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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학 일반
· ISBN : 9791185571164
· 쪽수 : 201쪽
· 출판일 : 2020-02-15
책 소개
목차
현대 사회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평등’ 의식이 제기되는 역사현실적 맥락
현대 이전에 있어 차별을 당연시하는 신분질서의 논리
노예제 반대 논증에서 본 현대적 평등 의식의 단초
권리로서의 평등과 권리들의 평등의 인정, 확정, 보장
인간으로서의 자연적 평등으로부터 시민으로서의 주권자 평등으로
근대 한국에서 평등의식의 발전이 서양보다 크게 늦은 것은 아니었다
고대 민주정의 실패 원인과 경제적 평등을 내장한 현대적 평등권의 핵심
주권자 정치능력을 배양하는 시민교육의 필수성
서양과 한국 근대사에서 평등의식 발전의 평행적 궤적 : 루소와 다산
평등 또는 신분질서의 조화스러운 운용이 주는 국가적 응집력
조선왕조 신분체제의 탁월성과 붕괴 요인
메이지 유신기 일본 근대화의 함정
현대 보수주의의 적실성과 한국의 자칭 ‘보수’의 피상성과 천박성
입헌민주주의적 독립운동의 특이성과 정치적 현대성의 선취
대한제국 황제의 몽상, 압제적 차별의 화신으로서 일제 불평등 통치
해방 후 전개되는 신(新)불평등의 양상 : 불평등의 세계화
대한민국의 전사회적 불평등의 전개 양상
토지 겸병과 그 현대적 버전으로서 자산 양극화
불평등화를 고착시키는 미선출 권력의 세력화 양상
평등과 공정 - 과학기술과 경제기반의 변화와 새로운 접근법
한국인의 평등주의, 평등 의식, 평등 심리
좋은 정치체제와 최적의 사회경제구조 구축 위한 공동의 노력
차이를 다만 차이로 인정하면서 모두가 자유롭게 자아실현하는 사회
‘모두 평등하자’와 ‘고유하게 자아실현하자’
남과 평등해야 할 ‘나’ 즉 자기의 모습을 자기가 모른다
유투브 열풍이 주는 충격 : 나와 타자의 실시간 조응과 그 이득
삶의 조건에 따른 평등의 진화와 헌법의식의 탄력성
헌법현실과 현대화 현실의 괴리 : 난민성(難民性) 현대의 문제들
서구의 시민적 개인과 한국적 현대의 특성
자유롭고 평등한 주권자 시민의 플래폼으로서 국가
평등의 문제와 정의의 문제의 불가분성
정의로운 평등의 조정자로서 국가와 시민의 자기교육
대한민국 국가와 주권자 시민의 잠재력
신(新)불평등 극복과 질적으로 탁월한 교육평등 추구
필수적인 평등의 조건과 질적으로 높은 평등의 내용
제4차 산업혁명 조건과 평등 전략
분배의 기준, 방식, 적정선 : 자유민주체제의 영속적 과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근대적 시민층의 형성과 젊은 개인들의 가능성
청년학생들에 의한 교육자치 도시의 조성을 제안한다.
자조와 우애 : 평등의 구현 방법
다시 한번 짚어보는 한국의 역사적 잠재력
대한민국이 국가적으로 쌓았던 잠재력을 발휘하자
저자소개
책속에서
“동서양 현대에 들어 ‘평등(平等)’이란, 모든 국가의 인민이 국가구성(state-constitution)을 도모할 경우, 즉 헌법을 제정할 때, 자신들이 만드는 국가가 그 구성원에게 ‘자유(自由, liberty)’와 더불어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하도록 의무화하는 규범가치와 기본권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유를 얘기할 때 평등을 같이 얘기하고, 평등을 얘기할 때 반드시 자유와 결부시키는 것은 자유와 평등의 개념 활용에 대해 루소 이래 확립된 일종의 현대적 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루소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노예일 수 있을 가능성, 즉 본래부터 노예로 태어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태어나는 그 순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로 인해 각자 자유롭고 평등한 것이며, 이렇게 자연상태에서의 자유와 평등은 모든 개인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이런 현대적 의미의 평등사상이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늦게 ‘수입’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민주주의 민도[民度]가 낮다고도 하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루소가 『사회계약론』과 『에밀』을 출간했던 1762년에서 보자면, 루소와 거의 마찬가지로 모든 백성에게 기본토지를 균분해 주어야 한다는 ‘정전론(井田論)’의 발상을 담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가 탈고된 해가 불과 1817년이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