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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 九月)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6324384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18-09-15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6324384
· 쪽수 : 112쪽
· 출판일 : 2018-09-15
책 소개
최고의 인상파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그림과 명시로 엮은 9월의 시화집. 이번 책의 제목은, 윤동주의 시 <그 여자> 중 한 연에서 따온 것이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의 9월편은, 따뜻하고 안정감 있는 카미유 피사로의 인상파 그림과 윤동주, 백석, 정지용 등 총 17명 시인들의 시가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목차
1일 소년 _윤동주
2일 코스모스 _윤동주
3일 가을날 _라이너 마리아 릴케
4일 그 여자(女子) _윤동주
5일 오늘 문득 _강경애
6일 가을날 _노천명
7일 창(窓) _윤동주
8일 비둘기 _윤동주
9일 마음의 추락 _박용철
10일 반려(班驢) _노천명
11일 고향 _백석
12일 귀뚜라미와 나와 _윤동주
13일 하이쿠 _료타
14일 이것은 인간의 위대한 일들이니 _프랑시스 잠
15일 먼 후일 _김소월
16일 비오는 거리 _이병각
17일 가을밤 _윤동주
18일 남쪽 하늘 _윤동주
19일 향수(鄕愁) _정지용
20일 고향집 - 만주에서 부른 _윤동주
21일 벌레 우는 소리 _이장희
22일 하이쿠 _기카쿠
23일 장날 _노천명
24일 거리에서 _윤동주
25일 사개 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_김영랑
26일 나의 집 _김소월
27일 하이쿠 _시키부
28일 오-매 단풍 들것네 _김영랑
29일 한동안 너를 _고석규
30일 달을 잡고 _허민
저자소개
김소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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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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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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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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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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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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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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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이 탐구하며 유럽 문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독일어권 시인.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프라하에서 아버지 요제프 릴케와 어머니 피아 조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제프 마리아로, 릴케가 태어난 자정 무렵의 시각이 예수 탄생 시각과 같음을 기억한 어머니는 첫딸을 수주일 만에 잃고 얻은 아들의 탄생을 성모 마리아가 내린 은총으로 여겨 릴케를 “마리아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육군 유년실과학교를 다녔으나 중퇴하고 20세 때인 1895년 프라하대학에 입학해 미술사, 문학사, 철학 강의 등을 수강했다. 1894년 첫 시집 『인생과 노래』를 출간한 이후 『가신봉제(家神奉祭)』(1895), 『꿈의 왕관을 쓰고』(1896), 『강림절』(1897)을 차례로 발간했다. 1897년 베네치아에 체류하면서 일생에 걸쳐 깊은 영향을 받은 연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처음 만나 그녀의 권유로 ‘르네’라는 본명을 ‘라이너’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1899~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루 살로메와 러시아 여행을 했고, 이때의 경험이 작가의 시적 토양으로 깊게 자리 잡는다. 1902년 『형상시집』을 출간하고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과의 만남을 계기로 『로댕론』을 쓰기도 했다. 로댕은 루 살로메만큼이나 시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시도집』(1905), 『신시집』(1907), 『말테의 수기』(1909) 등 꾸준히 작품을 펴내다 전쟁으로 인한 10년간의 침묵 끝에 마침내 필생의 역작이라 평가받는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2)를 완성한다. 릴케가 한 후작부인의 초청으로 방문한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안 절벽 위의 대저택 이름이 ‘두이노 성’이기도 하지만, 전쟁 끝에 완전히 파괴된 몰락한 집의 이름을 문학권의 연관 관계 안으로 영원히 끌어들이겠다는 시인의 결심이 『두이노의 비가』라는 명칭을 낳았다.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1926년 스위스 발몽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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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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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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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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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폐교 조치되자,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길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하고 그 외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도 시를 발표하였으며,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 시절 틈틈이 쓴 시 19편을 골라 시집을 발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신변을 염려한 스승과 벗들의 만류로 뜻을 보류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을 모의한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고향 용정에 묻혔다. 일제의 생체 실험 주사에 따른 희생으로 추정될 뿐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1948년 유고 31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1968년에는 연세대학교 내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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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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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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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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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산맥 기슭의 투르나유에서 태어났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여섯 살까지 지내고, 징수원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뀜에 따라 포, 생팔레, 오르테스, 보르도 등으로 옮겨 다니며 소년기와 중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대부분 피레네산맥을 지척에 둔 소도시로 시인이 자연과 고향의 감정을 키우는 바탕이 되었다. 1888년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잠의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오르테스로 이주한다. 잠은 33년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주요 작품을 집필했다.
