에 걸친 중일전쟁의 발화점도 어처구니없이 용왕묘(龍王廟)에서 들려온 한 발의 총성이었다.
1937년 7월 7일 밤 베이징 서남부 펑타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중국군이 주둔하던 루거우차오 바로 옆의 용왕묘 부근에서 시위하듯 야간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긴장된 화베이 지역의 정세 속에서 야간에, 그것도 무장을 통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사건 발발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엄명을 내려 성문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으나 일본군은 다시 도발적인 군사훈련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연습 종료 직전에 일본군 머리 위로 한 발의 작은 총탄이 날아갔다고 연습부대가 주장하고 나섰다. 총성을 듣고 부대장이 곧바로 부하들을 점호했는데 1명이 행방불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군이 완핑현성(宛平縣城)을 침략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행방불명되었다는 병사는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대오를 이탈했을 뿐이었다. 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연대장 모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대좌는 이 사건을 구실 삼아 루거우차오의 중국군에게 무조건 즉각적으로 완핑현성을 비우라고 요구했고, 회답이 없자 곧바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다음날 루거우차오, 용왕묘 등을 점령하고 베이징에서 톈진, 바오딩(保定) 방면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인 융딩허(永定河) 좌안 일대를 제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