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주머니 속의 작은 문학 도서관

주머니 속의 작은 문학 도서관 (전16권, 예쁜 수첩「TODAY'S NOTE」별도 포함)

(오늘의 책 16종 세트)

김구, 김동인, 김유정,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리처드 바크, 막스 뮐러, 미겔 데 세르반테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이효석, 제인 오스틴, 칼릴 지브란, 현진건 (지은이), 윤영, 김홍기 (엮은이)
오늘의책
70,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63,000원 -10% 0원
3,500원
59,50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주머니 속의 작은 문학 도서관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주머니 속의 작은 문학 도서관 (전16권, 예쁜 수첩「TODAY'S NOTE」별도 포함) (오늘의 책 16종 세트)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88977182967
· 쪽수 : 200쪽
· 출판일 : 2007-04-30

책 소개

이효석, 김유정, 현진건, 김동인, 김구, 생텍쥐페리, 톨스토이, 제인 오스틴, 세르반테스, 칼릴 지브란, 막스 뮐러, 리처드 바크 등 국내외 문인들의 문학 작품 16권을 모았다. 핸디북사이즈로, 16권의 문학 작품과 함께 'Today's Note' 수첩이 제공된다.

목차

1) 국내문학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외》
메밀꽃 필 무렵, 돼지, 수탉, 산, 들, 분녀, 석류, 향수
-김유정의 《봄봄 외》
금 따는 콩밭, 봄봄, 솔, 산골, 떡, 만무방
-김유정의 《동백꽃 외》
소낙비, 동백꽃, 총각과 맹꽁이, 금, 노다지, 야앵, 산골나그네
-현진건의 《빈처 외》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빈처, 타락자, B사감과 러브레터
-김동인의 《배따라기 외》
붉은 산,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 배따라기, 광화사, 태형, 광염소나타
-김구의 《백범일지》
-윤영의 《소중한 사람에게 주고 싶은 책》
-윤영의《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책》

2) 국외문학
-《탈무드》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
-톨스토이의《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세르반테스의 《세르반테스 아포리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막스 뮐러의《독일인의 사랑》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3) 예쁜 수첩 《TODAY'S NOTE》