잠은 1891년 처음으로 《여섯 편의 소네트》를 발간한다. 이어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시》라는 똑같은 제목의 작은 시집 세 권이 매년 나온다. 그 가운데 1893년판 《시》를 당시 오르테스에 머물던 영국 시인 휴버트 크래칸소프가 파리 문단에 알리면서,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잠은 무명 시인에서 벗어나 말라르메와 앙리 드 레니에, 앙드레 지드 등 당시의 주요 문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이어 출간한 대화체의 장시 《어느 날》(1895)과 《시인의 탄생》(1897)은 그의 재능을 증명하고 인지도를 높여 주었다. 1896년 앙드레 지드를 처음으로 만나는데, 당시 지드는 출판비를 지원할 정도로 잠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그러다 1898년 《새벽 종소리에서 저녁 종소리까지》가 출간되며 잠은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프랑스 시가 오랫동안 박대했던 소재와 주제로 점철된 이 시집을 읽고, 폴 클로델은 “당신에게 있는 모든 게 독창적이고 순수하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이 시기 잠의 첫 번째 소설 《클라라 델레뵈즈》(1899)가 나왔고, 뒤이어 《알마이드 데트르몽》(1901), 《산토끼의 소설》(1903), 《폼 다니스》(1904) 등이 출간된다. 이후에도 여러 편의 소설을 쓰지만, 소설가로서는 문학사에 남을 만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01년 두 번째 시집 《앵초의 슬픔》이 출간되며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다졌다. 이 시집은 열일곱 편의 비가를 필두로 대화체 또는 기도문 형식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과 비가 형식의 시편들이 암시하듯, 고통스러운 사랑의 경험이 저변에 깔려 있다. 또 다른 문제작 《하늘의 빈터》(1906)가 세상에 나올 때도 사랑의 실패가 동력과 계기를 제공했다.
1907년 7월 잠은 한 여성 독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교류하다 그해 8월에 루르드에서 그녀와 약혼하고 두 달 뒤 결혼식을 올린다. 첫딸이 1908년 태어나자 루르드에서 성모를 본 소녀의 이름을 따 베르나데트라 부르고, 그녀를 위해 《나의 딸 베르나데트》(1910)란 산문집을 썼다.
잠의 영향력은 1910년을 전후하여 최고조에 이르지만, 이때부터는 《새벽 종소리에서 저녁 종소리까지》나 《앵초의 슬픔》처럼 문단의 주목과 대중의 호응을 널리 받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적 색채가 짙어진 그의 시는 전통적 작시법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띠었다. 1912년 발표한 《기독교 농경시》는 신과 농부와 전원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호흡이 긴 시편들을 담고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마흔여섯 살에 네 자녀의 가장인 잠은 동원되지 않았으나 오르테스에 설치된 야전 병원 관리자로 임명되어 부상자와 간호사를 돕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전시를 위한 다섯 개의 기도》를 1916년 발표한다. 1917년에는 프랑스 한림원(아카데미 프랑세즈)이 전 작품을 대상으로 그에게 문학 대상을 수여한다. 그러나 파리 친구들의 후원에 힘입어 1919년 입후보한 프랑스 한림원 회원 선거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1924년 선거에서 또다시 낙선한다.
그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오르테스의 백조”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로 1921년 삶과 문학의 터전인 오르테스를 떠나야 했다. 다행히 가까운 신부의 도움으로 바스크 지방 아스파랑에 거처를 장만했다. 오르테스만큼 전원적인 이곳에서 《거룩한 시대에서 배은망덕한 시대까지》(1921)를 비롯한 회상록 세 권을 집필한다. 그리고 1923년부터 하이쿠풍으로 “삶 전체의 성찰과 드라마”를 네 행 속에 응축한 《사행시》 연작이 발표된다. 시집 《나의 시적 프랑스》(1926), 산문집 《신성한 고통》(1928)과 《노래하는 밤》(1928)도 1920년대에 나온 작품이다.
