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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우리고전소설 (하서명작선 90)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73307081
· 쪽수 : 318쪽
· 출판일 : 2000-10-25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73307081
· 쪽수 : 318쪽
· 출판일 : 2000-10-25
목차
홍길동전 / 허균
춘향전 / 작자 미상
구운몽 / 김만중
양반전 / 박지원
국순전 / 임춘
공방전 / 임춘
한중록 / 혜경궁 홍씨
인현왕후전 / 작자 미상
금수회의록 / 안국선
계축일기 / 작자 미상
국선생전 / 이규보
죽부인전 / 이곡
유충렬전 / 작자 미상
임진록 / 작자 미상
저자소개
박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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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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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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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895년(17세) 큰아버지인 안경수의 도움으로 관비 유학생 으로 선발되어 일본 게이오의숙에서 수학했고, 곧 도쿄전문학교로 옮겨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899년(21세) 귀국한 직후 박영효와 관련된 역모 혐의에 얽혀 투옥되었고, 1904년(26세) 종신 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만 3년간 전라남도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투고와 번역에 투신 했다. 1907년(29세)년 유배에서 풀려나 상경한 이후 「정치원론」, 「외교통의」, 「연설법방」 등 다양한 책을 연달아 출간했다. 또한 학교 강단에서 정치와 상업을 강의하고, 여러 사회단체와 학회에 참여하며 국민계몽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듬해 관직에 나서면서부터 이전 의 행보와 멀어졌고, 1911년(33세)에는 청도군의 군수직을 지냈다. 1913년(35세) 군수직을 청 산하고 학교로 돌아와 정치학과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5년(37세) 「공진회」를 출간 했고, 안성으로 잠시 낙향했다가 1920년(42세) 아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상경하여 경제 관련 글쓰기 활동을 재개했다. 1926년(48세)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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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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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氐)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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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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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의종(毅宗)·명종(明宗) 연간 인물로,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다. 생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종 연간에 태어나 40세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 30세까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兩鬢華)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임춘은 관직(官職)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유학의 본령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현실을 감내했다. 임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강남을 떠돌던 시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서하집(西河集)≫에는 현실적 관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시(詩)와 산문(散文)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불우한 문인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현실을 거부할 수도 잊을 수도 없기에, 시문(詩文)은 강렬한 현실 지향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특히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도 타락한 현실을 비판한 강렬한 의식이 엿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멤버 중에 이인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서하집(西河集)≫은 임춘의 불우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대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 또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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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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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9년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1579년 아버지가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는데 다음 해에 아버지가 상주 객관에서 죽었다. 1582년 작은형을 찾아온 시인 이달을 처음 만났고 이달은 나중에 그의 스승이 되었다. 1588년 작은형이 죽고, 1589년에 누이 난설헌이 죽은 후에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강릉에 도착했고, 사천 애일당 외가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蛟山)이란 호를 썼다. 1593년에《학산초담》을 지었고, 1596년 강릉부사였던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1598년 중국의 장군과 사신들을 접대하느라고 돌아다녔다. 중국의 종군문인 오명제에게 《조선시선》을 엮어주었으며, 《난설헌집》 초고를 중국에 전파케 했다. 10월 13일, 다시 병조좌랑이 되어 가을에 평안도를 다녀왔다. 1599년 황해도사가 되었는데, 기생을 너무 많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11년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 도착해서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왔다. 1612년 8월 9일, 큰형 허성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벗 권필이 광해군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매맞아 죽었다.
1615년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다.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이때
다녀온 기록을 《을병조천록》으로 남겼다. 1618년 봄, 스승 이달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다. 윤4월 7일, 남대문에다 백성들을 선동하는 흉서를 붙인 심복 하인준이 잡혀들어갔다. 17일에 허균도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의 심복들이 허균을 탈옥시키려고 감옥에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 22일에 광해군이 친히 허균의 심복들을 국문하였다. 이이첨은 망설이는 광해군을 협박하여 허균의 처형을 서둘렀다. 허균은 결안도 없이 8월 24일에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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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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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에 태어나서 1692년까지 살았다. 명문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대사헌과 대제학 들을 지낸 문신이자 소설가다. 서인의 핵심 인물로 남인과의 당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했다. 기사년에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나던 일로 남해에 귀양 가 그곳에서 쉰여섯 살로 죽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여러 문학작품을 썼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도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제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데, 그것이 제아무리 비슷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을의 나무하는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들이 흥얼거려 서로 화답하는 소리가 비록 비속하다고 하나 참과 거짓을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시부 따위와는 결코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라며 우리말 우리글로 된 문학을 높이 쳤다. 그리고 진수의 《삼국지》를 읽고 운 사람은 없으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고는 사람들이 운다면서 소설의 힘을 역사책보다 앞세웠다.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고, 악부와 가곡도 지었다면 전하며, 평론집 《서포만필》과 문집 《서포집》이 전한다. 한글 소설을 여러 편 썼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남아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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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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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이다. 1320년 이제현이 주관한 과거에 합격해 좌주(座主), 문생(門生) 관계를 맺고, 1332년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후 평생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했다. 고려에서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고려 말의 정치가 및 문호로 유명한 이색(李穡)이 그의 아들이다.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보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는 등 역사서의 편찬에도 깊이 관여했다. 문집으로 『가정집(稼亭集)』이 전한다. 『동문선』에 상당한 시문이 선발되었으며,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체(假傳體) 「죽부인전(竹夫人傳)」은 특히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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