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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이야기

정원 이야기

알베르 카뮈,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니아 울프, 라이너 마리아 릴케, 토머스 하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카렐 차페크, 사키, 마르셀 프루스트, 나쓰메 소세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오 헨리, S. T. 콜리지, 헤르만 헤세, 에밀리 디킨슨 (지은이), 이재경, 박경리, 이은미, 양은경 (옮긴이)
유선사
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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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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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정원 이야기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91199013599
· 쪽수 : 244쪽
· 출판일 : 2026-06-26

책 소개

「이야기의 낮과 밤」 시리즈의 첫 권 『정원 이야기』는 ‘정원’을 단순한 자연의 배경으로 다루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정원은 식물을 돌보는 장소를 넘어, 인간이 자연과 관계를 맺고, 혼자 있는 법을 배우며, 시간을 견디고, 자신의 감정을 정돈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목차

새로운 발걸음이 나의 정원에 오가고 _ 에밀리 디킨슨

1부 정원은 빛으로 열린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_ 알베르 카뮈 (에세이)
가든파티 _ 캐서린 맨스필드 (소설)
큐 가든 _ 버지니아 울프 (소설)
장미 그릇 _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정원 의자 _ 토머스 하디 (시)

늦여름 _ 헤르만 헤세

2부 계절을 지나온 자리

새잎이 돋는 정원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산문시)
『정원사의 열두 달』 중에서 _ 카렐 차페크 (에세이)
때때로 정원 _ 사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_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
『유리문 안에서』 중에서 _ 나쓰메 소세키 (에세이)

꽃받침 하나, 꽃잎 하나, 그리고 가시 하나 _ 에밀리 디킨슨

3부 나의 정원

장미 정원의 그림자 _ D. H. 로런스 (소설)
지나간 봄 _ 콜레트 (소설)
장미, 계략 그리고 로맨스 _ 오 헨리 (소설)
「이 보리수 그늘, 나의 감옥」 중에서 _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시)
정원에서 _ 헤르만 헤세 (에세이)
「풀은 참으로 한가하지요」 중에서 _ 에밀리 디킨슨 (시)

