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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씨책] 일본 명단편선 9

[큰글씨책] 일본 명단편선 9

(허무를 끌어안다)

시마자키 도손, 히로쓰 류로, 구니키다 돗포, 고이즈미 야쿠모,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바야시 다키지, 무로 사이세이, 미야자와 겐지, 하기와라 사쿠타로, 히사오 주란, 사카구치 안고, 나카지마 아쓰시, 하야시 후미코 (지은이), 김난희, 이광호, 이정희, 유미선, 이현준, 최재철, 박경연, 장유리, 전은향, 김은영, 장부연, 이남금 (옮긴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5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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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씨책] 일본 명단편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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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큰글씨책] 일본 명단편선 9 (허무를 끌어안다)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 ISBN : 9791128856709
· 쪽수 : 478쪽
· 출판일 : 2021-07-28

책 소개

메이지부터 쇼와 전기, 그리고 전후의 작품까지, 일본 근현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명단편을 모았다. 주제별 단편집 출간은 그동안 한국 출판에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일본 근대 작품들을 읽은 독자라면 이 시리즈를 통해 일본 근현대 문학의 기본 흐름과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세 명의 방문객(三人の訪問者) ― 시마자키 도손 / 김난희
검은 도마뱀(黒蜴蜓) ― 히로쓰 류로 / 이광호
소년의 비애(少年の悲哀) ― 구니키다 돗포 / 이정희
오테이 이야기(お貞女のはなし) ― 고이즈미 야쿠모 / 이정희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글(母を恋ふる記) ― 다니자키 준이치로 / 유미선
늙은 체조 교사(老いた体操教師) ― 고바야시 다키지 / 이현준
해골(しゃりこうべ) ― 무로 사이세이 / 최재철
주문이 많은 요리점(注文の多い料理店) ― 미야자와 겐지 / 박경연
고양이 마을−산문시풍의 소설(猫町−散文詩風な小説) ― 하기와라 사쿠타로 / 장유리
검은 수첩(黒い手帳) ― 히사오 주란 / 전은향
죽음과 콧노래(死と鼻唄) ― 사카구치 안고 / 이광호
산월기(山月記) ― 나카지마 아쓰시 / 김은영
속 전쟁과 한 명의 여인(続 戦争と一人の女) ― 사카구치 안고 / 장부연
늦게 피는 국화(晩菊) ― 하야시 후미코 / 이남금

저자소개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86년 도쿄 니혼바시에서 태어났다. 제일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제국 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퇴학당했다. 1910년 『신사조(新思潮)』를 재창간하여 「문신」, 「기린」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고, 소설가 나가이 가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1915년 열 살 어린 이시카와 치요코와 결혼했는데, 시인인 친구 사토 하루오가 그의 부인과 사랑에 빠지자 아내를 양도하겠다는 합의문을 써 『아사히신문』에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화 예술 운동에도 관심을 가진 그는 시나리오를 써 영화화하고 희곡 『오쿠니와 고헤이』를 발표한 뒤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24년 『치인의 사랑』을 신문에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검열로 중단되었다. 1942년 그는 세 번째 부인이자 그가 희구하던 여성인 마쓰코와 그 자매들을 모델로 『세설』을 쓰기 시작했다. 간사이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짙게 배어 있는 『세설』은 몰락한 오사카 상류 계츨의 네 자매 이야기, 특히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풍속을 잔잔하게 전하는 풍속 소설이다. 1943년 『중앙공론』 신년호와 4월호에 게재되었고 7월호에도 실릴 예정이었으나 <시국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표가 금지되어 전후에야 비로소 작품 전체가 발표되었다. 훗날 마이니치 출판문화상과 아사히 문화상을 받았다. 1948년에는 제8회 문화 훈장을 받았고 1941년 일본 예술원 회원, 1964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문학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에 뽑혔다. 1958년 펄 벅에 의해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된 이래 매년 후보에 올랐으며 1965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는 『치인의 사랑』, 『만』, 『킨쇼』, 『열쇠』, 『장님 이야기』, 『미친 노인의 일기』 등이 있고,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현대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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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6년 일본 이와테현에서 태어나 1933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자 동화작가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 우주와 생명에 대한 통찰과 뛰어난 상상력을 담은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산과 들을 산책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농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가 