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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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로, 1867년 현재의 도쿄 신주쿠구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1900년 문부성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서 영국에서 2년간 유학하며 영어수업법을 연구했으며 귀국 후에는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의 강사로 일했다. 1905년 발표 및 연재한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큰 호평을 받은 후 『도련님』 『풀베개』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1907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하여『우미인초』를 연재하면서 전업 작가로서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 후』 『문』 『마음』 등의 작품을 연재하며 독자들의 사랑과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6년 12월 9일, 『명암』을 집필하던 중 거듭된 위궤양 악화로 49세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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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하루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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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후기부터 쇼와 초까지 활약한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소설가·평론가다. 와카야마현의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문학과 예술 환경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중학교 재학 중 문학가를 꿈꾸며 《명성》, 《스바루》등의 문예지에 시를 투고했고, 요사노 뎃칸과 이쿠타 조코의 영향을 받아 신시샤에 가입해 시 형식과 주제를 탐구했다. 나가이 가후를 동경해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입학했으며, 동문 호리구치 다이가쿠와 평생 우정을 나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니자키 준이치로와도 깊은 친분을 맺고 상호 비평과 교류를 지속했다.
1921년 첫 시집 《순정시집》을 출간해 사회 문제와 서정시를 아우르며 주목받았다. 특히 다니자키의 아내 지요코를 둘러싼 ‘오다와라 사건’은 문단의 큰 화제가 되었다. 1930년 지요코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신감각파가 부상하며 하루오의 문학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고수한다. 아울러 전통적이고 동양적인 감수성을 유지하며 중국, 조선, 대만을 여행하고 고전 번역에도 힘썼다.
전쟁기에는 중국 화북 일대를 종군하기도 하고 시국 강연이나 시국 시찰에 나서기도 했다. 이에 전후 하루오는 민족 감정을 대표하여 이미 시작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협력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후 일본 예술원 회원,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 방송 녹음 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으며, 교토 지온인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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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후미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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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51.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닌다.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인기 작가가 된다. 대공황의 와중에도 60만 부나 팔린 『방랑기』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도시 생활자의 밑바닥 삶, 특히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내 대중에게 사랑받는 한편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하며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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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다쓰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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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3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만나 192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사받았다. 1929년 도쿄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예술파 문학의 영향을 골고루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불안정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신선한 심리주의적 묘사라는 문학 세계를 꿋꿋이 고수했으며, 사랑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곳에서 진정한 생을 발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통해 사소설(私小說) 중심이었던 당시 일본 소설의 흐름에서 ‘지어낸 이야기(픽션)’로 낭만파 문학 형식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 말기부터 결핵 증상이 악화되어 전후에는 작품 활동을 중단한 채로 요양하다 1953년 사망했다. 시의 감수성을 지닌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대표작으로는 『성가족(聖家族)』 『아름다운 마을(美しい村)』 『바람이 분다(風立ち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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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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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가로 189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재학 당시 「노년」, 「라쇼몬」, 「코」를 발표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이중 「코」가 일본의 ‘국민 작가’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으며,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를 거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10년 남짓한 짧은 창작 기간에도 「라쇼몬」, 「덤불숲」, 「지옥변」, 「신들의 미소」, 「서방의 사람」, 「톱니바퀴」, 「갓파」 등에서 끊임없이 인간과 예술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만년에 이르러 신경쇠약, 불면증, 환각 증상을 보이다 1927년 7월 도쿄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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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미쓰 리이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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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7일, 후쿠시마(福島)현 기타아이즈(北会津)군 도야마(東山) 온천에서 태어났다. 1927년 《문장세계》에 〈신마(神馬)〉를 투고한 것을 시작으로 〈활화산〉, 〈불〉 등을 발표했는데, 초기 작품에는 의외로 사소설적인 소재가 많았다. 1919년에는 사토 이치에이(佐藤一英)의 소개로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의 창설자로 유명한 기쿠치 간(菊池寛)을 만나게 되고, 이듬해에는 기쿠치로부터 평생의 친구가 될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를 소개받는다. 기쿠치는 1923년 편집 동인을 조직해 월간지 《문예춘추》를 창간했는데, 요코미쓰는 이 창간호에 〈시대는 방탕하다〉라는 에세이를 발표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곤 도코(今東光)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가했다. 이후 〈파리〉, 〈태양〉, 〈마르크스의 심판〉, 〈옥체〉 등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신진 작가로서 빛을 발했다.