저자소개

오 헨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단편소설 작가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내과의사인 아버지 알게몬 시드니 포터와 어머니 메리 제인 버지니아 와인 포터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잃어 숙모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2년 텍사스로, 1884년에는 오스틴으로 이주하면서 목장 관리, 제도사, 기자, 은행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였다. 1887년 아솔 에스테스와 결혼했으며, 1891년 오스틴은행에 근무하면서 아내의 내조를 얻어 주간지를 창간했으며, 지방신문에 유머러스한 일화를 기고하는 등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년 2월 은행 공금횡령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온두라스로 도피했으나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체포되었다. 1898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교도소의 병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면서 딸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고, 즉각 잡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며, 출감하면서 이름을 오 헨리란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03년 12월부터 1906년 1월까지 뉴욕의 《월드(World)》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였다. 최초의 소설집 《캐비지와 왕(Cabbages and Kings)》(1904)을 시작으로, 《400만(The Four Million)》(1906), 《손질 잘한 램프(The Trimmed Lamp)》(1907), 《서부의 마음(Heart of the West)》(1907) 등의 단편집을 계속해서 출간했다. 헨리의 말년은 악화된 건강, 금전상 압박과의 싸움, 알코올 중독 등으로 얼룩졌다. 1907년에 한 재혼은 불행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와 간경화, 당뇨병 등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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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로, 1867년 현재의 도쿄 신주쿠구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의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1900년 문부성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서 영국에서 2년간 유학하며 영어수업법을 연구했으며 귀국 후에는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의 강사로 일했다. 1905년 발표 및 연재한 장편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큰 호평을 받은 후 『도련님』 『풀베개』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1907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하여『우미인초』를 연재하면서 전업 작가로서 집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 후』 『문』 『마음』 등의 작품을 연재하며 독자들의 사랑과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6년 12월 9일, 『명암』을 집필하던 중 거듭된 위궤양 악화로 49세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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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은이)    정보 더보기
프라하에서 태어나 황립 사관학교와 린츠 상업 아카데미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아비투어 획득(1895). 프라하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 등을 옮겨가며 철학, 미술사 등을 수학했다. 뮌헨에서 만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라는 본명을 ‘라이너’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바꾸고(1897), 루와 함께 러시아를 두 번 방문하여, 톨스토이(1899)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1900)를 만났다. 보릅스베데에서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를 만나 혼인하고(1901), 인젤 출판사의 의뢰로 『로댕론』(1907) 집필을 위해 파리로 로댕을 방문했다(1902).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징집, 전쟁기록문서실에 배속되었고(1916), 징용 해제 후 스위스에 거주하며(1919), 독일을 제외한 유럽 각지와 이집트를 여행했다. 18세에 첫 시집 『인생과 노래』(1893)를 발표한 후, 『시도집』(1899, 1902, 1903), 『형상시집』(1902), 『신시집』(1907), 『신시집 별권』(1908), 『두이노의 비가』(1912-1922), 『오르베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2) 등 2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했고, 『말테의 수기』(1910)는 독일 최초의 현대소설로 꼽힌다. 릴케는 1926년 스위스 발몽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51세의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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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1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병약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키워간다.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대학교 법학과와 파리정치대학에서 공부하지만, 1895년 문학 학사학위를 취득하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 한편으로 사교계에 활발히 드나들며 당대 예술가, 작가 들과 교유를 나누면서 19세기 귀족사회와 인간관계를 유심히 관찰한다. 1896년에 소설과 단편 등을 엮은 첫 책 『쾌락과 나날』을 출간하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1913년 자비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출간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1919년 선보인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로 공쿠르상의 영예를 안는다. 이에 힘입어 이듬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훈장을 받는다. 