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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651071
· 쪽수 : 167쪽
책 소개
목차
시작하며 / 유자효·5
시인에게 / 나태주·7
이혜미
<근작시>
옥춘·21
달사람·23
침대에서 후렌치 파이·25
슈슈·26
모르므로·29
<산문>
순간들의 사이가 모여·30
박성준
<근작시>
지독·35
불자동차 그리기 대회·37
명백한 나무·40
아스라이·44
고덕·46
<산문>
서산·49
황종권
<근작시>
잉어 재봉틀·55
같은 마음·57
그네의 시·59
사막을 건너는 표정·61
끝없는 버릇·64
<산문>
ㅅ, 그 영혼의 첫 이름으로·66
신승민
<근작시>
타향(他鄕)의 새·71
실족(失足)의 세월·73
벌초·74
역류(逆流)·75
예감·77
<산문>
시인의 시, 사람(人)의 시·79
문혜연
<근작시>
겨울 숲·85
우리는 새총처럼·90
아무도 모르고 누구나 아는·92
러브 레터·96
파도가 부서진 자리·98
<산문>
숲과 수프·104
서종현
<근작시>
ㅅ·111
ㅇ·114
ㄹ·119
ㅈ·121
ㅍ·123
<산문>
시작 노트·127
이진양
<근작시>
너무 나무·131
비자연언어처리·132
TOMBOY·137
불과 시소·139
망아지의 눈·141
<산문>
사물함에는 폭탄이, 시든 꽃다발이,
누군가의 설익은 어둠이·143
생각하며 | 김재홍(시인·문학평론가)
젊은 시인 ‘시옷’, 시에 옷을 입히다·147
저자소개
책속에서
영혼을 이불처럼 걷어 툭툭 털고 볕에 내어 말릴 수 있겠니, 주먹을 쥐었다 펴면 우수수 쏟아지는 부스러기들을 모아 기억만으로 몸을 넘어설 수 있겠니, 문구점 앞 새빨간 슬러시를 훔쳐 도망가다 컵을 엎지를 때, 화단의 튤립을 뽑고 막대사탕을 심을 때, 깨어진 구슬들이 웅성웅성 귓가에 부딪힐 때, 입가를 온통 바스러진 단것들로 장식하며, 최선을 다해 망쳐버릴 거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사정없이 못생겨질 거야, 너와 나 이후를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사소한 믿음에 남은 생을 걸고,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드넓어지며, 옛 이불들이 켜켜이 쌓인 옷장 속에 숨어들어, 납작해져야지, 조금씩 흩어지다 흔적으로만 남아야지, 베개 속에 감춰둔 나쁜 낙서들을 베어 먹으며, 이빨이 모조리 새까맣게 변하기를 기다려야지, 부서진 빛의 조각들이 입술의 위성처럼 떠돌던 여름에
-이혜미, 「침대에서 후렌치 파이」 전문
겁도 없이 기억이 기억을 이긴다. 울음이 그칠 때까지 당신을 안아줄 수 있어.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것들. 숨은 줄 알았는데 뚜렷한 것들. 그날 왜 애인은 나 대신 울기로 작정을 했을까. 이곳을 해변이라 부르면 해변이 되고 이곳을 춥다고 말하면 그늘이 금세 곁에 와 있다. 모래 산이 곁에 와 있다. 만약이라는 이름의 작은 알약과 만일이라는 이름의 작은 일들 때문에 서로가 보탠 희미함도 그립게 식는다. 모래 산 중심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뭇가지가 박혀 있고, 그 속에는 뿌리 대신 소리를 내서 읽으면 울컥 눈물이 쏟아지는 문장이 있다. 오래 못 가 무너지는 관계들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가슴이 끓고, 이해하기 좋은 슬픔들은 슬픔이 되지 못하고 투명해져 갔다. 내 쪽으로 모래를 많이 가져와야 이기는 게임인 줄 알았다. 모래의 양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는 동안 눈물이 많았던 사람은 영혼이 너무 녹아 얼굴이 지워진다고 하던데, 나는 왜 그토록 많은 눈물을 흘리고도 멀쩡한 낯빛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앞다투어 빼앗아낸 모래가 서로 앞에 다른 높이로 쌓이고 모래 산이 품고 있던 나무의 깊이만큼 겁도 없이 마음이 마음을 움직였다. 좁은 복도를 걸으면서 부어오른 애인의 편도를 생각했다. 죽은 가지에서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흐느끼는 애인을, 모래를 끌어오듯 안는 순간에서 나는 정지한다. 그 사람이 투명해지기 직전까지 움직이는 모든 것이 마음이 되었다.
-박성준, 「아스라이」 전문
살구꽃 그림자가 수심을 어지럽히는 사월의 바다
살고 싶어 저녁을 부르는,
저녁이 저녁으로만 깊어가는 어두운 현기증은
입술이 지듯이
이끼 없이도 상처를 들어앉히고
최선을 다해 젖는 꽃잎은 차라리 물갈퀴이기도 했다
윤슬처럼
올망졸망한 별빛들,
지척을 가린 물속에서 더욱 그렁그렁했다
심장처럼
살구꽃잎 속에서 잠긴 이름들
사월은 어린 것들을 부르다,
핏물이 빠지지 않는 지평선을 오래 바라보게도 했다
봄으로부터 눈시울이 붉어지는 바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고
살구꽃이 질 때마다
물멀미를 앓는, 버릇이 생겼다
-황종권, 「끝없는 버릇」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