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모던걸 시집 : 캐피털 웨이

모던걸 시집 : 캐피털 웨이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강경애, 김명순, 나혜석, 노천명, 지하련 (지은이)
  |  
텍스트칼로리
2021-06-30
  |  
12,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10,800원 -10% 0원 600원 10,20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인터파크 로딩중
11st 로딩중
G마켓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모던걸 시집 : 캐피털 웨이

책 정보

· 제목 : 모던걸 시집 : 캐피털 웨이 (현대어로 쉽게 풀어 쓴 근대 여성 문학)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8969302
· 쪽수 : 164쪽

목차

편집자의 말 8
추천사 10
1부 그대이기에 서럽고 서러운 날들 사랑은 괴롭고 슬프기만 한 것인가요

샘물과 같이|보슬비|산딸기|눈|고혹|소녀이기에|그러면 갈까요?|그 여자의 고백|당신을 위해|해바라기|그믐밤|희망|거룩한 노래|사월의 노래|오해|추억|불꽃|비련의 노래|저주

2부 누군가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고독|달밤에|너무도 쓸쓸한 처녀여|묘지|외로움의 변조|모래|유리관 속에서|향수|기도, 꿈, 탄식|탄실이의 첫 꿈|가을의 설움|탄식

3부 구름같이 왔다 가는 뜻 모를 이 인생
구름같이|바닷가에서|가을의 구도|코스모스|진리|바다에의 향수|비 오던 그날|들국화|술공장|아름다운 새벽을

4부 꽃다운 꿈이 뒹구는 서리 내린 밤풍경
캐피털 웨이 |고별|감방 풍경|개 짖는 소리|창가|잔치|저녁|분이|남사당|가을날|면회|대합실

5부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별을 쳐다보면|여자여|인형의 집|내 가슴에|오오 봄!|빛|오빠의 편지 회답|환상|이 땅의 봄|유언|노처녀의 설움|시골 주부의 노래|母된 감상기 中|인내하라

6부 언니 다시 오실 때가 꽃 필 때라기에
어머니와 딸|울 엄마 눈물|언니 오시는 길에|자매|깊은 밤에|어느 야속한 동포가 있어|여섯 시|어부의 아내|울 언니 월급|공장 뛰―|눈|내 마음|아껴 무엇하리, 청춘을

용어해설 155
부록 159

저자소개

나혜석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6년 4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13년 도쿄 사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해 1918년에 졸업한 후 잠시 미술교사로 활동했으며, 1919년 3월 만세 운동을 한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0년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했으며, 25세 때인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첫 유화 개인전을 가졌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연 첫 여성 개인 전람회였다. 같은 해에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에 홍일점으로 유화를 출품했으며,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해마다 작품을 출품해 수상과 특선을 거듭했다. 그는 작가이자 여성의 주체적 권리와 인권을 펼친 운동가이기도 했다. 1914년 〈이상적 부인〉을, 1918년에는 조혼 문제를 다룬 단편소설 〈경희〉를 썼으며, 1923년 〈모(母) 된 감상기〉와 1934년에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며 파문을 불러왔다. 특히 〈이혼 고백서〉에서 그는 이혼에 이르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한편, 경직된 사회와 이로 인한 여성 문제를 비판했다. 이후 다양한 글을 쓰고 발표했으나 이혼녀라는 이유로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 이후 수덕사 등을 떠돌다가 1944년 8월 한 양로원에 맡겨진 뒤 1949년 3월 14일에 관보에 무연고자 시신 공고로 그의 죽음이 알려졌다. 1948년 11월에 시립 자제원 병동에 무연고자로 입원해 있던 중 12월 10일 눈을 감은 것이다. 시대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었고, 그의 무덤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펼치기
노천명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펼치기
노천명의 다른 책 >
강경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많은 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장연여자청년학교를 거쳐 장연보통학교에 입학 후 가난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두드러진 작문 실력을 발휘했다. 192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인 1923년 10월에 학생 동맹 휴학 사건 관련자로 퇴학당했다. 이 무렵, 장연 태생의 동경 유학생 양주동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서울 동덕여고보에 편입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9월 그와 헤어지고 난 뒤 장연으로 돌아왔다. 1924년부터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단편소설을 투고하였으며, 같은 해에 결혼한 뒤 6월경에 간도로 이주하였다. 1934년에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 문제』를 연재한 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944년 4월 지병 악화로 결국 사망했다. 1999년 8월, 중국 용정에 ‘녀성 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펼치기
지하련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 이숙희(李淑姬). 필명 이현욱(李現郁), 지하련. 1912년 7월 11일 경남 거창 태생. 일본 소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여자경제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5년 카프의 지도자인 임화와 결혼하였고, 1940년 소설 「결별」이 백철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발표되면서 등단했다.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1947년 임화와 함께 월북할 때까지 작가로 활동하였다. 1953년에 임화가 사형에 처해지고, 만주에서 뒤늦게 그 소식을 들은 지하련은 실성한 채 헤매 다녔다고 하며, 1960년 초에 평북 희천 근처의 교화소에 격리 수용되었다가 병사했다는 설이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결별」 「체향초」 「가을」 「산길」 「종매」 「양」 「도정」 등이 있으며, 소설집 『도정』이 있다.
펼치기
김명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6년 1월 2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7년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청춘』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로 불린다. 등단 이후 김명순, 김탄실, 망양초, 망양생, 별그림 같은 필명으로 시, 소설, 산문, 평론, 희곡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보들레르의 시를 번역하는 등 외국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피아노를 잘 치고 독일어로 곡을 만들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여성 작가 최초로 창작집 『생명의 과실』(1925) 『애인의 선물』(1929 추정)을 펴냈으며, 신문기자,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공부와 집필에 힘썼으나 모욕적인 소문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글쓰기를 중단했다. 생의 마지막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1951년 도쿄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는 1918~1936년 사이 발표한 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펼치기

책속에서



보슬보슬 / 보슬비가 내려옵니다 / 마당 위에 / 고여 있는 물만 불리는 / 보슬보슬 / 보슬비가 내려옵니다 / 우리 둘이 껴안고 / 이 비를 맞아 / 우리의 사랑에 / 물이 고이면 / 내년 춘삼월이 / 다시 올 때에 / 우리의 헌 사랑에 / 새싹이 날 거예요
- 김명순, 「보슬비」 중에서


… 감히 손에 손을 잡을 수도 없고 / 속삭이기에는 이 나이에 겸연쩍고 / 그래서 눈은 하늘만을 쳐다보면 / 얘기는 일부러 딴 데로 빗나가고 / 차디찬 몸짓으로 뜨거운 맘을 감추는 /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죠 …
- 노천명, 「당신을 위해」 중에서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