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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옛 선비 33인이 쓴 문학과 예술론)

김시습, 김려, 김정희, 박제가, 박지원, 서거정, 성현, 신흠, 유몽인, 이규보, 이덕무, 이익, 이인로, 이제현, 임춘, 정약용, 최자, 허균, 홍대용, 홍양호, 김만중, 신재효, 홍석주, 김창협, 이수광, 조수삼, 최행귀 (지은이), 류수, 리철화 (옮긴이)
보리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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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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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옛 선비 33인이 쓴 문학과 예술론)
· 분류 : 국내도서 > 고전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84282339
· 쪽수 : 479쪽
· 출판일 : 2006-04-20

책 소개

향가의 탁월함을 주장한 최행귀에서부터 판소리 광대의 미학 세계를 밝힌 신재효까지,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옛 작가 33인이 쓴 글 중에서 문학론, 음악론, 미술론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들을 가려 뽑아 엮었다. 작품 비평, 메타 비평, 미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견해까지 아우르는 글들을 통해 당대 조선의 개성 있는 문학과 예술을 실현시키고자 한 문인들의 의지를 만나볼 수 있다.

목차

겨레고전문학선집을 펴내며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과 같아 눈이 있는 자는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시를 짓기는 어렵지 않으나 시를 알기는 어렵다
시가 생활을 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궁하기 때문에 그의 시가 이러한 것이다
참다운 시는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낸다
새매의 눈으로 시대를 노래하라

부록
- 고전 작가들의 미학 사상에 대하여 /신구현
- 원문
- 찾아보기

저자소개

김시습 (지은이)    정보 더보기
1435~1493.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청한淸寒),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반궁(泮宮) 북쪽의 초가집에서 부친 김일성(金日省)과 모친 울진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9년(세종 21), 5세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으로 찾아와 김시습의 시재(詩才)를 확인하였고, 이후 조정의 고관들이 김시습을 보기 위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김시습이 ‘오세신동’으로 불린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1443년(세종 25), 9세 무렵 세종이 승정원 승지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 그 재능을 확인케 했는데, 김시습은 박이창 면전에서 시구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세종은 박이창을 통해 김시습에게 금포(錦袍: 비단 도포)를 하사하고 ‘훗날 이 아이를 크게 쓰겠다’는 말을 전한다. 1455년(단종 3, 세조 1),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3일을 나오지 않다가 홀연 통곡하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 후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가 달아났다. 이후 삭발한 후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였다. 1463년(세조 9), 29세 때,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우거하였는데, 이후 1467년경,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것으로 보인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환속했지만, 성종이 계비(繼妃) 윤씨를 폐비(廢妃)하고 사사(賜死)하는 사건을 보고 2년 만에 다시 승려의 복장을 하고 관동으로 향했다. 1493년(성종 24), 59세 때 「자사진찬」(自寫眞贊)을 짓고, 곧바로 이 해 2월,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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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 (원작)    정보 더보기
호는 담정(藫庭)이다. 1797년 겨울 강이천의 비어사건에 휘말려 함경북도 북동부 부령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 시 천주교도와 친분을 맺은 혐의로 체포되어 혹독한 문초를 당한 후 1801년 4월 우해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동시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 선생(1758~1816)이 실학자적 관점에서 1814년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면 담정은 감수성 넘치는 시인의 시각으로 바다생물을 관찰하고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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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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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 실학자로, 18세기 북학파의 거장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규장각을 세우자 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검서관이 되었다. 이후 생애의 대부분을 검서관으로 봉직하며 국왕의 저술과 언론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북학의』를 저술했고, 세 번 더 북경을 여행하여 많은 중국 관료나 학자와 교유했다. 1800년 정조의 사망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고, 1801년 윤가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저서로 『북학의』와 『정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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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탁월한 문장가이자 실학자다. 박사유(朴師愈)와 함평(咸平) 이씨(李氏)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 갔다. 청년 시절엔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해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영조 47년(1771) 마침내 과거를 보지 않기로 결심하고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면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을 비롯한 많은 젊은 지식인들과 더불어 학문과 우정의 세계를 펼쳐 갔다. 정조 2년(1778)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벽파를 박해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있는 연암협(燕巖峽)으로 피신해 은둔 생활을 했다. 