하면, 농업과학을 연구해 농사를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1921년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으나 살아 있을 때 나온 책은 시집 『봄과 수라』와 동화집 『주문 많은 요리점』뿐이고, 삶을 마친 뒤 작품들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주요 작품에 『은하철도의 밤』 『구스코 부도리의 전기』 『첼로 켜는 고슈』 『바람의 마타사부로』 『오츠벨과 코끼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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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자키 도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시, 소설, 수필, 동화 등 문학의 전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해 일본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작가다. 1872년에 나가노현(長野縣) 니시지쿠마군(西筑摩郡) 미사카(神坂)에서 아버지 마사키(正樹)와 어머니 누이(縫)의 막내로 태어났다. 도손의 가문은 1513년에 선조가 기소(木曾)로 이주해 와서 대대로 촌장과 역참과 숙박업을 가업으로 이어 왔는데 바로 아버지 마사키가 본 소설 주인공 한조의 모델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천자문》과 《권학편》 등을 배웠고 열 살 때 도쿄로 유학을 가서 매형 집에서 기숙하며 다이메이(泰明)소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 후 여러 곳으로 전전하며 15세 되던 해에 시바(芝)에 있는 영어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정신적 스승인 기무라 구마지(木村熊二)에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해 11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메이지(明治) 학원 본과에 입학한다. 한때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18세 되던 해에 동경대 교양학부의 전신인 제1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실패를 계기로 문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21세인 1892년부터 잡지 《여학(女學)》에 습작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다. 22세에는 《문학계(文學界)》 창간 동인으로 참가하고 거기에 작품을 발표하며 필명인 도손(藤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26세 되던 해에 발표한 《새싹집(若菜集)》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일약 무명에서 스타덤에 오른다. 특히 그 안에 수록된 〈첫사랑(初戀)〉이라는 7·5조의 정형시가 독자들을 단숨에 매료한다. 이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며 국민적 시인이라는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된다. 그는 연이어 네 번째 시집 《낙매집(落梅集)》까지 간행하지만 시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산문으로의 전향을 염두에 두고 습작 삼아 수필 《지쿠마가와강 스케치(千曲川のスケッチ)》를 발표한다. 이 작품도 명작으로 명성을 얻는다. 31세에는 〈옛 주인(舊主人)〉이라는 첫 단편소설을 발표하는데 풍기 문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발매를 금지당하고 만다. 33세에는 결연한 각오로 자비 출판을 계획하고 장인에게 자금 원조를 부탁하는데 이 작품이 1906년 35세에 출간되는 《파계(破戒)》다. 천민 계급의 차별 문제를 픽션으로 다룬 것으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출세작이며 일본 자연주의 작품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1908년, 과거 22세 때 제자를 사랑한 나머지 학교를 사직하고 여행을 떠났던 자신의 사건을 소설로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고 간행한 것이 바로 《봄(春)》(1908)이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이른바 사소설 글쓰기가 유행하며 이 흐름이 일본 자연주의의 주류가 되었다. 39세에는 《집(家)》(1910)을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하는데 출가한 누이의 가문과 친정의 두 가문의 가부장제하의 퇴폐와 붕괴의 과정을 그린 누이의 생애를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47세에는 상처하고 혼자 지내던 중 집안일을 돌보러 온 조카를 임신시킨 사실을 소설로 써서 발표하게 된다. 《신생(新生)》(1918)은 작가 자신의 치부 고백의 완결편이지만 “노회한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라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혹평을 듣기도 한다. 58세부터는 본 작품인 《동트기 전》 집필을 시작한다. 그동안 축적해 온 작가적 역량을 총동원한 비장한 글쓰기였는데 이 작품은 그가 평생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왔던 “자아정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아버지를 추적한 것이며 그 아버지라는 메타포에 자신의 내적인 성찰과 고뇌도 함께 상감해 넣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 도피 도중 우연히 목격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전쟁 참화와 그에 따른 국가의 존재를 절감하면서 정치 시스템까지 아우르는 역사 소설을 써야겠다는 문학적인 사명감을 이 소설을 통해 실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4세에 이 작품을 완결한다. 