1924년 10월 요코미쓰는 가와카타 야스나리, 곤 도코, 나카가와 요이치(中川与一), 가타오카 뎃페이(片岡鉄兵) 등과 동인잡지 《문예시대》를 창간한다. 《문예시대》는 이들 신인들의 활동에 가장 먼저 주목했던 지바 가메오(千葉亀雄)에 의해 ‘신감각파’로 명명되었다. 《문예시대》 창간호에 실은 〈머리, 그리고 배〉를 시작으로 신감각파 문학 운동의 대표 작가로 활약하게 된 요코미쓰는 1925년 2월 〈감각 활동〉(후에 〈신감각론〉으로 개제)를 발표해 신감각에 대한 개념과 소신을 밝혔다. 같은 해 7월에는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연상시키는 〈조용한 나열〉, 두 달 후에는 〈객체에 대한 과학의 침식〉을 발표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동시에 과학과 문학을 연결하는 시도를 꾀했다. 또한 조선의 경성에서 뇌일혈로 죽은 아버지를 소재로 쓴 〈파란 돌멩이를 줍고 나서〉(1925. 3)나, 〈봄은 마차를 타고〉(1926. 8), 〈화원의 사상〉(1927. 2)과 같이 아내인 고지마 기미(小島キミ)의 죽음을 둘러싼 사소설적 작품도 선보였다.
요코미쓰는 1928년이 되면서 〈눈에 보인 이〉, 〈신감각파와 코뮤니즘 문학〉 등을 통해 유물론적 문학론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대항 의식을 표면화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한 달간 머물렀던 체험을 바탕으로 첫 장편 소설인 《상하이》의 연재에 들어간다. 그러나 연재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1930년, 심리와 감각의 얽힘이 두드러진 〈새〉와 〈기계〉를 발표함으로써 신심리주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후 요코미쓰는 에세이집인 《글쓰기 책》, 심리 묘사가 뛰어난 소설인 《침원》, ‘일본 정신’에 대해 다룬 《문장》을 집필했다. 1935년에는 통속 소설에서 감상 소설을 배제하고 우연성을 중시해 순문학과 결합시킨 형태의 ‘순수 소설’만이 문예 부흥의 돌파구라고 주장한 〈순수 소설론〉을 발표했다.
요코미쓰는 1936년, 《도쿄 일일 신문》과 《오사카 매일 신문》의 특파원으로 유럽을 여행했는데, 이 경험을 토대로 《여수(旅愁)》의 신문 연재를 시작한다. 1945년 야마가타(山形)현 소개지에서 패전을 맞이했는데, 그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한 상황에서도 전시하의 답답한 심경을 그린 《밤의 구두》와 《우아한 노래》를 출판한다. 그러나 서양 사상과 일본의 고신도(古神道), 그리고 과학과 일본 사상을 담은 《여수》를 미완으로 남긴 채, 1947년 12월 30일 단편 〈남포동〉을 집필하던 중 위궤양과 복막염으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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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오 주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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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인 히사오 주란은 프랑스 유학 당시 스승이었던 거물급 연출가 샤를 뒬랭(Charles Dullin)의 일본어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모험 소설, 추리 소설, 역사 소설, 유머 소설, 논픽션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했다. 대표작은 <해표도(海豹島)>, <곤충도(昆虫図)> 등이 있다. 작풍은 속도감 있는 문체와 세심한 인간 관찰에 따른 역설적인 논리, 빠르게 반전하는 전개가 주를 이룬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이민자나 방랑자, 다문화, 파국, 표류 같은 국가의 비호에서 멀어진 인간의 모습은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었던 문학적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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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노 신이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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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가나가와(神奈川)현 오다와라(小田原)시에서 태어났다. 