연암이라는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정조 4년(1780)에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연행(燕行) 권유를 받고 정사의 반당 자격으로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건륭 황제가 열하에서 고희연을 치르는 바람에 조선 사신 역사상 처음으로 열하에 가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행을 통해 깨달음을 확대한 연암은 여행의 경험을 수년간 정리해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정조 10년(1786) 유언호의 천거로 음사(蔭仕)인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정조 13년(1789)에는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와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했고, 정조 15년(1791)에는 한성부 판관을 지냈다. 그해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쓴 연암을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실제로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년(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시절에 정조 임금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지어 바쳐 칭송을 들었다.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했으며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순조 5년(1805) 10월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되 법도를 지키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지향했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연암의 학문적 성취와 사상은 《열하일기》에 집대성되어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용후생의 정신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연암은 《열하일기》 외에도 《방경각외전》, 《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등을 직접 편찬했다. 연암의 유고는 그의 아들 박종채에 의해서 정리되었는데 아들이 쓴 〈과정록추기〉에 의하면 연암의 유고는 문고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 15권 등 총 55권으로 정리되었다. 《열하일기》는 오늘날 완질은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암의 작품은 대부분이 문(文)이며 시(詩)는 50여 편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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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세종 2년에 태어나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으로 불렸다. 목사를 지낸 달성 서씨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세종 20년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폭이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 사부로 보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문장을 대륙에까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성종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깊이 관여하였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오래도록 겸하면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45년간의 관직생활 동안 절반이나 문형을 관장할 정도였다. 아울러 전후 23 차례에 걸친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수많은 인재를 그의 손으로 뽑았다. 학풍과 사상은 조선 초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대신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전적들을 편찬할 때는 신진 사림계의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세상에 전한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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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셋째 아들이다.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齋)·허백당(虛白堂)·부휴자(浮休子)·국오(菊塢), 시호는 문대(文戴)다.1462년(세조 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해 박사(博士)로 등용되었다. 이어 사록(司錄) 등을 거쳐 1468년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을 지냈다. 맏형 임(任)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 때 지은 기행시를 정리해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이 왔는데 이들과 시를 주고받아 그들을 탄복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예조판서에 올랐다.연산군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다. 죽은 지 수개월 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음률(音律)에도 밝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고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악학궤범≫을 편찬해 음악을 집대성했다. 뿐만 아니라 왕명으로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을 개산(改刪)했다. 대표 저술인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문화·제도·풍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허백당집≫, ≪풍아록≫, ≪부휴자 담론≫, ≪주의패설(奏議稗說)≫, ≪금낭행적(錦囊行跡)≫, ≪상유비람(桑楡備覽)≫, ≪풍소궤범≫, ≪경륜대궤(經綸大軌)≫, ≪태평통재(太平通載)≫ 등 많은 저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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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566~162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다. 선조대에서 인조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조선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성리학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과 노장 사상 등 비주류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사상적 대안을 모색하였다. 만물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관점을 지녀 다양한 색깔의 글을 남긴바, 그의 글은 주제가 호한하면서도 자유롭고 섬세한 감성을 보여 준다. 호는 상촌이며, 문집으로 <상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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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조 중기의 문장가. 자는 응문應文이고 호는 어우於于, 간암艮庵, 묵호자默好子이다.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아들 '약' 과 함께 처형당했다가 1794년(정조 18년) 신원되었다. 시호는 의정義貞. 