이후 계속해서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집필에 몰두하여 1921년 4편 「소돔과 고모라」 첫 권까지 출간하지만, 1922년 폐렴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부모님과 같은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1927년 7편 「되찾은 시간」 출간으로 비로소 장대한 기념비적 소설이 집대성된다. 프루스트가 생전에 출간한 그 밖의 책은 비평적 산문을 모은 『모작과 잡록』(1919), 영국 비평가인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 『참깨와 백합』 번역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본성, 사랑과 예술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실험적인 문체와 철학적인 사유로 그려낸 필생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 문학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으로 불리며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소설로 지금도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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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맨스필드 (지은이)    정보 더보기
뉴질랜드 태생의 영국 소설가로 웰링턴과 런던에서 교육받은 후 열아홉 살에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까지 《리듬》 《블루 리뷰》 등에 단편을 발표했고 1920년에 발표한 《환희》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1922년에 발표한 단편집 《가든 파티》 는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최고로 만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맨스필드는 5년간 결핵으로 고생하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맨스필드의 남편이자 평론가 존 미들턴 머리는 그녀가 남긴 기록을 정리해 《일기》(1927)라는 제목으로 펴냈으며, 그녀가 자신에게 쓴 편지에 주석을 붙여 《서간집》(1928)으로 출간했다. 맨스필드의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 섬세함과 완곡한 서술, 날카로운 통찰력을 고루 갖추었다고 인정받는다. 또한 매우 시적이고 독특한 산문 문체를 발전시켜 단편소설이 문학의 한 장르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쳐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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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82년 영국 런던에서 당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문필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과 어머니 줄리아 프린셉 덕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자 형제들처럼 공식 대학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많은 책을 탐독하며 시간을 보냈다. 13세가 되던 해인 1895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처음으로 신경 쇠약을 앓았고, 1904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재발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이후 화가인 언니 버네사와 함께 블룸즈버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지식인, 예술가 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울프가 주축이 되어 활동한 이 모임은 훗날 <블룸즈버리 그룹>으로 알려진다. 1912년 그룹의 일원이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했으며, 남편과 함께 호가스 출판사를 차려 T. S. 엘리엇과 E. M. 포스터의 작품 등을 출간했다. 1915년에 첫 소설 『출항』을 발표한 후 『밤과 낮』(1919)을 거쳐 실험적인 성격을 띤 『제이컵의 방』(1922)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평론, 집필,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모더니즘 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올랜도』(1928), 『파도』(1931) 등의 소설들과 페미니즘 필독서가 되다시피 한 『자기만의 방』(1929) 등 여러 편의 산문들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시골집으로 피신했지만, 심해지는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다가 1941년 3월 이른 아침 강가로 나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과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버지니아 울프는, 오늘날 영문학의 기념비적 작가이자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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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지은이)    정보 더보기
그 모든 것에 항거하며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구역의 공립 학교에서 L. 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나는 자유를 빈곤 속에서 배웠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알제리에서 보낸 유년기는 그가 작가적 양분을 공급받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1923년 프랑스 중등학교 리세에 입학했고, 이후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자퇴를 했다. 결핵 발병으로 누구보다 좋아했던 축구를 포기했다. 바칼로레아 준비반에서 철학 교수이자 에세이스트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 큰 영향을 받고, 이후 평생 그와 교류를 이어갔다. 어렵게 대학에 진학해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하는 동시에 정치 활동과 연극 활동에 집중했다. 1932년 장 그르니에가 주도한 조그만 월간 문예지 [쉬드Sud]를 통해 처음으로 첫 에세이 《새로운 베를렌Un Nouveau Verlaine》을 발표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결핵으로 교수가 될 것을 단념하고 졸업한 뒤에는 진보적 신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던 그는 비판적인 르포와 논설로 정치적인 추방을 당하기도 했고, 프랑스 사상계와 문학계를 대표했던 말로, 지드, 사르트르, 샤르 등과 교류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몰입했다. 1937년 첫 산문집 《안과 겉》을 발표하고, 이듬해부터 [알제 레퓌블리켕]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겨 [파리수아르]의 기자가 된다. 