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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6373856
· 쪽수 : 208쪽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_《소설 뉴욕》행 열차를 출발하며
맨해튼 럭키스타_박생강
살아가는 동안 프란시스 차
그라운드 제로_SOOJA
32번가에서_파트리샤 박
아임 파인, 땡큐_강민선
미뉴에트_홍예진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맨해튼 럭키스타〉
“내일도 올 수 있어?”
밤색머리는 검정머리가 그렇게 물어본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뉴욕에서 누군가 내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밤색머리는 배부름과는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뉴욕에서 느낀 아주 작은 행복이었다.
밤색머리는 검정머리가 그렇게 물어본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뉴욕에서 누군가 내일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밤색머리는 배부름과는 다른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뉴욕에서 느낀 아주 작은 행복이었다.
“그럼요, 내일도 나는 배고 고플 테지만, 월세 때문에 식비를 아껴야 하니까.”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
밤색머리는 고맙다, 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 하고 싶어졌다. 고맙다, 는 말은 충분히 많이 했다. 가끔은 소녀처럼, 가끔은 처녀처럼, 또 가끔은 늙은 할머니처럼, 어쩌다 거리의 갱스터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어쨌든 너무 지겨워질 정도로 고맙다고 했다.
“미세스 마,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검정머리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팼다. 검정머리는 안경을 벗은 다음 앞치마로 슬쩍 닦고 다시 썼다.
“너는 맨해튼의 럭키스타가 될 거야. 나는 그럴 알아볼 수 있어.”
“그럼, 당신은 내 첫 번째 팬이네요.”
“그리고 아마 행운아가 되면 너는 나를 잊어버릴 거야.”
“세상에, 말도 안 돼요.”
〈살아가는 동안〉
벽은 돌회색으로 칠해놓았는데, 아름다운 터키블루 빛깔 침대 덮개가 그 벽과 충격적일 정도로 예쁘게 어울렸다. 미나의 화장대는 거울과 섬세한 금속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고 있으니, 화장대와 벨벳 의자에 어울리는 바닥 깔개까지 놓인 이런 방을 가지면 어떤 느낌이 들지 상상을 해보게 된다.
천천히 서랍 하나를 열었는데 화장품이 눈에 들어와 다시 닫았다. 두 번째 서랍에는 편지봉투가 들어 있었다. 세 번째가 내가 찾던 것이었다. 오른편 구석 깊숙한 곳에 있는 벨벳 상자에서 목걸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목걸이를 집어 들고 바라봤다. 정말 아름다운 물건이었고, 혹시 상표가 새겨져 있지 않은지 걸쇠를 살펴봤지만 글자가 너무 작아 알아볼 수 없었다. 어떤 모양으로 늘어지는지 보려고 목에 걸어봤다. 그런 다음 전화기를 꺼내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목걸이를 제자리에 되돌려놓았다.
그런데 다른 목걸이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반짝이는 금줄에 커다란 오팔. 이것도 정말 근사했다. 역시 목에 걸고 사진을 찍은 다음 제자리에 되돌려놓았다. 어느새 나는 서랍 속의 모든 상자를 열어서 반지며 팔찌며 목걸이를 착용해보고 있었다. 값나가는 보석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어딘가에 잠가놓고 보관하고 있을 테니까. 미나가 하고 있던 티파니 다이아몬드나 반 클리프의 클로버, 까르띠에의 시계 같은 보석들 말이다. 그녀에게 여기 있는 것들은 그저 숨겨둘 가치가 없는 진열용 장신구일 뿐이다. 나는 미나의 취향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로즈골드와 아주 작은 다이아몬드들로 만든 얼굴 모형 반지는 숨이 멎을 정도였다.
〈그라운드 제로〉
그날 밤 영호는 혼자 그라운드 제로를 찾았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영호는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고 새벽에 잠을 설친 덕에 온몸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지쳤지만 지금 잠들면 새벽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할 것 같아 최대한 깨어 있기로 했다. 호텔을 나와 발을 내딛었지만 마치 바닥에서 1센티 정도 붕 떠서 걷는 기분이었다. 고층 건물을 타고 내려오는 강풍에 영호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었다. 거리는 이미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몇몇 관광객 무리가 어디론가 바삐 길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를 찾아 서둘러 맨해튼을 비웠다. 그라운드 제로는 호텔에서 차로 10분 거리지만 걸어서도 10분 거리였다. 영호는 낮에 보았던 검은 벽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50여 미터 정도 되는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검은 대리석 벽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빙 둘러서 있었다. 벽으로 다가가자 10여 미터 높이로 움푹 파여 있었는데, 그 벽을 타고 마치 폭포수처럼 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9. 11테러로 쓰러진 쌍둥이 빌딩 터였다. 벽의 윗면에는 그날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폭포수가 흘러 들어가는 가운데에는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10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의 검은 구멍이 있었다. 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검은 구멍으로 쉴 새 없이 흘러들어갔다. 구멍은 주위의 모든 중력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영호는 그것이 마치 우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꾸로 흐르는 우물. 몇 시간이라도 그 검은 우물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영호는 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의 신호가 가자 지희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