저자소개

김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펼치기
김동인 (지은이)    정보 더보기
평양 진석동에서 출생했다. 평양숭덕소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도쿄 학원, 메이지 학원, 가와바타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전영택, 주요한 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발간하였다.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시작으로 「목숨」,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발가락이 닮았다」, 「광화사」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 혁신에 공헌하였다. 1923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 「광염 소나타」, 1932년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을 발표했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전념하다 마약 중독에 걸려 병마에 시달리던 중 1939년 ‘성전 종군 작가’로 황국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 불경죄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8년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과 단편 「망국인기」를 집필하던 중 생활고와 뇌막염, 동맥경화로 병석에 누우며 중단하고 1951년 6·25 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 하왕십리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펼치기
김유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탁월한 언어로 한국 문학사의 큰 발자취를 남긴 김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서 아버지 청풍 김씨 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 사이에서 이남 육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후 서울 종로구 운니동으로 가족 모두 이사를 오고 재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지만 중퇴한 후 고향 춘천 실레 마을로 내려가 금병의숙을 세워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금광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금광 생활에서 얻은 경험과 고향에서 보고 느꼈던 농촌 배경의 토속적 정취를 녹여낸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하고 채만식·박태원·이상 등과 교류 하며 〈금 따는 콩밭〉 〈노다지〉 〈금〉 〈떡〉 〈만무방〉 〈봄봄〉 〈안해〉 등 열한 편의 소설과 수필 세 편을 발표해 문단의 찬사를 받고 후기 구인회 동인으로 참여한 후 이태준, 이상과 깊은 친분을 쌓는다. 그는 이때쯤 치질과 늑막염이 악화한 상태로 병원에서 폐결핵 진단까지 받고 고통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 후 농촌에서 우직하고 순진하게 살아가는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 실상을 특유의 해학적 수법으로 표현한 단편 〈봄과 따라지〉 〈가을〉 〈두꺼비〉 〈봄밤〉 〈이런 음악회〉 〈동백꽃〉 〈야앵호〉 〈옥토끼〉 〈정조〉 〈슬픈 이야기〉와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 〈어떠한 부인을 마지할까〉 〈전차가 희극을 낳아〉 〈길〉 〈행복을 등진 정열〉 〈밤이 조금만 짤렀드면〉 등을 발표하고 미완의 장편 〈생의 반려〉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는 불과 이 년 남짓한 작가 생활 동안 삼십여 편의 단편과 한 편의 미완성 장편, 두 편의 번역 소설, 열두 편의 수필과 편지와 일기 여섯 편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이다 지병인 폐결핵에 시달리다 1937년 3월 29일 꽃다운 스물아홉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유해는 친구, 형제, 조카들에 의해 화장한 후 한강에 뿌려졌다.
펼치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28년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44년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나 대학 교육에 실망,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삼 년간 방탕한 생활을 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캅카스로 가서 군대에서 복무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유년 시절」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하여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록』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민담 22편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기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사유재산 및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영면하였다.
펼치기
리처드 바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영감으로 가득한 소설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의 저자. 5,000만 권이 넘는 책을 판매한 리처드 바크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로 남아있다. 예전에 미공군 전투기 조종사이자 공군 대위로 복무했으며, 최근까지도 활기차게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다. 앞으로도 조종사 겸 작가로서 비행의 기쁨과 자유를 탐색하고 기록할 예정이다.
펼치기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동양학자이다. 우리에게는 막스 뮐러라고 더 잘 알려져 있으며 《겨울 나그네》로 유명한 독일의 낭만파 서정 시인 빌헬름 뮐러의 아들이다. 처음에는 시인이나 음악가가 되고자 했으나 1843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베를린에서 셸링 아래에서 일을 하며 인도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라틴 어와 그리스 어, 산스크리트 어를 익혔다. 1846년에 산스크리트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겼다가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가 되어 평생을 성실한 학자로 살면서 비교언어학과 비교종교학의 과학적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막스 뮐러는 전 생애 동안 오직 한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작품이 바로 1866년에 발표한 《독일인의 사랑》이다. 이 작품은 그의 유일한 소설로, 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고전으로 남아 그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위대한 작품이 되었다. 물망초 같은 낭만적 사랑 이야기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이외에도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가》 《신비주의학》 《종교의 기원과 생성》등의 저서를 남겼다.
펼치기
미겔 데 세르반떼스 (지은이)    정보 더보기
1547년 9월 29일경 에스빠냐 마드리드 근교의 대학도시 알깔라 데 에나레스에서 태어났다. 1571년 튀르키예군에 대항한 레빤또 해전에 참전해 왼팔을 잃는 부상을 당한 뒤 이딸리아 각지를 여행했다. 1575년 귀국길에 마르세유 근방에서 튀르키예 해적들에게 사로잡혀 알제리에서 포로 생활을 했고, 1580년에야 에스빠냐 종교단체의 보상금 지원으로 석방됐다. 1584년 까딸리나 데 빨라시오스와 결혼하고 이듬해 1585년 첫 목가소설 『갈라떼아』를 출판했다. 1587년부터 무적함대의 보급공출 세무사로 일하던 중 1592년 무단으로 밀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1597년에는 세비야 은행이 파산하자 공금횡령죄로 수감되었다. 이때부터 『돈 끼호떼』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605년 『돈 끼호떼』 제1권을 출간했으며, 이후 『모범소설집』 1, 2(1613) 『성스러운 시단의 여행』(1614) 『돈 끼호떼』 제2권(1615) 등을 출간하며 죽는 날까지 창작열을 불태우다가 1616년 4월 22일 마드리드 중심가의 작은 집에서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펼치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    정보 더보기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시험에서 실패하고 미술학교 건축과에 들어갔다. 1921년 공군에 입대해 조종사 면허를 땄고, 1926년 라테코에르에 들어가 아프리카 북서부와 남대서양 및 남아메리카를 통과하는 우편비행을 담당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시험비행사, 에어프랑스의 홍보담당, <파리수아르 Paris-Soir> 기자로 일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시절 모습은 『어린왕자』의 주인공과 너무나 흡사하다. 