독일에 점령당한 파리에서 검열을 피해 지방으로 옮긴 [파리수아르]를 따라 이동하는 동안에도 집필 활동에 매진한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42년 7월, 자신의 첫 소설이자 대표작이 되는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 tranger》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즈음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프랑스 해방 운동에 참여한 카뮈는 철학 에세이 《시시포스 신화》(1943), 희곡 작품 「오해」(1944)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또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악성,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로 문학계의 대반향을 일으켰고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지성계에 큰 논쟁을 촉발한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0년 가까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전락》을 발표하면서 사르트르에게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를 발표하며 문학가를 넘어 사상가로도 인정받기 시작했고, 실존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엄마, 무명인, 그리고 나의 ‘죽음’을 연달아 맞닥뜨리며 삶의 부조리를 고뇌하는 모습은 이후 오랫동안 수많은 독자를 실존주의의 세계로 이끈다. 와 라는 희곡을 쓰며 희곡 작가로도 활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대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알제리 독립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 가지만, 카뮈는 생전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부조리한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 1월 4일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사고 차량에 있던 가방에서 초고 형태로 발견된 《최초의 인간》은 1994년에야 빛을 보게 된다. 이 외에도 《여름》, 《유배지와 왕국》, 《행복한 죽음》, 《정의의 사람들ㆍ계엄령》, 《결혼, 여름》, 《태양의 후예》, 《젊은 시절의 글》, 《스웨덴 연설ㆍ문학 비평》, 《최초의 인간》, 《여행일기》, 《단두대에 대한 성찰ㆍ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전락·추방과 왕국》, 《안과 겉》 등의 작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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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30년 12월 10일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애머스트(Amherst)에서 변호사이자 정치가, 대학 이사였던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Edward Dickinson)과 어머니 에밀리 노크로스(Emily Norcross)의 사이에서 세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애의 대부분을 애머스트에서 살았다. 또한 그녀는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은둔 생활을 했는데, 1872년 이후로는 의사도 집으로 찾아와 약간 열린 문틈으로 걸어 다니는 그녀를 보며 진찰을 해야 했을 정도로 과도한 대인 기피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디킨슨이 은둔 생활을 하게 된 것은 그녀의 악화된 시력은 물론,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던 병약한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는 딸로서의 책임감, 종교 문제, 아버지와의 사고방식 차이, 식구들 사이에서의 경쟁의식, 그리고 주 의원으로 활동하던 아버지로 인해 끊임없이 드나들던 손님들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거부감 등에서 기인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로, 그녀의 생애에 걸쳐 몇 번 있었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위기를 들 수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바깥세상과 점점 담을 쌓게 된 것이다. 특히 디킨슨을 “북극광처럼 빛나는” 존재로 여기던 로드 판사가 1884년에 죽자 실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다가, 그녀 자신의 건강까지 악화되어 그녀조차 1886년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녀는 55년 5개월 5일간의 생애를 마치게 된다. 디킨슨은 초등교육 과정을 거친 후, 애머스트 아카데미(Amherst Academy)에서 희망하는 강좌를 선택해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과 문예 창작 훈련을 받았으며, 약 1년간의 신학교 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이 밖의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성서보다는 문학작품에 더 많은 흥미를 가졌던 그녀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것과 창작에 대한 열의와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책을 깊이 탐독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녀의 삶과 자아 탐색 정신이 세상과 단절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지만, 사실 그녀는 실제로 만나 접촉을 하지는 않았어도, 서신을 통해 당대 최고의 지성과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과 시를 교류하며 부단한 교우 관계를 가졌다. 그녀는 또한 자선 단체와 어린 시절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유명한 작가이던 헬렌 헌트 잭슨(Helen Hunt Jackson)에게 출판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생전에 출판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를 거부했다. 그녀는 종교의 반항아로서 청교도 신앙에 대해 회의를 품었으며, 구원의 희망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친한 친구를 비롯한 많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일찍부터 기독교의 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강한 회의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녀로 하여금 전통의 사고방식과 기존 종교에 대한 불신과 전통적인 시 형식에 대한 반발로 나아가도록 했고, 이러한 사고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시에 혁신적인 요소를 불러오며 시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 일찍이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하도록 했다. 