그의 문장은 제재와 구상이 독창적이고, 의경이 참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 <어우집>이 있으며, 야담집 <어우야담>은 수필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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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무인정권 시기의 문신. 본관은 황려(黃驪). 첫 이름은 인저(仁氐)였는데 스물두 살 때 과거를 앞두고 꿈에 규성(奎星)을 만난 뒤 규보로 개명했다. 별명이 여럿 있는데 부친을 잃고 개경의 천마산에 우거하면서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불렀고, 노년에는 시, 거문고, 술을 미칠 정도로 좋아한다는 뜻인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으로 불리기도 했다. 흥이 나서 사물에 감각이 열리면 시벽(詩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병적으로 시를 썼다. 별명이나 시벽에서 알 수 있듯이 낭만적 기질이 농후한 시를 썼고 그런 삶을 살았다. 스물 둘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진사시에 들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마흔에 최충헌의 모정에 불려가 「모정기(茅亭記)」를 지은 뒤 벼슬길이 열려, 일흔에는 최고위직인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다. 문집으로 아들 이함이 편찬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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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후기 『관독일기』, 『편찬잡고』, 『청비록』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41년(영조 17)에 태어나 1793년(정조 17)에 사망했다. 독학으로 경서와 사서 및 고금의 기문이서에 통달했다. 문장도 뛰어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북학파 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했고 중국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해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서 청의 문물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오고 고증학 관련 책들도 들여왔다. 서자여서 크게 중용되지 못했으나 규장각 검서관으로서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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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익 (1681년 10월 18일~1763년 12월 17일, 숙종 7~영조 39)조선의 17, 8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학자이다. 정치·경제·사상사 분야에서 거대한 업적을 이루어 당대부터 지금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된다. 탈주자학적인 수사학洙泗學적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을 추구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선의사회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고자 하는 개혁적인 것이었다. 그는 학문의 중심을 전통적인 경학經學에 두었지만, 현실에 보다 긴요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학문 경향과 업적에 따라 성호를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이자 중농학 파의 거성으로 규정한다. 성호의 학문은 이후 윤동규·안정복·신후담·이병휴 등에게 이어졌고, 그의 학통은 권철신·이중환·채제공·정약용·이가환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윤동규는 지리, 안정복은 역사, 신후담은 수학, 이병휴는 경학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다. 성호는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다양한 저서로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과 『곽 우록藿憂錄』·『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성호사설星湖僿說』·『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이자수어李子粹語』 그리고 『사서삼경四書三經』·『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의 질서疾書 등이 있다. 또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세상에 떠도는 속담을 모아 정리하고 풀이를 덧붙인 속담집 「백언해百諺解」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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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152년, 고려 왕조 500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많던 시기에 태어난 관료이자 시인. 처음으로 시평을 써서《파한집》이라는 시평집을 내놓은 사람이다.《파한집》은 이인로의 설화 문학집으로, 저자가 죽기 직전에 지은 작품을 사후 40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이세황이 간행한 것이다.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18세 때 무신 반란인 정중부의 난을 맞고, 이 계기로 이인로는 중이 된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뒤, 정중부 일당이 숙청되자 그는 환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저서로 《파한집》3권, 《은대집》20권, 《후집》4권, 《쌍명재집》3권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파한집》3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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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초명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와 역옹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잘 지었는데,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서 과거에 합격했다.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과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1311년(충선왕 3)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렀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원나라에서 머물렀는데,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아미산(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3개월 동안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로 원나라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간 충선왕을 모셨다. 세 번째는 그가 고려로 돌아온 이후인 1323년의 유람이다. 1320년 충선왕이 참소로 토번으로 유배되자 이제현은 직접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으며 이에 충선왕은 좀 더 가까운 유배지인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졌는데, 이때 충선왕을 만나러 다녀왔다. 