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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한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93024423
· 쪽수 : 226쪽
책 소개
목차
김보영 〈산군의 계절〉
이수현 〈용아화생기(龍芽化生記)〉
위래 〈맥의 배를 가르면〉
김주영 〈죽은 자의 영토〉
이산화 〈달팽이의 뿔〉
작가의 말
프로듀서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나도 엊저녁부터 잔치 한가운데서 배 터지게 얻어먹는 중이다. 물론 내가 배가 불러야 위험하지 않다는 마을 장로의 판단에서겠지만. 이 곰의 후예들은 배가 남산만 하게 부른 짐승을 계속 먹여 대니 죽을 노릇이다. 더 미칠 노릇은 내 젖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이 환장할 갓난아기다.
‘으악, 으악’ 하고 비명이 나올 만큼 젖꼭지를 기운차게 빨아 대다가, 배불러 자는가 싶어 슬금슬금 도망치려 하면 어느새 눈을 번뜩 뜨고는 양손 양발로 젖을 꾸욱, 꾹 눌러 가며 쥐어짜서 기어코 한 방울이라도 더 뽑아내는 것이다. 빠는 기세가 무슨 바람신 풍백(風伯)이 강풍을 흡입하는 듯하고, 강신 하백(河伯)이 물줄기를 들이마시는 듯하다. 끄윽, 끄윽, 낮은 신음을 하다 어처구니가 없어 도로 풀썩 누우면 소매춤 추며 지나던 아낙 무리가 “어머, 애 먹이려면 유모가 든든하게 먹어야지” 하고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입에 턱 하니 물려 주고 간다. 똥개 취급도 이런 똥개 취급이 없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명색이 산신 중의 산신이라는 이 산군(山君), 밀우(密友)가 말이다.
<산군의 계절>
“너는 누구냐! 내 집에서 뭘 하고 있지?”
“집이요?”
예쁜 초록색 사람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규의 물통을 내려다보았다. 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만약 용소에 정말로 주인이 있어서 물을 떠 가지 못하게 한다면 큰일이었다. 어떻게든 물은 떠 가야 했다. 당황한 규는 무턱대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 살려 주세요, 선녀님!”
“누가 널 죽인다더냐?”
초록색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선녀는 또 무슨 소리냐. 무례하기는. 용은 너처럼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대로 자라는 게 아니다. 당연히 성별 같은 것도 없다.”
규는 용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에 대해 아는 건 없었다. 가뭄에 속이 타들어 갈 때 가끔 마을 어른들이 용신 님을 부르는 것을 몇 번 들어 본 게 다였다. 이 못이 용소라고 불리는 이유도 본래 용이 살던 곳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용아화생기(龍芽化生記)>
“알고 계신가요? 옛날 옛적에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없었어요. 사람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꿈과 엉켜 살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이 늘 좋은 꿈을 꾸는 건 아니라서, 사람의 꿈이 만들어 낸 신이니 괴물이니 요괴니 하는 것들이 사람을 잡아먹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신들은 사람을 인형처럼 가지고 놀고 용은 세상의 뿌리를 파먹고 거인은 벌레처럼 사람을 짓밟고 마녀는 아이들을 산 채로 솥에 넣고 도깨비들은 여흥으로 사람을 죽였어요.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희미한 상고시대를 들여다보면 사람이 신과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이 허다했다지요. 그건 모두 인간이 꿈과 분리되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꿈 중에는 좋은 것들도 있었지만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진 않았죠. 진짜 변화를 가져온 건 맥이었습니다.”
너는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맥이 꿈을 먹기 때문인가요?”
“네. 맥은 인간에게 해가 되는 신과 괴물과 요괴를 잡아먹었습니다. 나쁜 꿈을 잡아먹고 인간에게 이로운 꿈을 남겨 두었지요. 사람들은 점차 좋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길 바라자 태양이 움직였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해 줄 사람을 찾자 왕들이 나타났고, 떠나길 바라면 또 사라졌습니다. 세상을 재단하고 합리와 이성을 찾길 바라서 색목인을 상상해 냈습니다. 과학이 태동한 것도 모두 사람의 꿈이지요.”
<맥의 배를 가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