그녀 생전에는 그녀의 요구에 의해 그녀의 시가 익명으로 일곱 편밖에 출간되지 못했지만, 그녀 사후에 44개의 시 꾸러미가 여동생 러비니아 노크로스 디킨슨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평생에 걸쳐 그녀의 문학 상담 역할을 해왔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 작가인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Thomas Wentworth Higginson)과 토드 부인(Mrs. Todd)의 주선으로 1775편의 시가 세 권의 시집으로 1890년, 1891년, 1896년에 연속 출간되고, 두 권의 서간집이 1894년에 출간되었다. 시인으로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던 디킨슨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1955년 토머스 존슨(Thomas H. Johnson)에 의해 그녀의 시선집이 출판됨으로써 그녀는 오늘날 위대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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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지은이)    정보 더보기
890년 체코 북부의 작은 도시 말레 스바토뇨비체에서 태어났다. 체코 프라하와 독일 베를린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1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6년 형 요세프 차페크와 함께 쓴 산문집 《빛나는 심연》을 시작으로 소설, 에세이, 희곡, 동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했다. 동시에 체코의 일간지 《나로드니 리스티》, 《리도베 노비니》 등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1920년 ‘로봇’이라는 말을 세상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희곡 《R. U. R.》을 펴냈고, 1933년부터 체코 문학의 최고봉이자 차페크 문학의 정수라 불리는 철학소설 3부작 《호르두발》, 《별똥별》(1934), 《평범한 인생》(1934)을 연달아 출간했다. 일곱 차례 이상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당시 유럽을 장악했던 나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번번이 수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차페크는 명실공히 프란츠 카프카,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 문학을 대표하는 3대 작가로 손꼽힌다. 그 밖의 주요 작품으로는 희곡 《곤충 극장》(1921), 장편소설 《도롱뇽과의 전쟁》(1936),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1929), 《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1939) 등이 있고, 인상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1924), 《조금 미친 사람들》(1930) 같은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체코를 점령하기 몇 달 전, 지병인 폐렴이 악화되어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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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하디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다. 1840년 6월 2일 도체스터 근방 하이어보켐턴에서 석공인 아버지와 독서를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 남부의 웨섹스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는 그의 고향 도체스터를 모델로 한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하디는 내성적이고 몸이 약했다. 학교에서 받은 공식 교육은 약 8년 동안의 이 기간이 전부다. 하디는 16세에 도체스터의 건축사무소에 수습공으로 들어가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6년간 지속했던 건축 일은 소설 쓰기와 함께 그의 중요한 경력이 되었다. 1867년 후반에 첫 소설인 《가난뱅이와 귀부인》을 썼다. 1870년 봄, 교회 건물의 복원 작업 문제로 콘월의 세인트 줄리엇으로 파견되는데, 그곳 목사관에서 에마 기퍼드를 만난다. 1874년에 에마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고, 대표작 《테스》와 《무명의 주드》를 집필했다. 1893년, 하디 부부는 더블린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단편 소설 집필을 함께했던 작가 플로렌스 헤니커를 만난다. 하디의 시편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그녀에게 상당한 애정을 품게 된다. 당시 하디는 결혼 생활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아내 에마는 하디의 글쓰기에 많은 도움도 주었지만 에마는 변호사의 딸로서 자신이 하디보다 우월한 계급 출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이러한 신분의 차이는 결국 그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의 원인이 되었다. 이혼을 쉽게 허용하지 않던 경직된 당대의 사회 현실 속에서,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은 《숲의 사람들》, 《무명의 주드》에서 심도 있게 형상화된다. 특히 하디의 《무명의 주드》는 사촌 간의 사랑을 다룬 것 때문에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소설로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하디는 이 작품을 끝으로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시와 극작에 전념했다. 말년 30년간은 영예로운 일들이 많았다. 1910년에 국왕으로부터 공로 대훈장을 받았고, 1920년과 1925년에 각각 케임브리지대학과 옥스퍼드대학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애버딘·브리스틀대학 등에서도 명예 학위를 받았다. 1912년에 아내 에마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불행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난 세인트 줄리엇으로 참회의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14년 2월, 74세의 하디는 자신의 비서인 플로렌스 덕데일과 재혼한다. 그녀는 후에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한다. 