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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니콜라이 고골, 미하일 숄로호프,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콘스탄틴 파우스토프스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알렉산드르 쿠프린 (지은이), 최병근 (옮긴이)
써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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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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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러시아소설
· ISBN : 9788991958838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13-10-31

책 소개

'세계단편문학선집' 2권. 러시아대표단편문학선. 러시아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유명한 단편소설들을 선정하여 대학의 전공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쉽고 유익하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말로 옮겨놓은 단편모음집이다.

목차

옮긴이의 말 / 최병근 4

스페이드의 여왕/ 알렉산드르 푸시킨 11
코/ 니콜라이 고골 49
사랑스러운 여인/ 안톤 체호프 83
추운 가을/ 이반 부닌 101
석류석 팔찌/ 알렉산드르 쿠프린 107
심연/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172
망아지/ 미하일 숄로호프 192
눈(雪) / 콘스탄친 파우스토프스키 201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213
귀향/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233

작가소개 269
러시아문학 사조 개관 282

저자소개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체호프, 푸시킨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니콜라이 고골은 1809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소지주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친러시아적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정교 문화를 접하며 성장했다. 10대에 러시아 낭만주의 문화를 접하기도 했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경해 하급 관리로 생활하면서 낭만주의적인 우크라이나 창작 설화집 『디칸카 근교 마을의 야회(Vechera na khutore bliz Dikan’ki)』를 발표한다. 이 설화집은 푸시킨, 주콥스키 등 당시 최고 문인들과 벨린스키 같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고, 고골은 이내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떠오른다. 그는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을 수행하며 페테르부르크에서 역사 교사와 역사학 교수를 지내다가 키예프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에 지원하는데, 그 자리를 얻지 못하자 ‘작가로서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1835년 초 우크라이나를 배경으로 한 소설집 『미르고로드(Mirgorod)』와 문화-역사 비평 에세이들로 구성된 『아라베스크(Arabesques)』를 출간하고, 1836년에는 희곡 「감찰관(Revizor)」과 단편 소설 「코(Nos)」를 발표하면서 푸시킨과 함께 러시아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독자와 관객들이 「감찰관」을 사회 풍자 혹은 가벼운 소극(笑劇)으로만 인식하고, 일부 관객은 이를 러시아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개하는 데 상처를 받고 1836년 말 유럽으로 떠나 1848년까지 로마에 거주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1842년에 장편 소설인 『죽은 혼』 1부를 발표했으며 이후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온 직후 모스크바에 정착하여 종교적인 정진에 힘쓰면서 2부에 전념하여 1851년 완성본을 탈고한다. 고골은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정교 수도사에게 『죽은 혼』 2부의 평을 부탁했으나 부분적으로 미약하다는 비판을 받고 낙담해 원고를 불태웠다. 이후 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고골은 정교의 대정진 기간에 금식을 극단적으로 수행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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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숄로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5년 5월 11일(양력 5월 24일)에 돈 강 중류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교사, 회계원, 사무원,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1922년에 모스크바로 가서 주택 관리부 회계원이 되었다.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하여, 1923년 9월 19일자 <청년 프라브다>에 소품 「시험」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1925년에는 「배냇점」을 비롯하여 자기가 태어난 돈 강 유역을 배경으로 주로 내전의 비극을 다룬 단편들을 발표했다. 그 후 1차 세계대전, 볼셰비키 혁명, 내전에 휩쓸린 돈 강 카자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4부작 <고요한 돈 강>(1928-1940)과 볼셰비키 혁명 이후 농촌의 집단화 과정을 그린 <개간된 처녀지>(1932~1960)를 완성했다. 혁명과 농업 집단화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 때문에 출판 지연이나 부분적인 수정이라는 수난을 겪지만 스탈린이 숄로호프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그는 소비에트 문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 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종군기자로 전선을 누비면서 많은 기사를 썼고, 이때의 경험으로 르포 소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1943~1969)와 <인간의 운명>(1957)을 썼다. 1965년에 <고요한 돈 강>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32년 이후 공산당원이 된 숄로호프는 현실 정치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984년 2월 21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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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60년, 