중·후기에는 산문의 양이 늘어나는데 경제적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말년에는 후미진 아스파랑에 칩거하면서 소외감과 고독감을 맛보아야 했다. 1937년 파리 여행은 말년의 고독감과 섭섭함을 위로해 준 사건이다. 파리 만국박람회(엑스포)를 계기로 개최된 문학 강연회에 초청되어, 은둔자처럼 살던 잠은 오랜만에 파리에 간다. 그의 강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언론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기사를 쏟아 냈다. 그러나 그는 곧 건강을 잃기 시작해 이듬해인 1938년 11월 1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스파랑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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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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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많은 소설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장연여자청년학교를 거쳐 장연보통학교에 입학 후 가난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두드러진 작문 실력을 발휘했다. 192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인 1923년 10월에 학생 동맹 휴학 사건 관련자로 퇴학당했다. 이 무렵, 장연 태생의 동경 유학생 양주동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면서 서울 동덕여고보에 편입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9월 그와 헤어지고 난 뒤 장연으로 돌아왔다. 1924년부터 본격적인 문학 공부를 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1년에는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단편소설을 투고하였으며, 같은 해에 결혼한 뒤 6월경에 간도로 이주하였다. 1934년에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인간 문제』를 연재한 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신병이 악화되어 고향 장연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1944년 4월 지병 악화로 결국 사망했다. 1999년 8월, 중국 용정에 ‘녀성 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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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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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경남 사천군 곤양에서 태어났다. 1929년부터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기슭으로 옮겨 살다 1943년 스물아홉 나이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곤양공립보통학교와 해인사 강원을 거쳐 해인사립강습소 교사,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일했다.
열여덟 살 때인 1932년 처음으로 시 「이별한 님」이 《불교》에 발표된 뒤, 스물두 살 때인 1936년 《매일신보》 현상 공모에 소설 「구룡산」이 당선되었고, 1940년과 1941년 《문장》에 시 「야산로」, 소설 「어산금」이 잇달아 추천되어 문재를 떨쳤다. 그는 길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 동안 시와 소설, 동화, 수필 갈래에 걸쳐 모두 329편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시가 299편으로 압도적인데, 여섯 편을 뺀 나머지는 모두 미발표 육필 시집 여섯 권에 남아 전한다. 경남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삼아 열정적으로 민족 현실을 안고 뒹굴었던 청년 허민의 문학은 나라잃은시대 후기, 윤동주의 내성적 비전과는 다른 현실적 비전을 앞세우며 우리 근대 민족문학의 마지막 자리를 힘차게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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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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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9월 7일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6년 3월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1958년 3월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4월 19일 심장마비로 인해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대학 재학 시 손경하·하연승·김일곤·홍기종·장관진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활발히 해 ≪신작품(新作品)≫, ≪시조(詩潮)≫, ≪시 연구(詩硏究)≫, ≪부산 문학(釜山文學)≫ 등의 동인지를 펴냈고, 1954년에는 김재섭과 함께 2인 공저 ≪초극(超劇)≫을 간행했으며, 1957년 ≪문학예술(文學藝術)≫에 평론 <시인의 역설>이, 1958년 ≪현대문학≫에 그가 남긴 유고 <시적 상상력>이 연재되기도 했다. 고석규는 1950년대라는 무참한 폐허의 공간과 삶의 한계성에서 비롯된 실존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형상화한 비평가이자 시인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지평, 1990)이 출간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1993년 ≪오늘의 문예비평≫ 동인들에 의해서 ≪고석규 유고 전집≫(총 5권)이 간행됨으로써 그의 문학에 대한 온전한 평가와 문학사적 자리매김이 모색되었다. 1950년대 한국 문학사, 특히 비평문학을 정리하는 가운데 결코 지나쳐 버리거나 폄하되어서는 안 될 그의 문학적 면모는, 그가 걸어온 ‘미완의 문학적 행로’만큼이나 구석진 곳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문예비평≫ 동인들의 집중적인 노력과 그를 아끼던 은사, 친우 등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 그가 남긴 문학적 성과는 비로소 전모를 드러내면서 문단 안팎의 적지 않은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는 1950년대 문학 연구에서 그를 제외시켜 버리면 미완의 문학사가 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그의 문학 세계는 1950년대 한국 문학사를 새롭게 쓰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요 근원이 되는 의미심장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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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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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8월 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군 소촌동 363번지)에서 마을의 대지주였던 부친 박하준(朴夏駿)과 모친 고광(高光)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으로 자랐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 뒤, 1921년 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18세의 박용철은 한 살 연상인 김영랑과 처음 만난 이래 평생 교분을 나눴다.