그리고 72세에 소설 《동방의 문》을 집필하던 중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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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 사쿠타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시인, 평론가. 군마현 출생. 1917년에 간행된 첫 번째 시집 『달을 향해 짖다』에서 기존 시의 개념을 깨고, 새로운 형식의 시를 썼다. 1923년에 발간한 시집 『푸른 고양이』에서 구어자유시를 확립해 부동의 지위를 차지했다. 일본근대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만돌린 악단을 주재하며 연주 활동을 하는 등 음악 활동도 열심히 했으며, 사진에도 재능을 발휘하는 등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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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후미코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3~1951.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난한 부모를 따라 여러 지방을 떠돌아다닌다. 여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와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등 갖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를 꿈꾸며 고단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1930년 자신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방랑기』를 출판해 일약 인기 작가가 된다. 대공황의 와중에도 60만 부나 팔린 『방랑기』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은 당시 도시 생활자의 밑바닥 삶, 특히 여성의 자립과 가족, 사회 문제를 생생하게 그려내 대중에게 사랑받는 한편 다수의 작품이 영화, 연극,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1948년 제3회 여류문학자상을 수상하며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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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야쿠모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50년 6월 27일, 그리스 서부에 있는 레프카다섬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는 그에게 라프카디오 헌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두 살 때 아일랜드로 이주한 뒤 영국, 프랑스로 옮겨 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열여섯 살 때 친구들과 놀던 중 왼쪽 눈을 실명했다. 열아홉 살 때 자신을 돌봐주던 종조모의 파산으로,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가난을 경험한 후, 신시내티에서 저널리스트로서 글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 후 뉴올리언스, 카리브해 마르티니크 섬에 이주해 살면서 문화의 다양성에 매력을 느끼면서 왕성한 취재와 집필 활동을 이어간다. 뉴올리언스 시절에 만국박람회에서 알게 된 일본 문화, 뉴욕에서 읽은 <고사기> 등의 영향을 받아 1890년 4월 일본으로 건너온다. 그해 8월 마츠에에 있는 시마네중학교에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고베 크로니클사에서 근무한 뒤 1896년 9월부터 도쿄대학 문과대학 강사로 초빙되어 영문학을 강의한다. 그해 마츠에의 무사 집안의 딸인 고이즈미 세츠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일본에 귀화한다. 1903년에는 도쿄대학에서 해고되어, 나츠메 소세키에게 강사 자리를 물려주고 와세다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고이즈미는 일본 각지에 남겨진 괴담이나 기담, 전승문학 등을 수집해 독자적인 문학작품으로 다시 쓰며, 서양에 일본을 널리 알리는 작가로 활동했다. 번역.기행문.재화문학 장르를 중심으로 30여 점의 저서를 남겼다. 1904년 9월 26일 심장마비로 54세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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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구치 안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의 문학가.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炳五へいご). 다자이 오사무, 오다 사쿠노스케와 함께 일본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無賴派) 소설가이자 평론가로 평가된다. 본명은 사카구치 헤이고.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에서 태어났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시절부터 방랑벽과 방황이 심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 소설가 데뷔. 단편소설들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단편소설 <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후 1946년 2차대전이 끝난 후 패전 직후의 시대를 분석한 '타락론'과 '백치'로 당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작가가 된다. 1931년에 발표한 1932년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직접 [明治開化 新十郎探偵帖]을 쓰기도 했다. 이를 원작으로 한 UN-GO가 애니메이션화되었고, 2020년 5월에 NHK에서 시대극으로 드라마화한다. 그 밖에도 여러 편의 추리소설을 썼고, 매스컴에서 스캔들에 대해 서투른 추측를 하면 아예 내 밑으로 들어와서 추리 소설을 배우라고 일갈한 적도 여러번 있다. 국내에 번역 출판된 작품은 『투수살인사건(投手殺人事件)』, 『난킨무시살인사건(南京虫殺人事件)』, 『그림자 없는 살인(影のない犯人)』, 선거 살인사건, 불연속 살인사건 등이 있다. 