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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근대개화기
· ISBN : 9788933707937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21-06-2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제1부 왜 화혼양재를 알아야 하는가?
제1장·문화수용전략으로서의 화혼양재와 동도서기, 그리고 위정척사
1. 중국에서도 배울 것이 없었던 문화국가, 식민지로 전락하다
2. 문화수용전략이라는 관점
3. 화혼양재는 성공한 문화수용전략이었는가?
4. 화혼양재는 의미가 불분명해야만 했다? 상징과 슬로건으로서의 화혼양재
5. 이 책의 구성
제2장·산업혁명과 이데올로기로서의 화혼양재―이제는 지식산업혁명으로
1. 산업혁명이란 무엇인가?
2. 일본의 산업화
3. 선발국의 산업혁명 vs 후발국의 산업혁명
4. 화혼양재(和魂洋才)
제3장·화혼양재의 계보와 의미 변환―화혼한재와 야마토다마시, 그리고 야마토고코로
1. ‘화(和)’란 무엇인가?
2. ‘화혼’ 또는 ‘야마토다마시’의 행로
3. ‘화혼양재’: ‘화혼’과 외래 문화의 수용
4. 결론에 대신하여: 화혼양재에 대한 질문과 해석
제2부 화혼양재와 동도서기: 현장과 사례 연구
제4장·국가의 정치제도와 근대 국가 건설과정의 화혼양재
―봉건론과 군현론의 줄타기와 한재(漢才)
1. 막말 유신기의 봉건·군현론―한재(漢才)에서 화혼양재로
2. 도쿠가와 시대의 봉건·군현론
3. 왕정복고는 군현제? ‘막부의 봉건’에서‘천황의 봉건’으로
4. 판적봉환(版籍奉還): 봉건과 군현 사이의 줄타기
5. 폐번치현과 군현의 설득: “서양 각국은 모두 군현”
제5장·일본의 산업화 초기의 화혼양재―제철산업과 근대화에 대한 검토
1. 화혼양재의 흔적을 찾아서
2. 도쿠가와 시대의 제련 산업
3. 막부 말기 서양 제철 기술의 도입
4. 메이지 유신 초기의 산업화
5. 일본 산업 발전기와 철강 산업
6. 일본 초기 산업화 과정과 성공 요인
제6장·외국 유통업 세븐일레븐의 도입 과정에서 본 화혼양재
1. 서양의 기업을 화혼의 기업으로?
2. 세븐일레븐 재팬의 성공 요인
3. 세븐일레븐 재팬을 통해 본 화혼양재
제7장·동도서기론적 과학 인식
―17~19세기 중국과 조선에서 만난 이질적인 두 과학
1.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과학’은 서양의 ‘과학’을 어떻게 대했을까?
2. 서양 과학의 ‘동아시아적’ 수용: 첫 만남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3. 조선 학인들의 과학담론
4. 서양 과학을 ‘과학’으로 수용하다: 19세기 말 조선에서 근대 과학의 형성
맺음말·위장척사와 동도서기, 그리고 중체서용은 과연 실패한 전략이었는가?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대부분의 후발국의 실패가 수구세력의 승리 때문이고 일본의 성공적 산업화가 개혁세력의 승리 덕분이라면, 일본의 경우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처음에는 열세에 놓여 있던 개혁세력의 승리를 가능케해 준 ‘그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에, 즉 다른 후발국들에는 없고 일본에는 있었던, 일종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던 그 무엇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일본의 예외적인 성공을 가능케 한 ‘그 무엇’이 혹시 ‘화혼양재’는 아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화혼양재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 제2장 〈산업혁명과 이데올로기로서의 화혼양재〉
즉, 도쿠가와 막부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야마토다마시는 새로운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용맹한 정신을 뜻하는 야마토고코로와 미쿠니다마시가 히라타 아쓰타네에 의해 일본 고유의 정신이라고 강조되면서 여성적 마음을 의미하던 야마토다마시는 남성적이고 무력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아가 요시다 쇼인의 노래에서 확인되듯이 야마토다마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일본의 독특한 정신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야마토다마시는 국가주의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군국주의의 기반으로 이해되고 사용되었다.
- 제3장 〈화혼양재의 계보와 의미 변환〉
일본은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봉건제를 유지해 왔으며 왕정복고 당시만 하더라도, 심지어는 판적봉환의 시점에서도 봉건제의 유지를 지지하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시되었던 군현제는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정당화되었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서양 각국의 정체(政體)가 군현제라는 인식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이 위험시되던 막말에는 군현제도 경계의 대상이었지만, 서양이 일본의 모델이 되어가면서 군현제에 대한 태도도 바뀌어갔다. 양이운동이 힘을 잃고 문명개화의 시대가 오면서 “서양 각국은 모두 군현”이며 군현이 부국강병의 요인이라는 견해, 나아가 서양처럼 군현제를 실시하는 나라가 문명국이라는 논리가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 제4장 〈국가의 정치제도와 근대 국가 건설과정의 화혼양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