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일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으나 몇 달 만에 자퇴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배우고, 일성(一星) 이관용에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일어, 영어, 독일어로 된 해외 시집을 탐독했고 또 영국 낭만주의 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소네트를 탐독하면서 희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1925년 봄 누이동생 박봉자가 배화여자고동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함께 상경한 이후 영어와 독일어 및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26년 지속된 유폐 생활로 인한 위병(胃病)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26년 창작 희곡 <말 안 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처음 공연되었다. 1928년 9월 박봉자의 요청에 따라 쓴 배화 학생극용 창작 희곡 <석양>이 공연 무대에 올랐다. 1929년 4월 박봉자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용철은 소촌리에 남아 영시와 독일시 번역에 몰두했다. 박용철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들, 즉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1929년 10월 22일 김영랑과 함께 시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서 정지용을 처음 만났고, 12월 10일경 변영로와 정인보 등을 만나 순수 서정시파인 ‘시문학’ 동인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시문학≫에 수록된 외국 시 번역에서 영미 시는 정지용이, 프랑스 시는 이하윤이, 독일 시는 박용철이, 한시는 정인보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 가을 무렵 박용철이 옥천동에서 견지동으로 이사하면서 견지동 집은 ‘문예월간사’ 사무실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문예월간≫이 종간된 이후 박용철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평론을 비롯해 해외 번역시와 수필, 창작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이하윤의 중재로 박용철이 ‘극예술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4년 1월 ≪문학≫ 창간호를 발간, 편집과 발행 및 재정을 박용철이 맡았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1935년 봄 박용철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임화의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산실된 원고들을 모아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고 이어 같은 해 11월 5일 ≪영랑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후 <‘기교주의’설의 허망>, <기술의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무렵 박용철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문학잡지 간행을 계획했다. 이헌구, 구본웅 등과의 논의를 거쳐 잡지명을 ≪청색지(靑色紙)≫로 하고, 이듬해 1월 문단인들에게 발간 취지서를 발송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잡지 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초겨울부터 박용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석에서 <시단: 정축년 회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고 곧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필답으로만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서 시와 편지를 썼다고는 하나, 시 <만폭동>이 그의 마지막 공식 발표작이 되었다.
1938년 5월 12일 오후 5시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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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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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해체된 시기인 1935∼36년부터 평론, 산문, 시에 이르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요절하여, 그 활동 기간은 카프 해소 이후 10여 년뿐이다. 현실도피적인 성향인 데다 후두결핵으로 문단활동도 활발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드리노라’(1940년 2월)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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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시키부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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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시키부(和泉式部, 978?∼1036?)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엽에 걸쳐 활약한 여류 가인이다. 일본 문학사에서는 헤이안(平安, 794∼1192) 시대, 또는 중고 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녀의 부친은 에치젠(越前, 지금의 후쿠이 현 북동부 지역) 지방의 수령인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라는 인물이다. 이십 세 무렵 이즈미 지방 수령인 미치사다와 결혼한 이즈미시키부는 ‘시키부’라는 이름에 남편 부임지인 ‘이즈미’가 붙어 이즈미시키부라 불리게 된다. 남편 미치사다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 고시키부(小式部)다. 그녀는 남편 부임지에 머문 적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도읍지인 교토에서 지냈다. 그러는 동안 레이제이(冷泉) 천황의 셋째 아들인 다메타카(爲尊) 친왕의 사랑을 받게 된다.이로 인해 그녀는 부친으로부터 의절을 당하고 미치사다와의 부부 관계도 깨지고 만다.