자신이 태어난 이듬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십 년 만에 귀국한 보헤미안 아버지, 소학교 교사로 일하며 엄격한 훈육을 고집한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성장했다. 1919년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열세 명의 동인을 모아 『13인(十三人)』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첫 작품「손톱(爪)」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당시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후 부모 형제를 혐오하는 신변잡기 사소설을 쓰던 초기를 지나, 중기에 이르면 고향 오다와라의 풍토에 고대 그리스나 유럽 중세 이미지를 중첩해 꿈과 현실을 오가는 환상문학을 개척했다. 「제론(ゼーロン)」은 이런 환상성이 돋보이는 대표작이다. 후기에 해당하는 1931년부터는 신경쇠약 징후가 심해지며 사소설 경향으로 회귀했는데, 더욱 어두워진 작풍이 「병세(病状)」에 드러나 있다. 1936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생 자유와 속박 사이에서 생겨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마키노의 문학은 창백한 자의식, 신경증, 비애감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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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 사이세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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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大正) 시대부터 쇼와(昭和) 시대에 걸쳐 시·소설·하이쿠·수필·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단행본 기준 150권 이상의 저서를 간행했으며 그 가운데 20여 권의 시집과 80여 권의 소설집을 펴낸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자 소설가다.
하급 무사 출신인 아버지와 하녀였던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일주일 만에 인근 절의 주지승을 통해 양자로 입양된다. 주지승의 내연의 처에게 입양되어 자라면서 친부모와는 가깝게 교류하지 않았고 열 살 무렵 친부가 사망한 뒤 친모는 자취를 감추어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된 자격지심과 그로 인한 반항과 고독에서 사이세이는 일생 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사이세이의 삶과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제는 이러한 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독립을 도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이세이 문학은 전통 시가인 하이쿠에서 시작한다. 양모의 권유로 14세 무렵 고등소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재판소에 급사로 취직을 한 그는 직장 상사에게 하이쿠의 기초적인 작법을 배운다. 이후 지역 신문이나 문예지에 시가나 산문을 발표하는 등 문학에 대한 열의를 쏟아붓는다. 초기에는 본명인 데루미치(照道)와 필명인 잔카(殘花)를 썼으며 17세 무렵부터는 사이세이(犀西)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사이세이(犀西)라는 이름은 당시 가나자와 출신의 고쿠부 사이토(國府犀東)의 필명 속에 담긴 ‘사이강의 동쪽(犀東)’이라는 의미에 상응하여 붙인 것이다. 그는 강의 서쪽에서 나고 자랐다는 의미를 담아 필명을 ‘사이세이(犀西)’라고 지었으며 나중에 같은 음의 한자인 ‘사이세이(犀星)’로 바꾼다.
1907년 그의 나이 19세 때 《신성(新聲)》에 발표한 시를 계기로 고다마 가가이(兒玉花外)의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한다. 아울러 1910년 22세 때에는 포부를 품고 상경하지만 무명 시절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경제적 궁핍과 불안정함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도시 생활에 지친 그는 미련 없이 고향 가나자와로 돌아간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삶 역시 녹록하지는 않았으며 가슴속에 품은 문학을 향한 열망은 그를 몇 번이고 다시 도쿄로 돌아오게 만든다. 도쿄와 가나자와를 오가며 이상과 현실 속에서 좌절을 반복하는 동안 그의 시에는 고향에 대한 애착과 고된 삶의 모습이 현실적인 감각과 이상 세계로의 환영으로 발현된다.
