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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 소설

우리 고전 소설

박지원, 안국선, 이규보, 임춘, 허균, 혜경궁 홍씨, 김만중, 이곡 (지은이)
  |  
(주)하서
2006-04-26
  |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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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전 소설

책 정보

· 제목 : 우리 고전 소설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고전
· ISBN : 9788962591224
· 쪽수 : 318쪽

목차

홍길동전 / 허균
춘향전 / 작자 미상
구운몽 / 김만중
양반전 / 박지원
국순전 / 임춘
공방전 / 임춘
한중록 / 혜경궁 홍씨
인현왕후전 / 작자미상
금수회의록 / 안국선
계축일기 / 작자 미상
국선생전 / 이규보
죽부인전 / 이곡
유충렬전 / 작자 미상
임진록 / 작자 미상
작품 해설

저자소개

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737년 2월 5일(1세)에 반남(潘南) 박씨 아버지 사유(師愈)와 어머니 함평(咸平) 이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한양 서쪽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미(仲美)ㆍ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ㆍ연상(煙湘)이다. 어려서부터 글 솜씨가 뛰어났으나 17세 무렵부터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학문에 매진했으나 과거에는 뜻을 보이지 않았다.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등과 깊은 교우를 맺었고 박제가, 이서구 등을 제자로 삼아 북학론을 주장했다. 1780년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지었다. 1786년, 50세의 나이에 친구 유언호의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안의현감(安義縣監) 등을 역임했다. 1793년 정조에게 문체반정의 주동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1805년 가회방(嘉會坊) 재동(齋洞) 집의 사랑에서 사망했고 1900년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연암집》이 간행되었으며, 1901년에는 김택영이 편찬한 《연암속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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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선 (지은이)    정보 더보기
경기도 안성 출생. 호는 천강(天江). 개화기 시대 신소설 작가. 구한말 개화를 부르짓은 대표적 정치가 안형수의 양자로, 1895년경 일본에 건너가 제1회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전문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함.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어 참형을 선고받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8년 탁지부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1911년 청도군수를 지내기도 함. 저서로는 최초의 근대적 단편소설집 《공진회》와 우화소설 〈금수회의록〉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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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氐)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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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의종(毅宗)·명종(明宗) 연간 인물로,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다. 생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종 연간에 태어나 40세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 30세까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兩鬢華)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임춘은 관직(官職)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유학의 본령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현실을 감내했다. 임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강남을 떠돌던 시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서하집(西河集)≫에는 현실적 관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시(詩)와 산문(散文)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불우한 문인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현실을 거부할 수도 잊을 수도 없기에, 시문(詩文)은 강렬한 현실 지향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특히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도 타락한 현실을 비판한 강렬한 의식이 엿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멤버 중에 이인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서하집(西河集)≫은 임춘의 불우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대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 또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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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569년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1579년 아버지가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는데 다음 해에 아버지가 상주 객관에서 죽었다. 1582년 작은형을 찾아온 시인 이달을 처음 만났고 이달은 나중에 그의 스승이 되었다. 1588년 작은형이 죽고, 1589년에 누이 난설헌이 죽은 후에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강릉에 도착했고, 사천 애일당 외가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蛟山)이란 호를 썼다. 1593년에《학산초담》을 지었고, 1596년 강릉부사였던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1598년 중국의 장군과 사신들을 접대하느라고 돌아다녔다. 중국의 종군문인 오명제에게 《조선시선》을 엮어주었으며, 《난설헌집》 초고를 중국에 전파케 했다. 10월 13일, 다시 병조좌랑이 되어 가을에 평안도를 다녀왔다. 1599년 황해도사가 되었는데, 기생을 너무 많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11년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 도착해서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왔다. 1612년 8월 9일, 큰형 허성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벗 권필이 광해군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매맞아 죽었다. 1615년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다.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이때 다녀온 기록을 《을병조천록》으로 남겼다. 1618년 봄, 스승 이달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다. 윤4월 7일, 남대문에다 백성들을 선동하는 흉서를 붙인 심복 하인준이 잡혀들어갔다. 17일에 허균도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의 심복들이 허균을 탈옥시키려고 감옥에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 22일에 광해군이 친히 허균의 심복들을 국문하였다. 이이첨은 망설이는 광해군을 협박하여 허균의 처형을 서둘렀다. 허균은 결안도 없이 8월 24일에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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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21대왕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빈이자 조선 22대왕 정조의 생모.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차녀로 1735년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열 살의 나이에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의소세손과 정조,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를 낳았다. 맏아들 의소세손이 세 살 만에 죽고, 남편 사도세자는 당쟁의 대립 속에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겪었다. 마흔두 살 때 둘째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한 외가가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으로 간주되어 배척당하게 된다. 1800년 손자 순조가 즉위했지만 나이가 어려 영조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고,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인물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면서 혜경궁 홍씨의 동생 홍낙임도 처형되었다. 1795년 회갑을 맞아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회고하며 《한중록》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1816년 사망했으며 고종 때에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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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중기 문신·문학가이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65년(현종 6) 정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정언·수찬을 역임하였고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삼남의 민정을 살폈으며, 1675년(숙종 1) 관작이 삭탈되기까지 헌납·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79년(숙종 5) 다시 등용되어 예조참의·공조판서·대제학·대사헌 등을 지냈으나,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 사건에 연루되어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688년(숙종 14) 풀려났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구운몽》을 쓴 뒤 병사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났고, 유복자로 태어나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 윤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국문 소설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알려진 작품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뿐이다. 《구운몽》은 전문을 한글로 집필한 소설 문학의 선구로 꼽힌다. 특히 그 구성은 선계(仙界)와 현실계(現實界)의 이중 구성을 택하였고, 불교적인 인생관을 형상화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서포집》, 《서포만필》, 《고시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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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1320년 이제현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해 좌주(座主), 문생(門生) 관계를 맺고, 1332년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후 평생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했다. 고려에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고려 말의 정치가 및 문호로 유명한 이색(李穡)이 그의 아들이다.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보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역사서의 편찬에도 깊이 관여했다.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이 전한다. 『동문선』에 상당한 시문이 선발되었으며,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假傳體) 「죽부인전(竹夫人傳)」은 특히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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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춘향이 상방에 올라가 무릎을 여미고 단정히 앉을 뿐이었다. 사또가 크게 혹하여 춘향더러 분부하되,
“오늘부터 몸단장 정히 하고 수청을 거행하라.”
“사또님 분부 황송하오나 일부종사 바라오니 분부 시행 못하겠소.”
사또가 웃으며 말하기를,
“아름답고 아름다운 계집이로다. 네가 진정 열녀로다. 네 정절 굳은 마음 어찌 그리 어여쁘냐. 당연한 말이로다. 그러나 이수재(이도령)는 경성 사대부의 자제로서 명문 귀족의 사위가 되었으니, 한때 사랑으로 잠깐 희롱하던 너를 조그만치나 생각하겠느냐? 네 아무리 수절한들 열녀 칭찬 누가 하랴. 너 말 좀 하여라.”
춘향이 여쭈어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절개를 지킨다 함을 본받고자 하옵는데, 수차로 분부가 이러하오니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옵고 정절이 있는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못하오니 처분대로 하옵소서.”
- <춘향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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