그러나 1002년 6월 다메타카 친왕은 스물여섯의 나이로 사망한다. 다메타카 친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숙의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되는 시점에 극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아쓰미치 친왕과의 사랑이다. 레이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인 아쓰미치 친왕은 대재부(大宰府)의 장관인 대재수(大宰帥, 다자이노소치) 직책을 맡았던 관계로 소치노미야(帥宮)라 불렸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굳은 결속으로 하나가 된 소치노미야와 보낸 기간은 이즈미시키부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화양연화와 같은 시기였다. 스물여덟 살에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와쿠라노미야(石?宮)도 출산한다. 그러나 소치노미야도 1007년 10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들의 사랑도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사별 후 그를 향한 그리움은 면면하게 이어졌으며 결국 애절한 통곡은 가집에 120여 수에 달하는 만가(挽歌)로 남는다.
소치노미야 사망 일주기 후, 이즈미시키부는 딸 고시키부와 궁중으로 출사해 쇼시(彰子) 중궁을 모시게 된다. 궁중에는 이미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와 이세노다이후(伊勢大輔) 등 걸출한 재원이 출사해 있었다. 무라사키시키부도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즈미시키부는 그녀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던 듯하다. 출사한 지 1, 2년 뒤에 이즈미시키부는 당대 최고 권력가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권유로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와 서른두 살 무렵 결혼한다. 이후 야스마사의 부임지인 단고(丹後, 지금의 교토 북부 지역) 지방으로 내려가 잠시 머물기도 하지만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로 노령에 가까운 야스마사와의 결혼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로부터 50대에 들어선 이즈미시키부의 행적은 묘연하다.
이즈미시키부는 20대 중반에 충격적인 다메타카 친왕과의 사별을 거쳐, 30대에 생애 가장 사랑했던 소치노미야와의 사별에 이어 40대 후반에 다시 보석 같은 딸 고시키부를 여읜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은 노래로 승화되어 남아 있는데 모성애가 발현된 뛰어난 노래로 인정받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일생 동안 세 번에 걸친 크나큰 사별의 고통으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절감했으며, 동시에 두 번에 걸친 크나큰 사랑을 가슴에 담은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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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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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1월9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에서 당대 손꼽히는 부호이자 전에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과 박금련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박금련은 이병학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이장희의 처음 이름은 양희였으나 그가 20세 되던 해인 1920년 4월에 개명한 호적에는 장희(樟熙)로 고친 바 있고 뒤에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3∼1924년 사이에는 장희(章熙)로 줄곧 썼는데 이것이 필명이 되었다. 아호는 고월(古月. 혹 근자에 ‘孤月’·‘苦月’ 등을 그의 아호의 하나로 보고자 하는 일이 있으나 그는 아호로서 ‘古月’만을 썼을 뿐이다)이다. 아버지 이병학은 장희의 생모 박금련이 1905년 사망한 이래 박강자, 조명희 등을 맞아들여 슬하에 12남 9녀를 두었는데 이들 중 유아 때 사망한 7남매(3남 4녀)를 제외하면 모두 9남 5녀의 14남매가 된다.
이장희는 아호 고월 이외에 어렸을 적에 ‘꿀돼지’, ‘꿀봉’, ‘박쥐’와 같은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으며 1905년 다섯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박금련이 사망한 후 들어온 계모 박강자는 1923년 8월 사망하기까지 이병학과의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다.
1906년 이장희는 6세로 대구보통학교에 입학해 1912년 졸업했으며, 1913년 13세로 일본에 건너가 경도중학교에 입학한다(하나 근자 조사해 확인한 결과 이장희가 경도중학에 입학 내지 졸업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1918년 18세로 귀국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청산학원을 지망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 근거는 극히 희박하다.
