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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68177446
· 쪽수 : 292쪽
· 출판일 : 2019-04-08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마지막 인사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해후. 시절 인연 따라 나에게로 왔던 고맙고도 귀한 인연을 떠나보내는 길목에서 그분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한 것은 영면에 드시기 나흘 전이었다. 알음알음으로 회복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법정 스님이 위독하다는 사실을 접하고서 다음 날 아침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왠지 이 주간을 넘기지 못하실 것만 같은 막연히 엄습한 확신 때문이다.
그날 밤이 깊도록 편지를 썼다. 스님께 보내는 마지막 서신이 될, 지우고 또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간 편지! 한 줄 글에 백 가지 상념이 어리었던 원고지 한 장의 그 편지처럼 쓰기 어려운 글이 다시 없었다. 외부인 면회는 일절 사절이라니 뵙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한다면 편지만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었다.
벨라뎃다가 스님을 뵈러 왔었다고…. 이 한마디 말은 꼭 전하고 싶은 나의 마지막 인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 통의 편지가 오갔던 인연치고는 실로 오랜만에 다시 쓰는 힘겨운 편지였다. 병원으로 향하던 날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기억 저쪽의 편린들이 봄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버스를 타고 내를 건너 앳된 수도자의 신분으로 마주한 어느 젊었던 날의 해 질 무렵, 산바람만이 넘나드는 적요한 불일암 뜨락에는 우주의 한숨처럼 백목련 꽃잎들이 하나둘 지고 있었다. 언젠가 스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라고. 아마도 환속을 앞두고 마지막 속내를 털어낸 무렵이었을 것이다.
“수녀로서 성공할 자신이 제겐 없습니다.”
물리적인 성공을 뜻한 것은 아니다. 완덕完德에 이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종신서원 5년 차의 수녀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뜻밖의 고백에 너무도 기막히고 어이가 없는지 스님은 어떻게든 단단히 유감에 빠져든 이 여리고 약해빠진 자매를 잡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한 듯했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말을 위해서, 자신은 사람 보는 안목이 아주 정확한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였다.
“수도복을 입었다고 다 수녀가 아니고, 승복을 걸쳤다고 다 중이 아니다. 그런데 벨라뎃다 수녀님은 내가 겪어본 사람 중에 드물게 훌륭한 수도자이지. 내 눈은 틀린 적이 없어. 이 말을 믿어야만 해요.”
재차 강조하며 환속해선 절대로 안 되는 이유를 열거했다. 새장 속에 갇힌 한 마리 새처럼 제한 없는 자유가 그리웠으며 영적이고 외적인 모든 압제로부터 훨훨 벗어나고만 싶었던 젊은 수녀에게는 마이동풍의 상찬이었을 뿐인데도. 그래도 저래도 저 고집을 꺾을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셨는지 스님은 “바깥세상에 나가서는 삼 일도 못 살 사람이 어쩌려고 그러는가?” 하시다가 끝내는 “정 수도복을 벗으려거든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말아라!” 하고 못을 박으셨다.
그로부터 눈에서도 마음에서도 멀어진 겹겹의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망망대해 일엽편주가 되어 삼 일도 못 살 것이라는 세상의 격류에 휩쓸리느라 정신도 못 차리고 떠내려갔다. 그래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겉모습은 언제나 고요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삼 일도 못 살 사람!”이라 낙인을 찍은 스님의 책망은 역으로 이 풍진 세상살이에 강단이 되어주었다. 세속에서의 부적응은 곧바로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기에 그것만은 절대로 용납해선 아니 될 터! 저주에 빠진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삼 일이 아닌 삼 년 동안을 살얼음 딛듯 얼마나 조심조심 살아냈는지 모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녀 같은 낯선 세상이었다. 부딪치는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초긴장 상태서도 제정신을 수습할 수밖에 없었던 동력은, 이 이상 여기서 더 멀어지면 안 될 것이라는 부적과도 같았던 어떤 음영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서든 떠나온 곳의 얼굴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 인종으로는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자성이었다.