시인 나카하라 츄야와 가까웠다. 사카구치 안고는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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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아쓰시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도쿄제국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한다. 이 시절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다. 지병이던 천식이 심해져 1941년에는 학교를 휴직했다. 같은 해 미크로네시아에 설치된 남양청에 취직이 되자 사직하고 팔라우로 간다. 이곳에서 식민지용 교과서 조사 및 편찬 작업을 담당했다. 1942년 귀국해 <산월기>, <문자화>, <우인(牛人)>, <영허(盈虚)>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같은 해에 첫 소설집인 ≪빛과 바람과 꿈(光と風と夢)≫도 출간되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다. 기관지 천식의 악화로 33세에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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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키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오타루상과대학 재학 때 학우회 잡지 ≪다루쇼(樽商)≫에 작품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졸업 후 홋카이도척식은행 오타루 지점에서 일했고, 친구들과 ≪클라르테≫라는 동인지를 펴내기도 했다. 동시에 사회주의적인 주제로 여러 소설을 발표했다. 유명한 작품으로 ≪방설림(防雪林)≫, <1928년 3월 15일>, ≪게잡이 공선(蟹工船)≫ 등이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활동이 원인이 되어 결국 은행원직을 잃는다. 도쿄로 가서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몇 번이나 투옥되었지만, 인기 있는 프롤레타리아 소설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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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키다 돗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 자연과의 대화를 통한 자기의 확립과 문학적 표현을 획득해 인생의 애상을 서정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은 자연 풍경 속의 조화로운 인간을 발견한 <잊히지 않는 사람들(忘れ得ぬ人々)>과 무사시노(武蔵野)의 자연미를 시적인 요소로 함축한 <무사시노>, 사교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인생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통해 돗포의 사상을 말하는 <쇠고기와 감자(牛肉と馬鈴薯)>,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임을 모르고 결혼한 남성의 고뇌를 다룬 <운명론자(運命論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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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오 주란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필명인 히사오 주란은 프랑스 유학 당시 스승이었던 거물급 연출가 샤를 뒬랭(Charles Dullin)의 일본어 발음에서 따온 것이다. 모험 소설, 추리 소설, 역사 소설, 유머 소설, 논픽션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했다. 대표작은 <해표도(海豹島)>, <곤충도(昆虫図)> 등이 있다. 작풍은 속도감 있는 문체와 세심한 인간 관찰에 따른 역설적인 논리, 빠르게 반전하는 전개가 주를 이룬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이민자나 방랑자, 다문화, 파국, 표류 같은 국가의 비호에서 멀어진 인간의 모습은 작가가 중요하게 다루었던 문학적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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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 사이세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다이쇼(大正) 시대부터 쇼와(昭和) 시대에 걸쳐 시·소설·하이쿠·수필·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단행본 기준 150권 이상의 저서를 간행했으며 그 가운데 20여 권의 시집과 80여 권의 소설집을 펴낸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자 소설가다. 하급 무사 출신인 아버지와 하녀였던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일주일 만에 인근 절의 주지승을 통해 양자로 입양된다. 주지승의 내연의 처에게 입양되어 자라면서 친부모와는 가깝게 교류하지 않았고 열 살 무렵 친부가 사망한 뒤 친모는 자취를 감추어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비롯된 자격지심과 그로 인한 반항과 고독에서 사이세이는 일생 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사이세이의 삶과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제는 이러한 태생적 결함을 극복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독립을 도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이세이 문학은 전통 시가인 하이쿠에서 시작한다. 양모의 권유로 14세 무렵 고등소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재판소에 급사로 취직을 한 그는 직장 상사에게 하이쿠의 기초적인 작법을 배운다. 이후 지역 신문이나 문예지에 시가나 산문을 발표하는 등 문학에 대한 열의를 쏟아붓는다. 