이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1324년 밀직사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재상인 조적(曹)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진압했지만 잔당의 무고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몇 년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며 ≪역옹패설≫을 저술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개혁안을 제시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은 뒤 원나라로 가서 왕기(王祺 :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이후 계속 사임과 등용을 반복하다가 1357년에 사임을 허락받았으며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청주까지 공민왕을 호종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1367년 8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했고, 만년에는 ≪국사(國史)≫ 편찬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그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했기 때문에,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대처를 잘해 화를 입거나 유배를 당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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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후기로 넘어가는 의종(毅宗)·명종(明宗) 연간 인물로,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다. 생몰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종 연간에 태어나 40세 가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래 30세까지 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40세에 귀밑털이 희다고 하는(四十龍鍾兩鬢華) 자신의 기록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임춘은 관직(官職)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유학의 본령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현실을 감내했다. 임춘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문학을 통해 표출하는 것뿐이었다. 주로 강남을 떠돌던 시절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존하는 ≪서하집(西河集)≫에는 현실적 관심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 시(詩)와 산문(散文)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불우한 문인으로 전락했지만 결코 현실을 거부할 수도 잊을 수도 없기에, 시문(詩文)은 강렬한 현실 지향적인 특징을 보여 주며, 특히 가전체 소설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도 타락한 현실을 비판한 강렬한 의식이 엿보인다.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멤버 중에 이인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는 작품이 없는 점을 감안하면 ≪서하집(西河集)≫은 임춘의 불우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신의 난을 전후한 시대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 또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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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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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명종(明宗) 18년(1188)에 태어나서 원종 1년(1260)에 세상을 떠난 학자이자 관료요 시인이다. 최자의 첫 이름은 종유(宗裕) 또는 안(安)이고, 자는 수덕(樹德), 호는 동산수(東山?)다. 본관은 해주(海州)로서 문헌공(文憲公) 최충(崔?)의 후손이며, 시호(諡號)는 문청(文淸)이다. 최자는 대내적으로는 고려 왕조가 혼미를 거듭하고 무신 정권이 전횡을 부리던 시기, 대외적으로는 몽골의 7차 침입(1231∼1258)이 있었던 격동의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이다. 명문 집안 출신으로 이규보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출세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이런 인연으로 최자의 문학은 이규보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특히 최자는 이규보의 ‘창출신의(創出新意)’의 창조적 문학론에 뜻을 같이했던바, ≪보한집≫에서 자주 이규보를 극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렇듯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는 최자는 한국 문학사상 이인로와 함께 문학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별히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로서 무엇보다 한시 비평에 해당하는 시화류 ≪보한집≫을 남긴 인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저명한 대학자인 최충의 후손으로서 관직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입전(立傳)이 되기도 했다. 최자의 가문은 최충 이후로 세 명의 장원(壯元)과 세 명의 상국(相國), 네 명의 공신을 배출한 명문 귀족으로, 최자 또한 ≪보한집≫에 증조부 최약(崔?)이 유배를 가면서 남겨 놓은 시 <출수춘주화인증별(出守春州和人贈別)>을 실은 것으로 보아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고려 시대에 배출된 수많은 문인·학자들의 문집을 두루 섭렵하지 않고서는 ≪보한집≫에 나타나고 있는 그 시대의 사회 상황과 문학적 성격을 바르게 진단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자는 독서량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풍부한 독서량과 깊이 있는 시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최자는 ≪보한집≫을 통해 문학의 본질이 무엇이고, 문인들의 자질이 얼마나 중요하며, 창조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가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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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569년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건천동에서 자랐다. 1579년 아버지가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는데 다음 해에 아버지가 상주 객관에서 죽었다. 1582년 작은형을 찾아온 시인 이달을 처음 만났고 이달은 나중에 그의 스승이 되었다. 1588년 작은형이 죽고, 1589년에 누이 난설헌이 죽은 후에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된 아내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강릉에 도착했고, 사천 애일당 외가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애일당이 있는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蛟山)이란 호를 썼다. 1593년에《학산초담》을 지었고, 1596년 강릉부사였던 정구와 함께 《강릉지》를 엮었다. 1598년 중국의 장군과 사신들을 접대하느라고 돌아다녔다. 