러시아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1867년, 타간로크의 김나지야에 입학하지만 수학 및 지리 성적이 부진하여 낙제하고, 13세 무렵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와 「햄릿」, 「검찰관」 등의 연극을 관람하며 예술에 흥미를 느낀다. 1876년 4월,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하며 일가족은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안톤 체호프는 계속 고향에 남아 고학으로 김나지야를 마친다. 1879년,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고, 1882년부터 오 년에 걸쳐 주간지 《오스콜키》에 약 300여 편의 소품을 기고한다. 1884년, 의사로 개업한 뒤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정부의 검열과 잡지사의 무리한 요구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1884), 「거울」(1885) 등 풍자적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다. 1886년 두 번째 객혈과 1888년 소설가 가르신의 자살 등 힘겨운 사건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다. 그럼에도 체호프는 1890년 사회적 참여와 영감을 얻기 위해 사할린섬으로 떠나고, 이태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멜리호보라는 마을에 정착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호프는 문학적 원숙기에 접어들고, 1899년 결핵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소설 「결투」(1892),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을 비롯해, 그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 「갈매기」(1896)를 발표한다. 그 뒤로 「바냐 아저씨」(1897), 「세 자매」(1900), 「벚꽃 동산」(1903) 등 여러 걸작들을 연이어 집필한다. 1904년, 기나긴 숙환 탓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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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 Пушкин, 1799∼1837)푸시킨(1799∼1837)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열두 살 때인 1811년 6년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했다. 그는 리체이 재학 중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질료나야 람파)’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해 러시아 남부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그는 남러시아의 캅카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풍의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뇨프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인 ≪캅카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 ≪도둑 형제≫ 등을 발표했고,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이 마을에 푸시킨의 집이 있고, 이 마을의 어귀의 스뱌트이 언덕 수도원에 그의 무덤이 있음)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느라 1825년에 발생한 데카브리스트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한다. 그는 1830년 가을 볼지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즉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돌의 손님>, <질병 때의 주연> 등 많은 작품을 쓴다. 1828년 겨울 새해 무렵에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한 푸시킨은 이듬해 봄에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에게 거절당하지만, 다시 청혼해서 결국 1831년 2월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지노 마을(아버지가 80채의 농가, 246명의 남자 농노, 237명의 여자 농노가 사는 이 마을을 물려주어 푸시킨이 젊은 지주가 됨)을 방문해 그곳에서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사≫ 등을 집필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만을 좋아할 뿐,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신의 아내와의 염문이 떠도는 중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는다. 그는 1836년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한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와 황제의 염문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자인 프랑스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국,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1837년 1월 7일 사망한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한다.푸시킨은 ‘러시아 문화의 등불’,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국민(민중)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러시아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에 있어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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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혁명 전 러시아 고전 문학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작가로 여겨진다. 보로네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3년에는 러시아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부닌의 작품은 러시아어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후가 아닌, 살아생전에 명성을 떨쳤던 흔치 않은 러시아 작가 중 한 명이다. 김나지움을 중퇴했지만, 친형의 지원과 노력으로 집에서 중등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신문사 편집국에 입사했다. 