그녀는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했으나 이 두 번째 결혼도 크게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노년에 들어서도 하디는 시작(詩作) 활동을 계속했지만, 87세가 되던 해의 겨울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다. 1928년 1월 11일, 하디는 플로렌스에게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시편을 읽어 달라고 부탁해 이를 듣고선 밤 9시경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던 고인의 뜻을 받들어, 심장은 도싯의 스틴스퍼드 교회에 있는 에마의 묘 옆에 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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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7년 독일 남부 도시 칼프에서 개신교 목사이자 선교사인 아버지와 유서 깊은 신학자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위스 바젤과 칼프에서 성장했다. 열다섯 살 때 재학 중이던 신학교를 그만두며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 헤세는 그해 6월 삶의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신경쇠약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인문계 중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다니다 다시 학업을 중단했고, 시계 공장과 서점 등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며 글쓰기에 전념했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첫 산문집 『자정 너머 한 시간』을 발표하면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정 너머 한 시간』 출간을 결정한 독일 디더리히스 출판사의 대표 오이겐 디더리히스는 “이 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그 문학적 가치를 확신한다”라며 헤세에게 작가로서의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 책으로 독일 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헤세는 1904년 『페터 카멘친트』로 큰 주목을 받으며 일약 유명 작가로 발돋움했고,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청춘은 아름다워』 등을 발표하며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포로구호’에서 일하며 전쟁포로들과 억류자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정치적 논문과 선전문 등을 발표하며 전쟁의 비인간성을 규탄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독일 내에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전쟁 기간 당시 정신적 어려움을 겪다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심리치료를 받았으며, 종전 뒤인 1919년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젊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작품성 역시 인정받아 베를린시에서 주관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했다. 이후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등 여러 작품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군국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이고 나치를 경계한다는 이유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나치 집권 이후에는 독일 내에서 작품의 제작과 판매가 어려워졌다. 종전 뒤인 1946년부터 독일에서 다시 헤세의 작품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했다. 1950년 브라운슈바이크시에서 주관하는 빌헬름 라베 상을, 1955년 서독출판협회에서 주관하는 평화상을 수상했다. 1962년 스위스 몬타뇰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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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T. 콜리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72년 10월 21일 영국 데번 주(州)의 오터리슨트메리에서 목사이자 교사인 아버지 존 콜리지와 어머니 앤 보든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세 때인 1791년 10월에 콜리지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지저스칼리지에 입학했고, 1792년 7월에는 노예무역에 관한 그리스어 송가로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797년 봄에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 남매를 만나 우정을 쌓기 시작했는데, 워즈워스는 콜리지와 가까이 지낼 생각에서 도셋 주에서 이주하기까지 했다. 두 시인 모두에게 유익했던 이 ‘창조적 공생’의 시기는 영문학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우정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에 콜리지는 워즈워스와의 대화를 통해 젊은 시인과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다듬었고, <노수부의 노래> <쿠블라 칸> <크리스타벨>(제1부) <한밤의 서리> 등의 뛰어난 시편들을 썼다. 두 시인의 ‘창조적 공생’은 1798년 늦여름에 영국 낭만주의의 서막을 연 작품으로 간주되는 ≪서정담시집≫이 발간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1800년에 호반지방의 그래스미어에 정착한 워즈워스 일가의 집에서 약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케직의 ‘그레타홀’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처음에 새 환경을 마음에 들어 했던 콜리지는 <크리스타벨>의 제2부를 워즈워스 남매에게 읽어 줄 때처럼 여러 차례 헬벨린 산(해발 950미터)을 넘어 워즈워스의 집을 방문하곤 했지만, 잦은 병 때문에 점점 더 아편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 그는 실험적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들을 확대하면서 “신경 체계에 해가 될 정도로까지” 자신의 감각에 숱한 실험을 했는데, 이 해로운 “난해한 연구”는 <낙심 송가>에서 언급되고 있다. 1810년 3월에 연인인 새러 허친슨과, 또 10월에 워즈워스와 결별한 이후 1816년까지의 콜리지의 삶은 사적으로는 황폐했지만 놀랄 정도로 생산적이었다. 그는 수차례 대중 강의를 했고, 신문에 기고했으며, 자신이 쓴 비극이 상연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시집 ≪무녀의 엽편들≫(1817)을 준비했고, 문학 비평의 기념비적 저작이자 문학적 자서전인 ≪문학 평전≫(1817)의 저술에 착수했다. 1816년 4월에 친구인 의사 제임스 길먼이 콜리지를 맡아 그의 병과 아편중독을 관리해 주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길먼의 집에 거주하면서 치료를 받았던 콜리지는 1824년에 당시 막 창립된 왕립문학원에서 연금 100파운드를 받는 준회원이 되었다. 콜리지의 저작의 상당 부분은 이 하이게이트 시기에 저술되었는데, 특히 ≪사색의 길잡이≫와 ≪교회와 국가의 구성 원리≫는 빅토리아 시대의 막 부상하는 세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이게이트의 현자(賢者)’로 불렸던 그는 1834년 7월 25일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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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 (지은이)    정보 더보기