초기에는 본명인 데루미치(照道)와 필명인 잔카(殘花)를 썼으며 17세 무렵부터는 사이세이(犀西)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사이세이(犀西)라는 이름은 당시 가나자와 출신의 고쿠부 사이토(國府犀東)의 필명 속에 담긴 ‘사이강의 동쪽(犀東)’이라는 의미에 상응하여 붙인 것이다. 그는 강의 서쪽에서 나고 자랐다는 의미를 담아 필명을 ‘사이세이(犀西)’라고 지었으며 나중에 같은 음의 한자인 ‘사이세이(犀星)’로 바꾼다. 1907년 그의 나이 19세 때 《신성(新聲)》에 발표한 시를 계기로 고다마 가가이(兒玉花外)의 지원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에 몰두한다. 아울러 1910년 22세 때에는 포부를 품고 상경하지만 무명 시절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경제적 궁핍과 불안정함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도시 생활에 지친 그는 미련 없이 고향 가나자와로 돌아간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삶 역시 녹록하지는 않았으며 가슴속에 품은 문학을 향한 열망은 그를 몇 번이고 다시 도쿄로 돌아오게 만든다. 도쿄와 가나자와를 오가며 이상과 현실 속에서 좌절을 반복하는 동안 그의 시에는 고향에 대한 애착과 고된 삶의 모습이 현실적인 감각과 이상 세계로의 환영으로 발현된다. 값싼 하숙방을 전전하며 곤궁한 생활을 하는 생활 속에서도 사이세이는 뜻이 맞는 문인들과 시사(詩社)를 결성하거나 동인지를 간행하는 등 시인·편집자·발행인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 간다. 20대 중반부터는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를 비롯하여 우에다 빈(上田敏),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과 친분을 이어 가며 문단의 중심에 선다.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던 시기 사이세이는 소설 창작에도 힘쓴다. 그가 소설로 영역을 확장하게 된 까닭은 불우한 성장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명심과 경제적 자립에 우선하는 것이었다. 1919년 31세에 〈유년시대(幼年時代)〉를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하여 높은 반응을 얻게 되고 그해에 〈성에 눈뜰 무렵(性に眼覺める頃)〉, 〈어느 소녀의 죽음까지(或る少女の死まで)〉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명성을 다진다. 초기 자전소설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유년 시대〉, 〈성에 눈뜰 무렵〉, 〈어느 소녀의 죽음까지〉는 태생적 속박과 자신의 상흔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와 더불어 사이세이는 한 해 30~4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는 창작욕을 보인다. 그런 성과로 46세에 양모와 절에서 함께 자란 형제들을 소재로 소설 〈남매(あにいもうと)〉(1934)를 발표하며 1935년 제1회 문예간담회상(文藝懇話會賞)을 수상한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 오다 1953년에는 영화화가 되기도 하고 1972년에는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한다. 소설이 많은 관심을 받은 것에 반해 사이세이는 점차 시를 쓰는 일에 소홀해 진다. 1932년 간행한 시집 《철집(鐵集)》에서 ‘더는 시집을 엮을 마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한 이래 1934년 8월에는 〈시여 그대와 헤어지노라(詩よ君とお別れする)〉(《문예(文藝)》)라는 글에서 마침내 시작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는 변화에 대한 의지와 시와 소설 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남매〉의 성공으로 자신의 문학적 생명을 소설에 걸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변혁기를 보내며 사이세이의 문학은 더욱 깊이를 더한다. 그는 타고난 미적 감각으로 전통적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일본의 정원을 소재로 하는 글을 다수 남기고 있다. 수필집 《정원을 만드는 사람(庭を造る人》(1927), 《정원과 나무(庭と木)》(1930), 《일본의 정원(日本の庭)》(1943)이 그것이다. 그는 1931년 가루이자와에 별장을 짓고 매년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며 집과 정원을 직접 가꾸는 것을 취미로 삼는다. 이 별장은 자신과 친분이 깊은 호리 다쓰오(堀辰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등 많은 문인들이 드나드는 교류의 장소가 되었으며 사이세이 자신 역시 이 별장에서 〈성처녀(聖處女)〉(1935), 《살구 아이(杏っ子)》(1956) 등과 같은 작품을 저작한다. 전시기에 이르러 사이세이는 《천황의 군대(美以久佐)》(1943)와 《일본미론(日本美論)》(1943)에서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여 전후 논란의 중심에 선다. 이에 도미오카 다에코(富岡多惠子)는 ‘시인은 대중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해 주는 능력자로서 국가에게 이용당하는 시대도 있다. 전쟁 시대에 시인은 국책에 봉사하는 선전가·선동가로만 기대되었을 것이다’라며 사이세이를 옹호하기도 한다. 사이세이는 《무로 사이세이 전시집(室生犀星全詩集)》(1962)에서 ‘오늘 이들 시를 지우는 것은 마음속의 더러움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며 논란이 된 전쟁시를 삭제한다. 