부닌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수많은 시, 단편소설, 평론 등을 발표했다. 1897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첫 시집 『세상 끝으로(На край света)』를 발표했고 이듬해 두 번째 시집 『열린 하늘 아래서(Под открытым небом)』가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을 읽은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부닌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했고 수많은 찬사를 쏟아냈다. 1900년에 발표한 시집 『낙엽(Листопад)』도 좋은 반응을 얻어 1903년에는 이 시집으로 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가 제정한 푸시킨 문학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부닌은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 오데사,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 등지를 거쳐 1920년 3월 파리로 망명했다. 특히 1918년 오데사에서는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의 실체를 폭로한 회고록 「저주받은 날들(Окаянные дни)」을 쓰기 시작하여 1920년에 발표했다. 이 회고록과 1925년에 발표된 단편 「일사병(Солнечный удар)」은 러시아 영화감독 니키타 미할코프(Никита С. Михалков)가 2014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 〈일사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부닌은 프랑스 망명 중에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여 「예리코의 장미(Роза Иерихона)」(1924), 「미짜의 사랑(Митина любовь)」(1925), 「아르세니예프의 인생(Жизнь Арсеньева)」(1930), 「어두운 가로수길(Тёмные аллеи)」(1937-1945, 1953) 등을 발표했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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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파우스토프스키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2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으나 철도 사무국 직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키예프에서 성장했다. 키예프 대학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대학으로 옮겨 철학 공부를 하였으나,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했다. 1917년까지 위생병으로 군복부를 하고, 전역 후 오제사, 치플리스, 모스크바 등지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작가로 등단한 것은 1925년 <바다의 스케치>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문단에 이름이 알려지게 된 건 러시아 문단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원칙이 강력히 대두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에서 요구하는 "문학의 정치적 효용성"을 수용하지 않고, 문학의 "순수한 예술성"을 고집하는 입장이었다. 1945년부터 전6권으로, 인간의 운명적 만남, 인간성의 문제, 사랑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노래를 주요 테마로 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이 1965년 레닌 문학상의 후보로 올랐다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러 외국어로 번역되어 작가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고, 러시아 문단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파우스토프스키는 스탈린 사후, 1950년대 초부터 활발한 문단 활동을 펼쳤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은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변호 사업이었다. 그는 지난날 스탈린의 숙청으로 희생된 작가들(바벨, 올레샤, 볼가코프 등)에 대한 복권 운동에 적극 헌신하는 한편, 정치적 박해에 고통받는 시냐프스키, 야쉰과 같은 젊은 작가들을 옹호하며 당의 문학 정책의 오류를 과감히 비판하는 투사적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68년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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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9년 러시아 남부의 도시 보로네슈 근교의 역참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철도노동자의 맏이로 태어난 작가는 어린 나이에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는 철도대학에서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고, 시와 산문을 쓰면서 문학에 몰두했다. 스탈린 체제가 견고히 자리를 잡아가던 1920년대 후반 플라토노프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기 시대의 초상을 그려냈다. 『체벤구르(Чевенгур)』, 『코틀로반(Котлован)』 등의 대표작들도 이 시기에 집필되었다. 하지만 동시대 유토피아의 허상을 겨냥한 날카로운 풍자는 문단 안과 밖 권력자들의 눈에 거슬렸고, 작가는 스탈린의 직접적 비난까지도 감내해야 했다. 1930년대 플라토노프는 창작을 계속했지만, 문단의 주류로부터는 점점 멀어졌다.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플라토노프는 최전선에서 전쟁을 목격하고 증언했다. 이때의 작품들은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보다는 전쟁을 추동하는 힘에 주목하고 있다. 전후 발표된 중편 소설 「귀향(Возвращение)」에서 플라토노프가 그려낸 귀향을 망설이는 이바노프 대위의 모습이 사회주의 전사의 긍정적 전형에 적합하지 않다며 작가는 다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제대로 지면조차 얻지 못한 채 타격을 입은 작가는 1951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플라토노프에 대한 평가는 사후 점차로 바뀌었는데, 초기 단편 작품들과 ‘전쟁 산문’ 작품들을 중심으로 196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전쟁 산문’은 인류사 가장 비극적인 전쟁인 2차세계대전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자 악과 증오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관찰로, 역사적, 철학적 관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플라토노프는 완벽히 복권되었으며, 20세기 소비에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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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안드레예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레오니트 