값싼 하숙방을 전전하며 곤궁한 생활을 하는 생활 속에서도 사이세이는 뜻이 맞는 문인들과 시사(詩社)를 결성하거나 동인지를 간행하는 등 시인·편집자·발행인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 간다. 20대 중반부터는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를 비롯하여 우에다 빈(上田敏),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과 친분을 이어 가며 문단의 중심에 선다.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던 시기 사이세이는 소설 창작에도 힘쓴다. 그가 소설로 영역을 확장하게 된 까닭은 불우한 성장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명심과 경제적 자립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1919년 31세에 〈유년시대(幼年時代)〉를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하여 높은 반응을 얻게 되고 그해에 〈성에 눈뜰 무렵(性に眼覺める頃)〉, 〈어느 소녀의 죽음까지(或る少女の死まで)〉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명성을 다진다. 초기 자전소설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유년 시대〉, 〈성에 눈뜰 무렵〉, 〈어느 소녀의 죽음까지〉는 태생적 속박과 자신의 상흔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와 더불어 사이세이는 한 해 30~4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는 창작욕을 보인다. 그런 성과로 46세에 양모와 절에서 함께 자란 형제들을 소재로 소설 〈남매(あにいもうと)〉(1934)를 발표하며 1935년 제1회 문예간담회상(文藝懇話會賞)을 수상한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오다 1953년에는 영화화가 되기도 하고 1972년에는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한다.
소설이 많은 관심을 받은 것에 반해 사이세이는 점차 시를 쓰는 일에 소홀해 진다. 1932년 간행한 시집 《철집(鐵集)》에서 ‘더는 시집을 엮을 마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이래 1934년 8월에는 〈시여 그대와 헤어지노라(詩よ君とお別れする)〉(《문예(文藝)》)라는 글에서 마침내 시작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는 변화에 대한 의지와 시와 소설 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남매〉의 성공으로 자신의 문학적 생명을 소설에 걸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변혁기를 보내며 사이세이의 문학은 더욱 깊이를 더한다.
그는 타고난 미적 감각으로 전통적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일본의 정원을 소재로 하는 글을 다수 남기고 있다. 수필집 《정원을 만드는 사람(庭を造る人》(1927), 《정원과 나무(庭と木)》(1930), 《일본의 정원(日本の庭)》(1943)이 그것이다. 그는 1931년 가루이자와에 별장을 짓고 매년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며 집과 정원을 직접 가꾸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 이 별장은 자신과 친분이 깊은 호리 다쓰오(堀辰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등 많은 문인들이 드나드는 교류의 장소가 되었으며 사이세이 자신 역시 이 별장에서 〈성처녀(聖處女)〉(1935), 《살구 아이(杏っ子)》(1956) 등과 같은 작품을 저작한다.
전시기에 이르러 사이세이는 《천황의 군대(美以久佐)》(1943)와 《일본미론(日本美論)》(1943)에서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여 전후 논란의 중심에 선다. 이에 도미오카 다에코(富岡多惠子)는 ‘시인은 대중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해 주는 능력자로서 국가에게 이용당하는 시대도 있다. 전쟁 시대에 시인은 국책에 봉사하는 선전가·선동가로만 기대되었을 것이다’라며 사이세이를 옹호하기도 한다. 사이세이는 《무로 사이세이 전시집(室生犀星全詩集)》(1962)에서 ‘오늘 이들 시를 지우는 것은 마음속의 더러움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며 논란이 된 전쟁시를 삭제한다.
오랜 문학 활동을 통해 높은 문업을 이룬 사이세이는 제1회 문예간담회상(文藝懇話會賞)(1935), 제3회 기쿠치간상(菊池寬賞)(1941), 제9회 요미우리문학상(讀賣文學賞)(1958), 제13회 마이니치출판문화상(每日出版文化賞)(1959), 제12회 노마문예상(野間文藝賞)(1959) 등을 수상한다.
1961년 10월 73세에 폐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쇠약 증세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1962년 3월 1일 도쿄 도라노몬(虎の門) 병원에 입원한 뒤 의식 불명에 이른 19일로부터 일주일 후 3월 26일 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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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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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어학을 전공하고 통번역사로 일했다. 시와서 출판에서 번역과 기획을 하고 있다. 번역서로 《시를 쓰는 소년》, 《풀꽃》, 《하루하루 하이쿠》, 《하루하루 와카》, 《심호흡의 필요》, 《세상은 아름답다고》, 《나쓰메 소세키 - 인생의 이야기》, 《다자이 오사무 - 내 마음의 문장들》, 《봄은 깊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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