중국의 종군문인 오명제에게 《조선시선》을 엮어주었으며, 《난설헌집》 초고를 중국에 전파케 했다. 10월 13일, 다시 병조좌랑이 되어 가을에 평안도를 다녀왔다. 1599년 황해도사가 되었는데, 기생을 너무 많이 데리고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11년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에 도착해서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다. 11월에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왔다. 1612년 8월 9일, 큰형 허성이 죽었고 가장 가까운 벗 권필이 광해군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가 매맞아 죽었다. 1615년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다. 동지겸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이때 다녀온 기록을 《을병조천록》으로 남겼다. 1618년 봄, 스승 이달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다. 윤4월 7일, 남대문에다 백성들을 선동하는 흉서를 붙인 심복 하인준이 잡혀들어갔다. 17일에 허균도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혔다. 그의 심복들이 허균을 탈옥시키려고 감옥에 돌을 던지며 시위하였다. 22일에 광해군이 친히 허균의 심복들을 국문하였다. 이이첨은 망설이는 광해군을 협박하여 허균의 처형을 서둘렀다. 허균은 결안도 없이 8월 24일에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에서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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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북학파의 선구자 혹은 과학사상가로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지전설을 주창한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태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를 보장받는 가문 출신이지만,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하여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2세에 석실서원에 들어가 23년간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원행 아래에서 수학하였으며, 천문학·수학·역산학·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의 일생에서 가장 전환점이 된 사건은 중국 연행이다. 1765년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불멸의 명저 『의산문답』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후 쓴 책이다. 40대에 들어서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고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7개월 동안 세자익위사에서 근무하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계방일기』라는 글을 남겼다. 어머니의 병을 구실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홍대용은 1783년 10월 2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꼭 52년하고도 7개월 남짓의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홍지弘之라 했고, 자는 덕보德保, 당호로는 담헌湛軒을 썼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문집은 『담헌서湛軒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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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24(경종4)~1802(순조2). 본관은 풍산(豐山), 초명은 양한(良漢), 자는 한사(漢師), 호는 이계(耳溪),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홍진보(洪鎭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숙인 저촌(樗村) 심육(沈錥)에게 수학(受學{)하였다. 24세(1747, 영조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1752, 영조28)에 문과 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였다. 내외의 관직을 두루 거쳐 70세(1793, 정조17)에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차례 대제학을 맡아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59세(1782, 정조6)에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 71세에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하고 제자(諸子)를 참작하여 순정하고 웅혼하며 법도가 구비되어 있다는 평을 얻었는데 이는 시속(時俗)에 구애받거나 수식을 일삼는 것 없이 자연스러운 인심의 발현을 주장한 천기론(天機論)으로 발현된다. 또한 청(淸)나라 기윤(紀昀)으로부터 화평하고 온유하여 기교와 수식이 없고 국계와 민생을 항상 잊지 않아 음풍농월(吟風弄月) 하는 기습이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국토와 백성의 현실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민요나 설화 등 민족 문학의 성취를 수용한 성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정조 중흥기에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와 문학 양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관인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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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 (지은이)    정보 더보기
1637년에 태어나서 1692년까지 살았다. 명문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대사헌과 대제학 들을 지낸 문신이자 소설가다. 서인의 핵심 인물로 남인과의 당쟁에 휘말려 여러 차례 유배 생활을 했다. 기사년에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나던 일로 남해에 귀양 가 그곳에서 쉰여섯 살로 죽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여러 문학작품을 썼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도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제 말을 버리고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있는데, 그것이 제아무리 비슷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을의 나무하는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들이 흥얼거려 서로 화답하는 소리가 비록 비속하다고 하나 참과 거짓을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시부 따위와는 결코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라며 우리말 우리글로 된 문학을 높이 쳤다. 그리고 진수의 《삼국지》를 읽고 운 사람은 없으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읽고는 사람들이 운다면서 소설의 힘을 역사책보다 앞세웠다.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썼고, 악부와 가곡도 지었다면 전하며, 평론집 《서포만필》과 문집 《서포집》이 전한다. 한글 소설을 여러 편 썼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남아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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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 판소리 연구가다.