그렇게 성聖과 속俗으로 갈라진 노상에서의 삶은 모호한 빛깔로 채색되고 있었다. 나는 잘려져 나간 나뭇가지가 되었고 다감했던 인연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렇다고 삶이 비감했다는 뜻은 아니다. 비록 성스러운 길에서는 되돌아 나왔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도 신기한 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것이 설령 속된 탐닉이라 할지언정 일찍이 수도원이 나에게 부여하지 못한 생의 또 다른 추구임에는 분명하지 않았겠는가.
눈에서 멀리 떨어져 가슴에서도 잊혀간 시계에서 나는 점차 세속적인 사람으로 영글어갔다. 이제는 지면을 통해서나마 안부를 엿듣고 살아온 소소한 일상도, 어느 해 찾아주셨던 먼 바닷가 처소 세심헌에서의 추억도 한낱 신화의 장으로 묻혀갈 것이다. 아직은 살아 있지만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만나려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막막했는지 모른다.
법정 스님을 처음 대면한 것은 종신서원을 앞둔 어느 해 여름이었다. 당시 스님은 불멸의 에세이집이 된 <무소유>와 <서 있는 사람들>을 상재하며 필명을 떨친 유명 인사였다. 그때는 봉은사 다래헌에 계셨고 나는 종신서원을 앞두고 명동 본원에서 대피정 중이었던 20대의 앳된 수도자였다.
그해 한여름 날의 풍경이었으리. 눈에 시린 이 한 장의 흑백사진은. 수녀원에선 가끔 사회적 명사들을 초대하여 강의를 들었다. 수도자들의 영성에 지적인 균형감을 함양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그때 초빙된 외부인사 중에서도 법정 스님은 단연 획기적이고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종교단체란 것이 존립의 명분상 배타적인 요소가 상존하기 마련이다. 20세기 말인 당시의 한국불교와 가톨릭은 소원한 관계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대변혁을 천명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기로 교회 내부에는 쇄신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제도의 개선과 타 종교와의 대화, 그리고 개방화의 급물살을 타고 불교계 인사인 법정 스님이 수도원에까지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언사가 유창한 그룹은 교수 집단이다. 한데 정작 교수들도 수도복 속에서 두 눈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수녀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쫙 늘어서 앉아 있는 연단에 오르면 긴장이 되는지 더듬대기 일쑤였다.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시절이 그랬으므로 수도원의 공기가 시종 고요하고 침울하고 엄숙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대면한 법정 스님은 의외였다. 수녀원에 승복 차림의 등장만으로도 충분히 어색했는데 일거수일투족이 호기심의 대상이란 걸 빤히 알 텐데도 천연덕스럽기 한량없었다.
일찍이 서구화된 수녀원 문화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풀물 빳빳이 먹인 잿빛 장삼에 흰 고무신을 신은 스님은 수녀들이 까만 구둣발로 또박또박 걸어오는 긴 복도를 휘적휘적 산길처럼 걸어 들어오셨다. 거기에 유난스럽게 밀어붙인 광이 나는 맨머리가 어찌나 분심을 주었는지 모른다. 음전한 수녀원의 분위기와는 생판 딴 뉘앙스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질감에도 스님은 뻔뻔하리만큼 자기네 절간 마당처럼 유창하고 사변적이었다. 그날 법정 스님이 우리 자매들이라고 불러준 수녀들에게 꼭 읽어보라며 추천한 신간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종파를 떠나 같은 수행의 길에 서 있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그날의 상면을 계기로 수녀들은 스님이 머물고 있던 삼성동 다래헌을 스스럼없이 방문했다. 법정 스님 또한 어느 글에서인가 “명동의 수녀원과 다래헌이 흡사 자매결연이라도 맺은 것처럼 수녀님들이 자주 찾아주었다”라며 자매인 수녀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토로하곤 했다.