오랜 문학 활동을 통해 높은 문업을 이룬 사이세이는 제1회 문예간담회상(文藝懇話會賞)(1935), 제3회 기쿠치간상(菊池寬賞)(1941), 제9회 요미우리문학상(讀賣文學賞)(1958), 제13회 마이니치출판문화상(每日出版文化賞)(1959), 제12회 노마문예상(野間文藝賞)(1959) 등을 수상한다. 1961년 10월 73세에 폐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쇠약 증세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1962년 3월 1일 도쿄 도라노몬(虎の門) 병원에 입원한 뒤 의식 불명에 이른 19일로부터 일주일 후 3월 26일 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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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쓰 류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메이지와 다이쇼(大正, 1912-1926)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1861년 6월 8일 나가사키현(長崎県)에서 아버지 히로쓰 도시조(広津俊藏), 어머니 리우(柳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히로쓰 나오토(広津直人)이다. 1877년 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제국대학 의학부 예비과에 입학했으나, 폐첨(肺尖) 카타르로 중퇴하였다. 그 후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사업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농상무상의 관리가 되었지만, 일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소설류를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1883년에 부모를 모두 여윈 후 생활은 방탕해졌고 도쿄 생활이 어려워져 낙향한다. 이때 겪은 가난은 그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887년 친구인 화가의 권유로 정치소설 「여자참정신중루(女子参政蜃中楼)」를 <도쿄에이리신문(東京絵入新聞)>에 연재한 뒤, 죽음을 앞둔 결핵 환자의 심리를 그린 「잔국」(1889), 「지는 동백(おち椿)」(1890), 「작은 배의 폭풍(小舟嵐)」(1890~91) 등 주관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발표하여 호평을 얻는다. 1895년에는 사실적 수법으로 전환해 심각(비참)소설 「변목전(変目伝)」, 「흑도마뱀(黒蜥蜴)」 등을 발표한다. 1996년에는 심중소설의 걸작으로 불리는 「이마도 정사(今戸心中)」, 「가와치야(河内屋)」 외에 「엉킨 실(もつれ糸)」(1899), 「메구로코마치(目黒小町)」(1900) 등으로 인간의 애욕과 집념을 그렸다. 또한 1902년에 발표한 「비(雨)」에서는 민중들의 가난한 생활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 화제가 되었다. 메이지시대에 활동한 문학결사인 겐유사(硯友社)에 속하면서도 이채를 띠는 그의 문학 세계는 지금도 많은 문제점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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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철 (옮긴이)    정보 더보기
≪일본 명단편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15∼2021) 주제별 전10권을 기획했다. 한일비교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및 동 대학원(일본문학) 수료, 도쿄대학 대학원(비교문학비교문화) 박사과정 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일본연구소장, 외국문학연구소장, 도서관장, 일본어대학장과 세계문학비교학회장, 한국일어일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사회 봉사로는 한국문학번역원, 대산문화재단, 대한민국학술원 등의 심사 위원을 역임하고, 서울시교육청동대문도서관과 협력하여 시민인문대학을 개설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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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희 (옮긴이)    정보 더보기
중앙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주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다. 저역서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학의 이해≫, ≪20세기 일본 문학의 풍경≫, ≪일본 근대 작가·작품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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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나고야대학 대학원 국제언어문화연구과(일본언어문화전공)에서 박사과정 수료. 문학박사다. 현재 충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서 강사로 근무하고 있다. ≪이야기와 감동이 있는 일본 문화 탐방≫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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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금 (옮긴이)    정보 더보기
전공은 일본 근대문학·일한 비교문학[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이광수(李光洙) 작품을 둘러싼 여성 표상과 일한 비교 젠더론 연구]이다. 일본 도쿄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만기 수료했다. 현재 도쿄 세이토쿠대학 국제학부 강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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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학과 조교수·경북대학교 일본연구센터 센터장 1930년대 '제국 일본'의 모던을 주제로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学)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근대의 대중문화에 대해 도시, 매체, 젠더, 식민지 등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잡지 미디어를 중심으로 일본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적 특성에 대해 규명하고자 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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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옮긴이)    정보 더보기
