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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88976828606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24-07-02
책 소개
목차
서문을 겸한 서론
지구의 철학, 지구에 의한 철학을 위하여 ● 5
제1장 ‘인류세’와 지구의 철학
—두 가지 속임수와 철학적 배신
1. ‘인류세’ 혹은 인간의 그늘 ● 21
2. 노모스의 대지에서 자본의 노모스로 ● 26
3. 지구, 자연의 외부 ● 33
4.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어머니와 사신 ● 45
5. 인간의 외부, 외부의 사유 ● 52
6. 인류세와 자본세, 혹은 속임수와 배신에 대하여 ● 60
제2장 폴리스의 경제학, 오이코스의 정치학
—가장 없는 ‘가정’과 ‘정치’ 이전의 정치
1. 기원의 향수와 그리스 ● 73
2. ‘자연’의 정치학과 자연-권 ● 81
3. ‘폴리스’ 이전의 정치와 ‘가장’의 첫째 문턱 ● 90
4. 경제 이전의 오이코스와 잉여의 경제 ● 100
5. 폴리스의 경제화와 오이코스의 정치화 ● 112
제3장 허무주의 경제와 오이코노믹스
—경제학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가?
1. 오이코스와 화폐, 혹은 허무주의 경제 ● 131
2. 화폐가 오이코스를 장악할 때 ● 138
3. 경제학과 생태학: 오이코스의 사생아들 ● 143
4. 경제학의 공리들 ● 151
5. 이코노믹스의 데코노미와 오이코노믹스 ● 161
6. 경제학적 식민주의를 거슬러 ● 173
제4장 오이코폴리틱스
—인간과 인간도 아닌 것들 간의 치안과 정치에 대하여
1. 기후 격변과 비인간의 정치 ● 183
2. 폴리스의 정치에서 오이코스의 정치로 ● 187
3. 로고스의 정치와 포네의 정치 ● 194
4. 인간의 정치에서 비인간의 정치로 ● 200
4.1 포식의 정치 ● 205
4.2 증여의 정치 ● 210
4.3 회복의 정치와 증식의 치안 ● 213
5. 네크로폴리스와 조에폴리틱스 ● 223
제5장 오이코페미니즘 혹은 마녀들의 정치학
1. 오이코스와 가부장 ● 243
2. 국가와 가부장의 동맹 ● 254
3. 혈족의 치안과 마녀의 정치 ● 260
4. 네크로폴리스, 마녀재판 ● 269
5. 오이코페미니즘, 혹은 대지-되기 ● 288
제6장 기후 특이점과 멸종의 여백
—출구 특이점과 파국 특이점 사이에서
1. 기술 특이점? 기후 특이점! ● 303
2. 기술과 시장의 이인무 ● 312
3. 세 개의 기후 특이점 ● 322
4. 기술주의의 기계-신과 악마-기계 ● 331
5. 필경 도래할 특이점 ● 346
6. 멸종, 혹은 장기지속적 종말 ● 353
7. 살의 없는 대량 살상과 멸종의 특이점들 ● 360
8. 멸종의 여백에서 ● 365
제7장 유물론적 종말론과 미토콘드리아의 철학
—종말의 이중 긍정을 위하여
1. 구멍은 있어도 구원은 없는 종말 ● 375
2. 유전자의 주체철학과 미시적 혈통주의 ● 381
3. 미토콘드리아의 철학 ● 389
4. 기후 원리주의와 도덕주의 ● 396
5. 출구 없는 종말을 위한 유머레스크 ● 403
참고문헌 ● 411
책속에서
캄보디아의 오래된 사원 벽을 가르며 거대하게 자란 나무는, 톱질에 그저 리그닌(lignin)의 단단한 목질로 버티는 수동적 저항 이상으로 나무가 강력한 주어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목이 잘린 채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닭은, 그렇게 도망치고 생존하려는 힘만큼의 주어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 목이 잘리기 전부터 닭은 그런 주어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도, 대기도, 흙도, 물도, 빙하도, 바람도, 돌도, 나무도 모두 그 나름의 힘을 갖고 행동하는 주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작용하는 힘만큼 어떤 행동의 주어다. 인간 혹은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행동이라 하는 것은 이동이 곧 운동이라 믿는 소박한 동물 중심적 단견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이 주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모습대로만 세상을 보는 인간 중심적 고질병이다.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은 인간이 장악했다고 믿었던 ‘자연’조차 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외부에 입혀 놓은 헐렁한 옷이었음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인간의 지성이 재봉한 옷이 찢어지며 그 안의 속살이 일부 드러난 사건이었다. 원자로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후쿠시마 원전의 연료봉과 그걸 냉각시키기 위해 사용된 거대한 양의 오염수는, 어떤 핑계로 어떻게 ‘처리’하든 사실은 인간이 끝내 제거할 수 없는, 결국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부 아닌가. ‘희석’해 처리한다 하지만 그건 물에 타서 바다에 버린다는 말 아닌가? 굳이 지구의 관점에 서지 않아도 바닷물을 타서 바다에 버리는 게 그냥 바다에 버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정치(폴리스, polis)에 참여할 ‘자격’을 묻는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와는 반대 방향으로 정치를 돌려놓는다는 사실이다. 자격 없는 자들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강조하듯이 데모크라시의 데모스는 ‘자격 없는 자들’이다. 긍정적 의미의 민주주의란 자격 없는 자들의 정치다. 자격을 문제 삼지 않는 정치, 자격이란 게 따로 없었던 시절의 정치다. 따라서 그것은 분명 ‘정치’라는 말이 따로 출현하기 이전에 있었던 것일 게다. 그런 말들이 따로 존재한다 함은 정치라는 테두리 안팎을 가르는 경계와 자격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정치란 애초에 거기 참여할 자격이 따로 없던 시기에 이미 시작된다는 것, 그것이 기원의 향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갈 때 우리가 도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도 민주주의도 아렌트가 강조하듯 참여할 자격이 명확하게 제한되어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나 데모크라티아를 모델로 삼아선 안 된다. 전제정이나 귀족정과 대비되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오히려 자격 이전의 정치로 밀고 가야 한다. ‘폴리스’ 이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국가권력이 출현하기 이전, ‘정치’라는 말도 없이 작동했던 정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