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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

고대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

조원진, 김진한, 이종록, 홍성화, 박재용, 김희만, 최희준, 임상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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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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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고대사회에도 쿠데타가 있었는가?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고대~고려시대 > 한국고대사 > 한국고대사 일반
· ISBN : 9791193933053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5-01-03

책 소개

조선부터 발해까지 한국 고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쿠데타(정변)’라는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고대사의 권력 전복 과정의 맥락을 톺아 봄과 동시에 그것이 오늘 우리 사회에 주는 교훈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목차

책을 내면서
위만의 정변과 위만조선 건국
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과 역사적 의미
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
『일본서기』에 보이는 백제의 정변에 대한 고찰
백제 초기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상대의 왕위계승과 정변
신라 하대의 쿠데타와 대외교섭
발해 역사의 변혁

참고문헌
그림목록

저자소개

임상선 (지은이)    정보 더보기
대구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중국 정사(正史)의 발해 기록 검토」(『역사교육논집』 84, 2023), 「17~18세기 조선의 발해사 저술에 인용된 중국 사료」(『역사와교육』 37, 2023), 『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21, 동북아역사재단, 2021), 『발해사 바로읽기-발해사 쟁점과 연 구』(도서출판 동재, 2008) 등이 있다. 이 글은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NRF-2022S1A5B5A16056388)로서 「발해 역사 속의 변혁(變革)의 순간들」(『한국고대사탐구』 46)을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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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화 (지은이)    정보 더보기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石上神宮 소장 七支刀의 신해석에 대한 추가 쟁점 연구」(『백제연구』 78, 2023), 「隅田八幡神社(스다하치만신사) 인물화상경에 대한 일고찰」(『한국고대사탐구』 43, 2023), 『왜 5왕: 수수께끼의 5세기 왜국 왕』(살림출판사, 2019), 『칠지도와 일본서기: 4~6세기 한일관계사 연구』(경인문화사, 2021), 『일본은 왜 한국역사에 집착하는가』1,2(시여 비, 2023, 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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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고대 한류 열풍의 중심시 아스카(飛鳥)』(공저, 주류성, 2021), 「백제의 對倭교섭과 航路」(『백제 학보』 19, 백제학회, 2017), 「일본 사료로 본 백제 熊津시기 왕계」(『한일관계사연구』 61, 2018), 「백제의 史書 편찬」(『한국고대사탐구』 40,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2), 「웅진기 백제와 왜국의 교류」(『한국고대사연구』 115, 한국고대사학회, 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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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한 (지은이)    정보 더보기
경북대학교 사학과 강사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고구려 후기 대외관계사 연구』(한국 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 「8세기 신라의 대발해(對渤海) 인식 변화와 그 배경: 북적(北狄)에서 북국(北國)으로」(『한국학』 171, 2023), 「무왕대 발해·당 전쟁에 대한 재인식」(『한국문화』 99, 2022), 「1~4세기 고구려 대왜인식의 형성과 변화-동아 시아 국제정세의 변동과 관련하여」(『국학연구』 48,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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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만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강대학교 디지털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신라의 왕권과 관료제』(경인문화사, 2019), 『신라사의 재구성』(경인문화사, 2019), 「한국사 디지털 자료의 활용 현황과 과제」(『한국사학사학보』 48, 2023), 「『연경재전집』의 辨·跋·筆記類를 통해 본 한국고대사의 신자료 발굴」(『국학연구』 52, 2023), 「『삼국유사』의 편목과 일연(一然)의 신라 불교 인식」(『한국사상사학』 73, 2023), 「신라의 ‘水旱之災’와 국가의 대응 전략」(『신라사학보』 56, 2022), 「『연경재전집』의 지리 류(地理類)와 한국고대 영토 인식」(『동북아역사논총』 77,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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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진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양대학교 ERICA 문화재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고조선의 네트워크와 그 주변 사회』(공저, 주류성, 2022), 「위만조선-漢나라의 전쟁 양상」(『군사』 118, 2021), 「고조선 중심지의 변천을 바라보는 최근 시각」(『선사 와 고대』 72, 2023), 「기자동래설의 성립 과정에 대한 검토」(『한국고대사연구』 109, 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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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록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高句麗와 玄菟郡의 관계와 幘溝漊설치 배경 검토」(『선사와 고대』 55, 2018), 「1~3세기 고구려의 두만강 유역 지배방식과 柵城」(『역사와 현실』 116, 2020), 『한사군 연구』(공저, 서경문화사, 2022), 「3~4세기 숙신의 성장과 고구려」(『고구려발해연구』 76, 2023), “A Reconsideration of the Account of the Lelang Kingdom (樂浪國) in Samguk Sagi”(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9-2, 202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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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준 (지은이)    정보 더보기
가천대학교 강사이다. 저서 및 논문으로 「上太師侍中狀」의 ‘太師侍中’과 최치원의 재입당 사행항로」(『탐라문화』 74, 2023), 「644년 당의 대고구려전 파병 요구와 신라의 대응」(『신라사학보』 54, 2022), 「7세기 후반 신라의 영접의례 구성 -당·일본 과의 비교를 중심으로-」(『신라문화』 59, 2021), 「최치원의 사행과 재입당 시점 재고 -「旅遊唐城贈先王樂官」의 분석을 중심으로-」(『사학연구』 143, 2021), 「621년 나당수교와 그 전개 양상」(『신라사학보』 52,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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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위만이 고조선을 무너뜨린 것은 기원전 195년에서 오래되지 않은 시점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위만이 정변 때 한나라가 10도로 나누어 쳐들어온다고 할 수 있는 주발이 연 지역을 평정하던 기원전 195년 말~194년 초 사이로 보기도 한다. 주발의 군대가 물러간 다음에는 허위 보고가 통할 수 없기에 위만의 정변 시기를 이 시기로 한정해 보는 것이다. 위만의 정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서는 위만조선이 성립하고 한나라와 맹약을 맺은 시기가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라는 사실이다. 『사기』에서 ‘효혜고후시’는 혜제(惠帝)의 재위기간인 기원전 194~188년에만 나타나는 용법이다. 따라서 위만의 정변은 기원전 188년 이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특히 요동태수가 연왕을 거치지 않고 맹약을 맺었다는 점에서 연왕이 연소(年少)한 시기이고 한나라가 대외적으로 안정된 시기인 혜제 3~4년인 기원전 192~191년으로 좁혀서 이해하기도 한다. 위만이 이 시기에 한나라와 외신관계를 맺었다면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은 늦어도 기원전 191년일 것이다. 따라서 위만이 노관의 반란 시점에 망명했다면 불과 1~4년 사이에 고조선이 멸망하고 위만조선이 성립한 것이다.
_<위만의 정변 과정과 위만조선 건국> 중