일본 쓰쿠바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문학박사). 박사 학위논문은 <아베 고보 소설로 본 현대 일본 문화-아베 고보의 텍스트성(安部公房の小説から見る現代の日本文化-安部公房のテキステュアリティ)>으로,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아베 고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덕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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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향 (옮긴이)    정보 더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일본 근현대문학을 전공했으며, 전후 초현실적 작풍으로 인간 존재의 불안을 탐구한 아베 고보를 연구했다. 현재는 광고 기획과 편집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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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옮긴이)    정보 더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다. 메이지 게사쿠(明治戯作) 및 일본 개화기 문학(開化期文学) 가운데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의 작품에 나타난 과도기 신구 양상과 민중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논문으로는 <가나가키 로분의 ≪양반다리 전골냄비≫에 나타난 서구관>이 있다. 번역에는 <진주>(사카구치 안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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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준 (옮긴이)    정보 더보기
도쿄대학 대학원 비교문학 비교문화전공 석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이후 2013년에 오타루상과대학(小樽商科大学)에서 준교수로 8년간 일했다. 현 무사시노대학(武蔵野大学) 교수. ≪‘동양’을 춤추는 최승희 (‘東洋’を踊る崔承喜)≫를 출판했으며 이 책은 2020년 제42회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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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연 (옮긴이)    정보 더보기
한국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서 석박사 학위 취득. 연세대학교 언어연구교육원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암호>, <전쟁과 한 명의 여인>(이상 사카구치 안고) 등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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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늙음’이 찾아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난’ 이상으로 미워하고 있는 대상이다. 이상하게도 ‘늙음’조차도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또다시 ‘가난’에게 물어본 것과 같은 어조로,
“네가 ‘늙음’이냐?”라고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곁에 와 있는 자의 얼굴을 찬찬히 보니, 지금까지 내가 가슴에 품고 있던 것은 진정한 ‘늙음’이 아니라 ‘위축(萎縮)’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곁에 와 있는 것은 더 빛나는 것이고 더 고마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문객이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온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나는 더 자주 대화해 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 손님에 대해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늙음’이 지닌 미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아무쪼록 나는 이 손님에 대해 잘 알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도 참되게 나이를 먹고 싶다.
-시마자키 도손, <세 명의 방문객>


“그 꽃을 주세요.”
그때 그 해골은 깜짝 놀라, 저 녀석은 늘 전등 아래에 앉아 있던 녀석이군, 하고 생각했다, ― 저 녀석은 이런 데까지 나와서 나에게 또 조르는군, 하고 생각했다.
“이런 꽃을 너는 뭐에 쓸 셈이냐 ―.”
하지만 다른 해골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 꽃은 대단히 아름답고 귀여운걸.”
“후우! 너는 아직도 꽃 따위를 신경 쓰고 있는 거냐.”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비로소 다른 해골은 정신이 들어 기쁜 듯이 이번에는 거리낌 없이 제비꽃을 확 꺾어 버렸다.
-무로 사이세이, <해골>


긴이 다나베를 알게 된 것은 스미코 부부가 도쓰카(?塚)에서 학생 상대로 전문 하숙집을 경영하고 있었을 무렵으로 긴은 3년 정도 같이 부부로 살았던 남편과 헤어지고 스미코의 하숙집에 방 한 칸을 빌려서 편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이다. 긴은 스미코의 하숙집 거실에서 오다가다 마주쳤던 학생인 다나베와 알게 되어 부모 자식 정도로 나이가 동떨어진 다나베와 어느 사이엔가 남의 이목을 의식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야시 후미코, <늦게 피는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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