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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7092404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0-08-05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_다양한 맛과 색깔의 부산 이야기를 만나다
산 너머 보던 풍경_곽재식
부산에서 김설아 찾기_송재현
포옹_목혜원
불면의 집_김경희
떠나간 시간의 음_백이원
흔들리다_임회숙
오월의 여행_김이은
저자소개
책속에서
산 너머 보던 풍경
“여러분, 박승유의 역설이 뭔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나는 교사가 그 이야기를 하던 날을 떠올렸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내 관심이 바로 확 쏠렸다. 혹시라도 그 이야기를 듣다가 내가 무심코 태희를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갑작스레 다짐할 정도였다.
“조금 좋아하더라도 딱히 많이는 안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쉽게 같이 지낼 수 있죠. 별로 그렇게 잘 보여야 된다는 부담이 없으니까 말도 편하게 걸 수 있고, 자기 생각도 말할 수 있고, 어울릴 때 힘든 것도 없죠. 그러다 보면 저절로 점차 정이 들기도 하고 친해지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그러다 보면 또 사귀기도 하고 살림 차리고 결혼하고 애 낳고 뭐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겠죠?”
어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보기만 해도 막 가슴에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분 혹시, 그런 사람 있습니까?”
많은 학생들을 따라 나는 피식 웃는 흉내를 냈다. 하지만, 이미 불타오르고 있던 내 가슴은 그런 표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부산에서 김설아 찾기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면 소요 시간 3시간, 요금은 6만 원을 넘지 않았다. 열차는 20분마다 한 대는 있었는데 우리 동네 마을버스 낮 시간 운행 간격보다 잦았다. 나는 하행 승차권과 상행 승차권을 함께 예매했다. 부영은 같이 가는 대신 당일치기로 돌아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우리는 우리가 김설아를 만나고자 했을 때 만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고 싶은 것이지 김설아의 거처를 밝혀내려는 것은 아니라고 부영은 말했다. 나는 꼭 김설아의 거처를 밝혀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수락했다. 현실적인 이유로 부영의 마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낙관적인 사태 해석과 우주의 관대함에 의존하는 이런 계획은 99퍼센트 실패한다고 본다.
99.9퍼센트라고 하지 않은 것에서 나는 약간의 다정함을 건져 올렸다.
……
부산은 서울보다 더웠고, 공기에선 바다냄새가 났다. 열대어가 헤엄치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아니라 갈치와 고등어가 유영할 것 같은 남색 바다. 이 도시에 있는 한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바다였다.
포옹
부산에 무슨 일로 왔냐는 나의 질문에 돌아온 남자의 대답이 기묘했다. 광안대교에서 뛰어내리려고요. 남자는 아주 잠깐 카페 안쪽 벽에 그려진 커다란 벽화에 시선을 두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남자가 바라본 벽화는 광안리 밤바다 풍광을 드로잉한 그림이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했다. 답하는 남자의 표정에 불길한 어둠이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온해 보였다. 차라리 침울해 보였더라면 겉치레일지라도 대강 위로를 건네며 대화를 마무리 지을 갈피가 잡혔을 법도 했건만, 남자의 태도는 마치 다니는 회사에서 지방발령을 내려 부산에 오게 됐다고 대답하듯 담담했다.
언제 뛰어내리시려고요? 난감해하던 내가 농담처럼 웃으며 물었다. 어색함을 어떤 식으로든 헤쳐나가야 했다. 농담을 주고받는 것보다 이 상황에 더 적절한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온 남자의 대답은 기묘했다. 오늘 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