간결한 문체, 탄탄한 구성의 짧은 글에 예상치 못한 강렬한 반전을 안겨, 동시대의 오 헨리나 안톤 체호프에 비견되는 작가. 본명은 헥터 휴 먼로(Hector Hugh Munro)이다. 1870년 12월 18일 영국령 버마 아키아브(지금의 미얀마 시트웨)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이태 만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그는 영국의 할머니와 두 고모 밑에서 자라게 된다. 매우 엄격한 청교도 집안이어서 억압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19세기 후반 신문 저널리즘의 발달에 따라 런던 언론계로 나온 그는 《웨스트민스터 가제트》지에 정치 풍자 칼럼을 기고한다. 이 글들을 묶어 책으로 출간하면서 '사키'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사키'는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시집 『루바이야트』에 나오는 술을 따르는 미소년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엄숙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 자유롭고 예술적인 에드워드 시대가 시작되고, 1902년 《모닝 포스트》지의 해외 특파원이 된 사키는 발칸 반도, 러시아, 폴란드, 파리 등지를 다니며 기사를 보내는 한편, 마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한 태평하고 제멋대로인 청년 레지널드의 기행을 담은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이 단편들을 모아 『레지널드』(1904)로 출간하고, 이후 레지널드보다 더 장난이 심하고, 자유분방한 인물 클로비스가 나오는 단편들을 모아 『클로비스의 연대기』(1911)로 출간한다. 어린 시절, 동물을 싫어했던 엄한 고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동물을 좋아하게 된 사키는 동물의 눈에 비친 모순되고 위선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은 『짐승과 초짐승』(1914)을 출간한다. 1916년 11월 14일,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전선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의 사후에 출간된 단편집 『평화 장난감』(1919)과 『네모난 달걀』(1924)에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화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단편소설의 대가였던 오스카 와일드나 러디어드 키플링 등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사키는 로알드 달과 『곰돌이 푸우 이야기』로 유명한 A. A. 밀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말하는 고양이나 늑대 인간, 마법에 걸린 마을 등 비현실적인 소재에 환상 기법으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위트, 쓸쓸한 블랙 유머가 빛나는 단편 142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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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85년 9월 10일 잉글랜드 중부 지방 노팅엄 근교 탄광 지대에서 아버지 존 아서 로렌스와 어머니 리디어 비어즐 로렌스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 광부로서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중산층 출신의 교사였다. D. H. 로렌스는 문학을 좋아하고 교양이 있으며 엄격한 청교도였던 어머니 덕분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고학으로 1908년 노팅엄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간간이 시를 발표하던 그는 26세가 되던 1911년 폐렴에 걸려 요양을 하게 된다. 이듬해 그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그보다 네 살이 위였던 독일인 프리다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그녀는 노팅엄 대 은사의 부인이었다). 이미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로렌스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했으며 로렌스는 1913년 장편 『아들과 연인』을 발표한다. 그는 1914년 프리다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고 부인이 전 남편과의 이혼에 성공하자 정식으로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입대를 지원했으나 폐병 때문에 거부당했다. 그해 그는 최초의 단편집 『프러시아 장교들과 다른 사람들』을 발간한다. 이어서 그는 1915년에 장편 『무지개』를 발간했고, 1920년 이탈리아 피렌체로, 이어서 1922년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동안 그는 『사랑에 빠진 여인들』을 비롯해 다수의 작품들을 미국에서 발표해 호평을 받았으며 1925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 발표 후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베니스 요양원에 입원했다가 1930년 3월 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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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의 소설가로 189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재학 당시 「노년」, 「라쇼몬」, 「코」를 발표하면서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이중 「코」가 일본의 ‘국민 작가’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으며,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를 거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10년 남짓한 짧은 창작 기간에도 「라쇼몬」, 「덤불숲」, 「지옥변」, 「신들의 미소」, 「서방의 사람」, 「톱니바퀴」, 「갓파」 등에서 끊임없이 인간과 예술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만년에 이르러 신경쇠약, 불면증, 환각 증상을 보이다 1927년 7월 도쿄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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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3년 부르고뉴 생소뵈르앙퓌제에서 마르티니크 혈통의 어머니 시도니 랑두아와 세관이었던 아버지 쥘조세프 콜레트의 차녀로 태어났다. 