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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희곡 > 외국희곡
· ISBN : 9791159012563
· 쪽수 : 216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기 전에 5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세계 11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23
등장인물들 34
제1막 베니스와 벨몬트 37
제2막 69
제3막 117
제4막 159
제5막 193
리뷰
책속에서
들어가기 전에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이란 인물 때문에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작품이다. 20세기 초기에 일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소개된 셰익스피어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은 <샤일록>, <살 일 파운드> 등과 같은 다분히 감각적인 제목으로 부분적인 편집 및 각색을 거쳐 매우 제한적인 시각에서 알려졌다. 권선징악이나 시적 정의 같은 유교적 도덕규범과 상당 부분 맞아떨어지는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 작품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다분히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수용되고 해석되어 온 것이 한국에서의 현실이다. 샤일록은 『춘향전』의 변사또나 『장화홍련전』의 계모와 같은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으며, 마지막에 샤일록이 무대 밖으로 사라지며 길게 던지는 검은 그림자 뒤에 숨어있는 인종적 편견이나 종교적 위선, 초기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잉태하고 있는 고리대금업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들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사실 이 작품을 셰익스피어의 다른 희극들과 마찬가지로 결혼과 음악을 동반한 축하연으로 한결같이 끝나는 소위 “행복한 결말 희극”으로 보아온 것은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함의들을 애써 외면하려는 정치적 무의식의 결과였다. 일제강점 하에서 샤일록은 권력을 가진 다수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소수, 타자, 이방인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또한 그런 샤일록이 억압당하고 있는 조선인의 모습과 겹쳐지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면 쉽게 소개되고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다. 샤일록이 재판 마지막 단계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당하는 것은 창씨개명과 개종을 강요당했던 조선의 현실과 쉽게 조응될 만한 것이었지만, 『베니스의 상인』이 셰익스피어의 희극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그러한 세부적인 일치나 해석의 길을 차단해버렸다. 이점을 굳이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이 작품에 대한 비판적 수용사가 그 자체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하나의 문화비평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번역어나 문체의 변화가 해석의 미세한 관들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이다 보니 『베니스의 상인』은 이미 번역본이 여럿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새로운 번역을 시도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보이는 그의 말장난의 다의성을 어느 한 번역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번역은 계속해서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셰익스피어 번역에 있어서 완성본은 없다. 번역은 장소와 차원을 달리하는 은유처럼 어떤 형태로든 이동/이탈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심지어 제자리 뛰기를 할 때도 다들 경험하는 것처럼 매번 뛰는 높이나 착지점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이동으로서의 번역 역시 할 때마다 조금씩 차이를 생산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제자리 뛰기가 제자리 뛰기가 아니듯이 반복은 미세한 차이를 가져오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번역은, 동일한 사람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것이다. 이동으로서의 번역은 언어의 비유적 기능방식과 흡사한 것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직역이란 있을 수 없음을 이번 작업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언어의 의미가 사전적 정의보다는 문맥과 용례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문맥과 용례는 문화적 전제나 가정들과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맞물려 있어서, 이 문화적 차이와 차별을 고스란히 번역어의 언어 속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한결같이 본문보다 주석의 분량이 더 많을 정도로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문화적 의미의 차이가 이미 심각한 텍스트인데, 그의 작품을 외국어로 직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의미 소통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의역이 독자의 상상력과 지적 수고를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일단은 텍스트와 독자의 소통, 즉 뜻이 통하게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이 번역에서는 필요한 경우에 가독성을 위해서 일부 손질을 가했음을 밝힌다. 각각의 단어들은 다의성의 망 안에 갇혀 있으며, 이들 다의성이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이다. 이 맥락이란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고 살아 숨 쉬는 바다나 어항과 같은 것이어서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듯이, 맥락에서 벗어난 의미란 성립할 수가 없다. 맥락이란 문화적 가정이나 해석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들 주어진 조건을 번역에서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현실적으로 지난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주어진 외국어의 의미 맥락을 자국어로 옮기는 작업은 맥락을 형성하고 있는 문화적 가정들을 자국어의 틀 안에서 찾는 작업을 동반한다. 따라서 문자적 번역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번역에 사용한 저본은 어느 특정 판본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여러 주석본들을 참고했기 때문에 특정 판본을 명시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