서로의 처소를 오갔던 친교가 단순한 내왕으로 그친 것만은 아니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그렇게 다져간 우애로움을 단초로 가톨릭의 수도원과 불교의 수행자들 간에는 친화적이고도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우의는 점차 수뇌부들 간의 상호대면과 초대로까지 이어졌다. 이 땅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래로 백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가톨릭이 이뤄내지 못한 다른 종교 간 화합의 장이었다. 그런 우월적인 배타성의 벽을 허물고 한국가톨릭과 불교는 서로 존중하는 상생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 한편에 법정이라는 대단히 심미적이고도 인문학적인 한 수행자의 역할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의료원에 도착했으나 예상대로 면회는 사절이었다. 아니 휴일의 한갓진 병원 로비에서 만난 몇 명의 직원들은 스님의 입원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병원의 배려로 꼭대기 특실에 계셨으니 설령 숙지하고는 있어도 그리 대응하라는 지침이 내렸을 것이다. 주변에는 나보다 먼저 온 한 스님이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때 반가운 손님들이 등장했다. 키가 후리후리한 승려 세 사람이 로비에 막 들어선 것이다. 한눈에 척 봐도 송광사의 학승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법정 스님의 자취가 묻어 있는 조계산 송광사로 오르는 산길에서 마주친 스님들의 눈빛은 언제 봐도 깊고 형형했다. 학승들이 모여드는 승보사찰 송광사가 품은 정기 때문이다. 무사통과인지 그들은 전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달려가서 편지를 내밀며 법정 스님께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스님이 같이 올라가자고 끌었지만 동반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문병을 허락받은 처지가 아니기에 결례가 될지도 모르는 조심스러움이 앞섰다.
그리고 잠시 뒤 법정 스님의 맏상좌로 길상사 주지였던 덕조 스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벨라뎃다님! 금방 데리러 갈 테니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으세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덕조 스님이 로비에 나타나셨다. 그러니까 출가 초입의 상좌일 때 불일의 뜰에서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그 스님과도 세월의 뒤안길을 지나 다시 만난 재회였다. 때를 맞춰 잘도 나타나준 송광사 학승들의 덕분으로, 그리고 혹시 몰라 편지 말미에 살짝 적어둔 핸드폰 번호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면회를 못 하고 어슬렁거리던 다른 스님 한 분은 엉겁결에 내 덕을 보았다.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덕조 스님은 “스님이 정신은 있으세요”라고 귀띔해 주었다. 사람은 알아볼 수 있으니 참고하라는 뜻이겠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맞닥뜨린 병상의 하얀 시트 위에 스님이 누워 계셨다. 암으로 임종하는 마지막 순간이 그렇듯 한 눈에도 몹시 격한 막바지 통증으로 시달리는 모습이었다. 누가 그리하라 시킨 것도 아니건만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것도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야 왜 이제 스님 앞에 선 것일까. 나는 왜 굳이 그래야만 했을까.
내 덕에 상봉이 허락된 문병객 스님은 가까이서 손도 만져보고 하는데 나는 차마 머리맡까지도 닿지 못하고 먼발치서 가슴 위에 두 손을 얹은 채로 그저 스님을 응시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무주공산에 홀로 던져진 사람처럼 아무 상념도 일지 않았다. 단지 눈길이 마주쳤을 때 스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쳤던 듯도 하다.
아아 벨라뎃다! 벨라뎃다가 와주었구먼. 그렇게 알아보셨을 것이다. 평시의 스님 농담처럼 실물대조로 끝이 나버린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상봉은 막을 내렸다. 눈 속에다 가슴 속에다만 온갖 상념을 담았을 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선 그런 해후였다.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오면서 덕조 스님이 대신 건네준 위로의 말이다.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요….” 그리고 언젠가 절간 문에 기대서서 멀어져가는 벨라뎃다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휙 뒤돌아본 나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스님의 그 한 마디 음성이 환청처럼 맴돌았다.
“그래도 가끔은 성당에 나가….”
“네. 이 세상에서는 이제 스님을 마지막 뵌 것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겨우 덕조 스님에게 대답했다. 처음에 불일암으로 오르는 개울을 건너가던 때 손을 내밀어 잡아주신 날이 있었고 마지막 그분의 실존을 가슴 속에 다시 담을 수 있었던 날,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으며 끝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법정 스님은 의료원에서 길상사로 옮겨가셨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나고 그 주간 목요일에 열반에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