1924년 24세 때 5월 문예 동인지 ≪금성≫ 3호에 이장희라는 필명으로 시 <실바람 지나간 뒤>, <새 한 머리>, <불노리>,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이 가운데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시 작품 중에서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잡지에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해 실었다. 12월 여성 전문지 ≪신여성≫(2권 12호)에 시 <동경>을 발표했는데 혹 일설에는 이 작품의 모티프는 이장희가 일본 경도에 체류했을 때 알고 지냈던 소녀 에이코에게서 찾은 것이라고 한다.
1925년 25세가 된 그는 ≪신여성≫(3권 2호, 1월호)에 시 <석양구>를 ,종합 문예지 ≪생장≫(5호, 5월호)에 <고양이의 꿈>, <가을밤>을 발표하고 시사 종합지인 ≪여명≫(1호, 6월호)에 <청천의 유방>과 <비 오는 날>을, ≪신민≫(5호, 9월)에 <사상(沙上)>, <비인 집>을 발표한다. 계속해서 ≪신민≫(6호, 10월호)에 <달밤 모래 우에서>와 <연> 등을 발표한다.
1926년 26세로 ≪신민≫(9호, 1월호)에 시 <겨울의 모경>을, ≪여명≫(7호, 6월호)에 <봄 하눌에 눈물이 돌다>와 ≪신민≫(16호, 8월호)에 <하일 소경>을, ≪신민≫(19호,11월호)에 <들에서>와 <눈>을 발표한다.
1927년에는 ≪조선문단≫ 20호, 4월호)에 시 <가을ㅅ밤>을, ≪신민≫(26호, 6월)에 <눈은 나리네>, <봄철의 바다>를, ≪신민≫(28호, 8월)에 <저녁>을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여시≫(45호, 6월호)에 시 <저녁>, <녀름ㅅ밤 공원에서>를 발표한다.
1929년에는 ≪신민≫(45호, 1월호)에 <버레 우는 소리>, <귓드람이>를, ≪문예공론≫ (1호, 5월호)에 <적은 노래>, <봉선화>, <눈 나리는 날>을, ≪중외일보≫(11월 14일)에 <어느 밤>을 발표한다. 그리고 발표연대 및 게재지 미상의 <여름밤>, <쓸쓸한 시절>을 남겼다.
11월 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 서성정 1정목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유서 한 장,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두 계모와 배다른 형제와의 갈등, 일제 식민지 정책에 동조해 항상 일본인의 통역을 종용하던 아버지와의 사상적 대립과 갈등, 버린 자식 취급과 냉대로 인해 자존심 강하고 섬세하던 그는 죽기 2, 3년 전부터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살하기 몇 달 전, 서울에서 고향인 대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외출도 않고 거의 두문불출이었다. 다만 죽기 3, 4일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초 오상순의 거처를 찾아갔다. 공초가 머물던 여관집 주인이 한 달 전에 동래에 가고 없다고 말하니, 안색이 돌연 창백해지며 어깨를 툭 떨어트리고 멍하니 한참 동안 말도 없이 서서 있다가 눈에 눈물이 글썽해 가지곤 힘없이 발길을 돌리더란 것이다. 주인은 하도 이상하기에 문 밖에 서서 황혼 가운데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양을 멀리 바라본즉 곧 쓰러질 듯해서 마음이 몹시 안됐더라고 했다는 것이다(공초의 술회). 그 후 그는 2, 3일간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배를 깔고 엎드려 수없이 금붕어를 방바닥에 그려 놓고 1929년 11월 3일 오후에 극약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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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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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ille Pissarro. 1830~1903.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 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고, 수수하고 담담한 전원의 모습을 주로 작품에 담았다. 피사로는 폴 세잔과 폴 고갱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 두 화가는 활동 말기에 피사로가 그들의 ‘스승’이었다고 고백했다. 한편, 피사로는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법 같은 다른 화가들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展)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말년에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을 목격했고,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피사로를 존경했으며,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붉은 지붕》 《사과를 줍는 여인들》 《몽마르트르의 거리》 《테아트르 프랑세즈광장》 《브뤼헤이 다리》 《자화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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