안드레예프는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가난한 빈민촌에서 보냈는데 이때의 인상을 자신의 작품들에서 묘사하고 있다. 1891년, 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한 안드레예프는 생활고로 인한 호구지책으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92년 그는 잡지 <별>에 굶고 있는 학생을 묘사한 최초의 단편소설 <가난과 부>를 발표했다. 1893년, 학비를 못내 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서 제적된 후 그는 모스크바대학교 법학부에 편입했다. 1894년, 또다시 사랑에 실패한 안드레예프는 자살을 시도해 그 결과 만성 심장병을 얻게 되었다. 1897년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고 모스크바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잠시 변호사로 일하다가 <모스크바 통보>의 법정 통신원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말 그는 신문 <파발꾼>에 법정 관련 기사를 쓰고, 체계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단편들에서 안드레예프는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따라서 가난에 시달리며 기쁨을 잃어버린 아이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하층 관리들, 기술자, 부랑자, 거지, 도둑, 창녀, 아이, 어른 등 부르주아 도시의 무산자들과 이들에게 가중된 삶의 무게, 괴로운 노동,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이와 더불어 안드레예프는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정신적 독자성을 획일화하는 사회체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 고립된 인간과 단절된 인간관계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안드레예프는 혁명과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독자적인 문학, 비정치적 예술을 추구했다. 1919년 9월 12일 뇌출혈로 핀란드의 시골 마을 네이볼에서 사망했다. 스탈린 시대에 안드레예프는 판금 작가로 분류되며, 1930년 이후 그의 작품은 소련에서 출판되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1956년 복권되어 재평가되며, 그의 유해는 레닌그라드(현재 페테르부르크)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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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쿠프린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0년 펜젠 현의 영락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고 생계를 꾸리기조차 어려운 형편이 되자 쿠프린의 어머니는 모스크바로 이사를 한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1876년 쿠프린을 모스크바 소재의 라주몹스키 고아원에 맡긴다. 여섯 살에 고아원에 맡겨진 쿠프린은 후에 당시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의 비애’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이 무렵 발발한 러시아와 터키 간 전쟁에서 러시아는 승리를 거두고, 이를 통해 쿠프린은 군인이 되는 꿈을 갖게 된다. 1880년 제2모스크바 군사학교에 입학, 1890년에 졸업한 쿠프린은 소위로 임관하여 포돌스키 현에 주둔하고 있던 제46드네프롭스키 보병부대에서 군 복무를 시작한다. 군 복무 기간 동안 쿠프린은 여러 편의 단편과 중편소설을 집필한다. 1894년 8월 중위로 퇴역한 쿠프린은 키예프로 가 전업 작가로 나서고, 1919년에는 파리로 망명하여 타지에서 17년을 보낸다. 외국 생활 동안 생활고를 겪으며 모국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던 쿠프린은 1937년 깊게 병든 몸을 이끌고 조국 러시아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기쁨도 잠시, 결국 1938년 8월 식도암으로 사망한다. 『결투』외에 주요작품으로 『몰로흐』『올레샤』『서커스장에서』『소택』『구멍』『사관생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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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쿠프린의 다른 책 >
최병근 (옮긴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어문학부 20세기문학 분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양대학교 인문대학 러시아언어문화학과에 재직 중이다. 러시아 현대문학 작가 이반 부닌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과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번역서로는 『러시아문학 앤솔러지 1,2』(문원출판), 『귀향 외』(책세상),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러시아 대표단편문학선)』 등이 있다. 최근 발표한 학술논문으로는<『채식주의자』에 나타난 여성어의 영어번역과 러시아어번역 비교연구(공저)>, <고골의 단편소설 「코」의 러한 번역 양상 연구: L.S. Barkhudarov의 번역 변환(translation transformation) 이론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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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말체프의 친구는 아니었다. 그가 내게 관심을 보이거나 날 배려해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운명적인 고통에서 그를 지켜주고 싶었고, 한 인간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냉엄하게 파멸시켜버리는 숙명의 힘에 분노가 치밀었다. 왜 내가 아닌 말체프 씨였을까? 다름 아닌 그를 파멸시켰다는 점에서 이 운명의 힘은 비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산술적인 계산과 이성적인 논리라는 것이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고, 이런 치명적인 힘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택된 사람들은 파멸시키는 상황을 나는 직접 목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힘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나는 내 안에서 자연의 외적인 힘과 우리 운명에는 존재하니 않는 그 어떤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고유한 특징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울화가 치밀었고, 그래서 이 자연과 운명에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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