굽슬굽슬한 갈색 머리털을 가진 소년 생텍쥐페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소한 일들을 경이와 찬탄으로 바라보았고, 유난히 법석을 떨고 잔꾀가 많은 반면, 항상 생기가 넘치고 영리했다. 감성이 풍부하고 미지에 대한 열정이 넘치던 그는 1917년 6월,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한 후 파리로 가서 보쉬에 대학에 들어가 해군사관학교 입학을 준비하였으나 구술 시험에서 떨어져 파리 예술 대학에 들어가 15개월간 건축학을 공부했다. 『어린 왕자』에 생텍쥐베리가 직접 삽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공부 때문이다. 자동차 회사, 민간항공 회사에 각각 근무하다가 에르 프랑스의 전신인 라테코에르 항공사에 입사하여 『야간 비행』의 주인공인 리비에르로 알려진 디디에도라를 알게 되고 다카르-카사블랑카 사이의 우편 비행을 하면서 밤에는 『남방 우편기』를 집필하였다. 1929년 아르헨티나의 항공사에 임명되면서 조종사로 최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야간 비행』를 집필했다. 1939년 육군 정찰기 조종사가 되었으며, 1940년 2차세계대전으로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자 미국으로 탈출했다. 1943년 연합군에 합류해 북아프리카 공군에 들어간 후 1944년 7월 31일 프랑스 남부 해안을 정찰비행하다 행방불명되었다. 2000년, 한 잠수부가 프랑스 마르세유 근해에서 생텍쥐페리와 함께 실종됐던 정찰기 P38의 잔해를 발견했고 뒤이은 2004년 프랑스 수중탐사팀이 항공기 잔해를 추가 발견했다. <남방우편 Courrier-Sud>(1929), <야간비행 Vol de nuit>(1931), <인간의 대지 Terre des hommes>(1939), <전투조종사 Pilote de Guerre>(1942), <어느 인질에게 보내는 편지 Lettre a un otage>(1943), <어린왕자 Le Petit Prince>(1943) 등을 썼다.
펼치기
이효석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한성사범학교 출신의 교사였던 아버지 이시후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일생의 벗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현민 유진오를 만나면서 그와 더불어 문학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경성제국대학에 함께 진학하여 더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그는 대학 재학 중인 1928년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진오 등과 함께 경향소설을 쓰며 동반자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이효석이 작품 세계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경성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할 무렵이었다. 이후 평양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안정된 집필 환경 속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고,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해마다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던 그는 1940년 아내와 아들의 잇단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잠시 만주 등지를 방랑하다가 돌아왔으며, 다시 창작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지만 뜻을 펼치기도 전에 1942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펼치기
제인 오스틴 (원작)    정보 더보기
1775년 12월 16일, 잉글랜드 햄프셔의 시골 목사인 아버지 조지 오스틴과 어머니 커샌드라 리 오스틴 사이의 6남 2녀 중 일곱 번째이자 둘째 딸로 태어났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영국 사회의 전환기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감정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그려낸 작가이다. 제인 오스틴은 무도회와 연애, 가족과 결혼 같은 소재를 통해 인간의 자존심, 편견, 이성, 감성, 그리고 사회적 위선을 재치 있게 드러냈다. 문체는 부드럽지만 결코 순응적이지 않았고, 풍자와 아이러니를 통해 여성의 내면과 사회적 위치를 정교하게 묘사했다. 남녀의 사회적 역할과 계급적 제약이 뚜렷했던 시대에 여성으로서 독립적인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오스틴은 생전 대부분의 작품을 익명으로 출간해야 했는데, 《이성과 감성》의 표지는 “어떤 숙녀에 의해(By a Lady)”로 되어 있었고, 《오만과 편견》은 “《이성과 감성》의 저자가 쓴(By the Author of Sense and Sensibility)”로 소개되었다. 그녀의 본명 ‘Jane Austen’이 처음 표지에 등장한 것은 사후 출간된 《설득》과 《노생거 사원》부터였다.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은 출간 이후 200년 넘게 사랑받으며,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문학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오스틴이 창작해낸 작품 속 인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듯 생생하며, 특히 엘리자베스 베넷, 에마 우드하우스, 앤 엘리엇 등은 초기 페미니즘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제인 오스틴은 1817년,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소설 여섯 작품은 “영국 소설의 정수이자 현대적 인간 심리의 기초”로 평가받고 있다.
펼치기
칼릴 지브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33년 레바논 북부 지방의 작은 마을 베샤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바논의 대표 작가로 철학가·화가·소설가·시인으로 활동했다. 1895년 세무 관리를 담당했던 아버지의 업무상 실수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89년 고향으로 돌아와 아랍 문학을 공부했다. 1902년 고향에서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 보스턴에 있던 누이동생 술타나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이후 1903년에는 형 부트로스와 어머니가 사망했다. 가족들의 잇단 죽음을 겪은 지브란은 그림 및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1908년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아랍 어로 쓴 《반항하는 영혼》을 출간했다. 1914년 뉴욕 몽트로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어 언론의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으며, 1917년 뉴욕 노들러 갤러리에서 연 전시회를 통해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18년 35세에 비로소 영어로 쓴 첫 작품 《광인》을 출간했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1923년에 《예언자》를 출간했다. 1930년 그의 생전에 나온 마지막 책 《지상의 신들》을 출간했다. 1931년 4월 10일 뉴욕에서 결핵과 간경화증 악화로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펼치기
현진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제강점기 조선 문단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으로, 식민지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민족적 저항의식을 실천한 지식인이다. 1900년 대구에서 개화파 계열의 집안에 태어나 일본 도쿄 세이조중학교에 이어 상하이 후장대학 등에서 유학하며 국제 정세와 민족 문제에 눈을 떴다. 이러한 해외 경험은 그의 문학관과 민족의식 형성에 중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고향> 등 여러 단편을 통해 폐색된 식민지 일상, 궁핍과 부조리에 직면한 소시민과 지식인의 삶을 예리한 구성과 간결한 문체로 형상화했다.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기 때문에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했으나 한결같이 친일 노선과 거리를 두고 창작을 이어갔으며, 1943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현실의 비극을 정면으로 끌어와 독자에게 윤리적 자각을 환기하는 그의 단편들은 한국 근대 단편소설 형식의 성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펼치기
김홍기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43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중견회사의 CEO로 일하고 있다.
펼치기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