정변의 명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며, 유리왕은 선대왕과 혈연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칼’을 들었다. 이는 주몽이 활을 통해 송양을 제압해 나가는 ‘무력’과도 통한다. 즉, 신성한 천손이라는 혈연성과 ‘활과 칼’이라는 무력 두 가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왕실의 권위와 현실적 힘, 두 가지를 갖춰 나가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민중왕 대부터 정변의 명분으로 ‘유소’, ‘노쇠’, ‘폭정’, ‘과도한 수취와 노역’ 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점차 통치 대상인 백성을 향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 마디로 초기에 신화에 가탁하거나 자격을 논했지만 이후 점차 민생 등 현실 문제로 이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후기에는 명분을 특정하기 어렵다. 정변 주도 세력이 바뀌어 가는 모습도 어렴풋이 확인된다. 전기에는 혈연을 매개로 한 족적(族的) 기반이 강했다. 차대왕 대는 관나·환나·비류나 등 다수 부세력들이 결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신대왕 대는 지인(至仁)의 가치를 언급하고 있는데, 사상적으로 이를 따르는 세력과 연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국천왕 대 신진인사인 을파소의 국상 임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했다.
_<고구려사에 보이는 ‘정변(政變)’과 역사적 의미> 중


따라서 어느 사회든 국왕의 계승관계란 기본적으로 수직적인 승계가 특정 시점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세대계승’의 가능성은 향후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고구려에서도 빈번한 형제계승의 사례만을 근거로 초기에 부자계승의 원칙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기본적인 원칙이었으며, 형제간의 계승은 당대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초기에 유독 형제계승이 빈번했던 별도의 사회적 배경을 가정하고 이를 추적하는 것이 고구려의 왕위계승에 대한 좀 더 안전한 접근 방식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구려 초기 형제계승을 정당화하는 사례, 즉 아들이 있었는데도 형제간의 계승을 우선시했던 사례를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서 전하는 형제간의 계승은 민중왕의 사례만 제외하면 모두 사료 내에서는 납득할 만한 배경에 제시되고 있었다. 예컨대 산상왕 같은 경우 고국천왕이 자식이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즉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_<고구려 차대왕의 정변과 초기 왕위계승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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