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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서양사 > 서양중세사
· ISBN : 9788952774248
· 쪽수 : 1100쪽
책 소개
목차
역사
-역사 서문(라우라 바를레타)
-사건들
-국가들
-경제
-사회
철학
-철학 서문(움베르토 에코)
-지식의 순환과 대학들
-철학과 신학
-지식과 전통의 비교
과학과 기술
-과학과 기술 서문(피에트로 코르시)
-수학
-물리학
-유럽의 연금술과 금속학
-신체, 건강, 치료에 대한 지식
-혁신, 발견, 발명
-유럽 밖으로
문학과 연극
-문학과 연극 서문(에치오 라이몬디, 주세페 레다)
-인문주의를 향한 중세의 여정
-라틴어와 속어의 종교 문학
-시의 승리
-서술의 취향
-산문의 형태들
-연극
시각예술
-시각예술 서문(안나 오타니 카비나)
-유럽의 성당들
-이탈리아 조각
-“라틴어로 그리스를 그리다”
-다양한 주제와 주인공들
-중세에 대한 향수
음악
-음악 서문(루카 마르코니, 체칠리아 판티)
-중세 후기의 음악과 사회
-음악적 관습
찾아보기 / 부록 I: 도판과 지도 / 부록 II: 연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프랑스 군주국은 필리프 4세의 치하에서 정치적 입장을 새롭게 정리했다. 중세에 기원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인종의 공존과 공동의 종교적-정치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유럽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이념의 실패에 따른 신성로마 제국의 몰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황제의 보편주의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것은 교회의 보편적 우월함을 주장했던 교황의 이념으로, 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을 위한 공동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던 유일한 집적 요인에 해당했다. 이에 반反하여 필리프 4세는 14세기 초반에 세속 권력과 영적 권력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정책에 입각하여 로마법과 군주국 절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재정리하며 행동을 개시했다. 1296-1303년에 교황과의 대립에 관련하여 여러 상황이 벌어졌다. 보니파시오 8세의 굴욕은 ‘아나니의 따귀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최고 권위에 적대감을 보인 핵심에는 프랑스 군주가 유럽의 정치와 사회를 통제하고자 했던 야심이 자리했다. 같은 해에 있었던 보니파시오 8세의 사망 이후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인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게 했다. 클레멘스 5세는 몇 년 후 프랑스 군주의 모든 제안을 수용해야 하며, 교황의 전통적 거처인 로마를 포기하고 프랑스 군주와 고위 성직자들의 영향권에 예속되었다(1309).
-‘역사: 프랑스’에서
13세기 말과 14세기 초반에 대학 교육의 특징을 보여 주는 변화는 특히 신학 분야에서 주석과 대전의 유형에도 중요한 의미로 반영되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비평 기준과 방식들에 근거해 인식되었던 이상적인 신학으로부터 고유한 주제화의 형태를 보여 주는 독자적-자치적인 신학으로의 전환은 신학자들의 연구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학 저술의 경우 주요한 장르로의 내부 발전을 조사하면 확실하게 드러난다. 13세기의 변화와 비교하면 철학은 더 큰 비중을 차지했고 토론에 동원된 문제 수는 급격히 줄었다. 13세기의 주석서들과 14세기의 새로운 신학자들의 주석서들을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철학: 대학과 학문 체계’에서
기계 장치를 이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측정한다는 발상은 인간이 (기본 구도에서 출발한 물레방아의 진화를 통해 확인된) 기계적 사고방식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대에 기원한다. 기계 기술은 이제 다른 차원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처럼 여겨졌다. 새로운 발명을 향한 추진력은 상당했다. 1338년에 베네치아에서 동방을 향해 출항한 범선에는 기계 시계도 실려 있었는데, 이는 서방의 기술적 우위를 다시금 확인하는 증거였다. 14세기에 기계 시계는 성당, 교회, 도시의 탑에 설치되었다.
-‘과학과 기술: 기계 시계’에서
단테 알리기에리는 중세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작품은 당대 문화의 집성이며 전체로는 시대를 대변한다. 젊은 시절에 운문과 산문을 혼합해 쓴 『새로운 인생』은 청신체의 심오한 의미를 충족시켰고, 여러 이론이 적용된 서정시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이 반복되었다. 『속어론』에서는 수사학적-시적 연구를 보여 주었다. 전투적인 시인이었던 단테는 20여 년 동안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기도 했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정치적인 성격의 『제정론』을 쓰기도 했다. 『신곡』에서도 드러나듯 단테는 사후 세계로의 여행을 이야기하며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양식의 시에서 받은 영향을 포괄했고, 백과사전적인 성격의 시를 수단으로 하여 모든 현실을 대변했다.
-‘문학과 연극: 단테 알리기에리’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서명, 비문, 자료 등에 작품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남겨졌다. 니콜라 피사노와 조반니 피사노, 그리고 캄비오의 아르놀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유명한 인물(치마부에, 부오닌세냐의 두초, 시모네 마르티니, 조토, 피에트로 로렌체티와 암브로조 로렌체티)부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제자들까지, 익명의 관습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조반니 피사노는 1301년에 스스로를 ‘헛된 것을 시작하지 않는 자, 훌륭한 지식으로 행복한 니콜라의 아들’이라는 축원과 더불어 피스토이아 두오모의 (제단 관련) 양피지 문서에 서명했다.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개념과 고려가 급진적으로 변화되었음을 말해 주는 거대한 변화의 첫 단계였다.
-‘시각예술: 중세의 예술가들’에서
13-14세기에는 음악이 음악 악보, 즉 높이와 길이가 측정된 음과 작곡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세심하게 다루어진 음 기호 체계를 통해 표현된 음으로 말하는 언어라는 인식을 가졌다. 14세기 말의 연구서들은 이미 음악 ‘창조’가 작곡가의 기술과 능력에 의해 조형된 인위적인 산물이라는 인식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그로케오의 요하네스가 주장했듯이 작곡가들은 3학(문법학, 논리학, 수사학)의 용어를 빌려 악보에 ‘진정한 쓰기 기술’을 구현했다.
-‘음악: 중세 후기의 음악과 사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