콜레트는 1893년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로 유명했던 열네 살 연상의 앙리 고티에빌라르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이후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한 남편에 의해 남편의 필명인 ‘윌리’라는 이름으로 이른바 〈클로딘〉 연작에 속하는 여러 소설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앙리가 콜레트의 허락 없이 소설의 판권을 매각한 것이 원인이 되어 1905년부터 콜레트는 별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하였다. 1910년 법적으로 앙리와 이혼한 콜레트는 경험을 바탕으로 『방랑하는 여인』을 발표하고 외교관인 필리프 베르톨트의 후원을 받아 폴 클로델, 장 지로두 등과 교유하였으며, 정치인이자 언론인인 앙리 드 주브넬의 도움으로 「르 마탱」 지에 정기적으로 글을 실었다. 1913년 그와의 사이에서 외동딸인 콜레트 르네 드 주브넬을 얻었고, 남편의 외도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셰리』를 1920년에 발표하여 큰 성공을 얻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서훈받았다. 1923년 앙리 드 주브넬과 이혼한 콜레트는 『청맥』과 『셰리의 최후』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사업가였던 모리스 구드케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독일 제3제국의 파리 점령기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구금되었다가 두 달만에 풀려나는 고초를 겪었다. 전시의 생계 문제와 지병인 관절염에 고생하던 콜레트는 「지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집필하고 여러 신문에 글을 싣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집필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비정치주의를 지향하던 그의 글이 진영을 막론하고 다양한 지면에 수록된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전후 1945년 아카데미 공쿠르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3년 레지옹 도뇌르 그랑 도피시에 훈장을 서훈받았다. 1954년 숨을 거두었으며, 장례식은 프랑스 가톨릭이 그의 장례미사 집전을 거부함에 따라 여성으로서는 프랑스 공화국 최초로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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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경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강대학교 불문과를 졸업하고 경영컨설턴트와 영어교육 출판 편집자를 거쳐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외국의 좋은 책을 소개, 기획하는 일에 몸담고 있다. 번역이야말로 세상 여기저기서 듣고 배운 것들을 전방위로 활용하는 경험집약형 작업이라고 자부한다. 옮긴 책으로 《세상을 측정하는 위대한 단위들》, 《n분의 1의 함정》,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 《가치관의 탄생》, 《세상의 모든 공식》, 《달 . 낭만의 달, 광기의 달》, 《우리는 10분에 세 번 거짓말한다》, 《이노베이션 킬러》, 《레이시 이야기》, 《뮬, 마약 운반 이야기》 등이 있고 고전명언집 《다시 일어서는 게 중요해》를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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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미 (옮긴이)    정보 더보기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가톨릭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지냈으며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수년간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바른번역 소속으로 독일의 양서를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됐을까?》,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부모의 말 수업》, 《세상을 바꾼 문장들》, 《냄새의 심리학》, 《만들어진 제국, 로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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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옮긴이)    정보 더보기
프랑스 누벨 소르본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인문, 실용, 한국문 학 등 편집 일을 배우다가 민음사에서 프랑스어 작품 담당 편집자로 자리 잡 았다.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하여 '밀란 쿤데라 전집',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편집했다. 말레이시아로 이주하여 번역 일을 하며 지내고 있으며 《정원 이야기》 《고독 이야기》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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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경 (옮긴이)    정보 더보기
20여 년간 문학 편집자로 책을 만들고 읽어왔다. 특히 일본 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품고 고전에서부터 근현대, 스낵 컬처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개했다. 지금은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을 직접 옮겨 독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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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새로운 발걸음이 나의 정원에 오가고―
새로운 손길이 흙을 일굽니다―
느릅나무 위의 음유시인 하나가
이 정적을 깨우는군요.
_ 에밀리 디킨슨, 「새로운 발걸음이 나의 정원에 오가고」


우리는 사랑과 욕망을 향해 걸어간다. 교훈을 찾지 않고, 사람들이 위대함을 갈구하는 씁쓸한 철학도 좇지 않는다. 태양, 입맞춤, 야생의 향기 밖 모든 것이 헛된 듯하다. 나는, 나는 그곳에서 혼자이길 바라지 않는다. 나는 사랑했던 이들과 자주 그곳에 갔고, 그들의 얼굴에서 사랑이 담긴 환한 미소를 읽곤 했다.
_ 알베르 카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제대로 온 거야.” 부인이 태평하게 말했다. “맞아, 내가 주문한 거야. 멋지지 않니?” 부인이 로라의 팔을 지그시 잡으며 말했다. “어제 꽃 가게를 지나다가 진열창에 있는 걸 봤거든. 그런데 문득 평생 한 번쯤 칸나 백합을 실컷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마침 가든파티가 좋은 핑계가 됐지.”
_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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