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출생했다.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지냈다. 동리 신재효 선생은 중인(中人)에 천석꾼의 재산을 이룬 사람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전부터 전해오던 판소리 《춘향가(春香歌)》 남창(男唱)·동창(童唱), 《심청가(沈淸歌)》, 《박타령》, 《토별가(兎鼈歌)》, 《적벽가(赤壁歌)》, 《변강쇠가》의 여섯 작품을 새롭게 개작(改作)했다. 그 전에 광대들이 만든 거칠고 발랄한 판소리 사설(辭說)을 중인의 시각에서 좀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재구성했다. 이로써 판소리가 상민(常民) 예술에서 벗어나 중인 이상 양반도 즐길 수 있는 민족 문학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동리 신재효 선생은 또 판소리의 이론적 체계도 모색하여 《광대가(廣大歌)》를 지어 인물·사설·득음(得音)·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했다. 그는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短歌) 또는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짧은 노래도 지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景福宮)을 중수하고 낙성연(落成宴)을 할 때, <경복궁타령>, <방아타령> 등을 지어 제자 진채선(陳彩仙)에게 부르게 하여,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동리 신재효 선생은 오늘날 판소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분이다. 그래서 ‘한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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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영조 50년(1774)에 태어나 현종 8년(1842)에 숨졌다. 22세(정조 19)에 식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에 제수되면서 벼슬길에 나섰다.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42세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고, 58세에는 사은사의 정사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61세(순조 34)에 의정부 좌의정이 되었다. 63세(현종 2)때는 남응중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삭출되었다가 66세에 대왕대비의 특지로 방석되었다. 그후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 장단의 모사와 양주의 광진으로 은거하였다. 남긴 책으로는 <속사략익전>, <예기집설지의>, <학강산필>, <초계고식>, <대역상전>, <명사관견>, <속명사관견>, <독역잡기>, <휘사소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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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본관은 安東, 자는 仲和, 호는 農巖이다. 1682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조 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부친 金壽恒(1629~1689)이 기사환국으로 인해 사사된 이후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여 노론 洛論系의 宗匠이 되었다. 문학적으로는 韓歐正脈을 표방하여 당시 조선 문단의 의고주의적 문풍에 변화시킨 대표 문인이다. 그의 문집으로 『農巖集』이 전하며, 이외에 학습서인 『八大家門十選』 등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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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자는 지원(芝園), 호는 추재(秋齋) 또는 경원(經畹)이다. 1844년 82세의 나이로 소과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삶은 연행, 유람 그리고 시작(詩作)으로 일관되었다. 벼슬을‘멀리 한’ 교유의 폭은 매우 넓었다. 여항시인들과 교유뿐만 아니라 특히 추사 김정희(1786~1856), 운석 조인영 (1782~1850) 등과 친밀한 관계는 그의 명성을 더욱 끌어 올렸다. 한 마디로 추재의 삶은 더 넓은 세계로 여행을 꿈꾼 ‘천재적인’ 예술가의 여정이었다. 저서로 『추재집(秋齋集)』 8권을 남겼다. 여기 다룬「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는 그‘여정’의 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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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행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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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 (옮긴이)    정보 더보기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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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철화 (옮긴이)    정보 더보기
<우리 겨레의 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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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자기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법
저 자구가 우아하다 비속하다 평하고 문장이 높다거니 낮다거니 의논하는 무리는, 모두 구체적 경우에 따라 전법이 변해야 하고 그 경우에 타당한 변통성에 의해서 승리가 얻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 그렇기 때문에 글 짓는 사람의 걱정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 길을 잃어버리고 요령을 잡지 못하는 데 있다. 길을 잃어버리고 나면 글자 한 자도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붓방아만 찧게 되며 요령을 잡지 못하면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해 놓고서도 오히려 허술치 않은가 겁을 내는 것이다. ―본문 278쪽 "몇 백 번 싸워 승리한 글(박지원)" 중에서


민간 예술의 떠오름
오직 입에서 부르는 대로 곡조를 이루었어도 사연은 마음 그대로 우러나온 것이고 꾸미지 않고도 진실한 내용이 흘러나왔다면 초동과 농부가 부르는 노래라도 자기 심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도리어 사대부들이 고루한 형식에 매달려서 글자만 옛것대로 꾸며 놓아 시가의 본뜻에서 어긋난 것보다는 낫다.

그러므로 노래를 진실로 잘 아는 자는 누가 부르는지에 매이지 않고 노래에 담긴 뜻을 잘 헤아리니, 풍요가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동시켜 백성을 고무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뜻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다른 사물에 비유하거나 딴 말을 빌려 오는 뜻과, 그릇된 현실을 근심하고 진실한 옛것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혹시 어진 선비들의 입에서 불린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뜻이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담길 것이다. ― 본문 221~222쪽 "<대동풍요>를 펴내며(홍대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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