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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 수업

사랑학 수업

오 헨리, 너새니얼 호손, 캐서린 맨스필드,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알퐁스 도데, 현진건, 기 드 모파상, 하야마 요시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프랭크 스톡톤, 슐라미스 이시 키쇼르, 에드워드 골드 세이더 (지은이), 유혜영 (엮은이), 정마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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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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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사랑학 수업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71429884
· 쪽수 : 352쪽
· 출판일 : 2017-04-21

책 소개

삶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작가들이 아름다운 언어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묘사해 왔고, 오늘날에도,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야기할 것이다. <사랑학 수업>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세계 유명작가들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엮은 17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목차

제1부 _ 내 사랑의 셰프는 나!
의자 고치는 여인(기 드 모파상) - 사랑은 십자가가 아니다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오 헨리) - 사랑의 황금 레시피는 진실한 마음 +열정
미녀일까, 호랑이일까(프랭크 스톡톤) - 사랑은 때로 잔인한 선택을 요구한다
사랑의 약속(슐라미스 이시 키쇼르) - 사랑은 아름다운 약속
별(알퐁스 도데) - 삶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사랑
탄생마크(너새니얼 호손) - 사랑하는 사람은 조물주가 나만을 위해 빚어 준 최상의 예술품
거울(알퐁스 도데) -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허용되지 않는 첫사랑
크리스마스 선물(오 헨리) -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이 내게 준 선물

제2부 _ 이별까지 사랑이다
밀회(이반 투르게네프) - 이별까지 사랑이다
차가운 포옹(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 이별은 고요할수록 좋다
눈보라(알렉산드르 푸시킨) - 우연을 운명으로 이어 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
시멘트 포대 속의 편지(하야마 요시키) - 인생은 날씨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제3부 _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기적, 사랑
사랑의 묘약(오 헨리) - 사랑은 자동인형이 아니다
B사감과 러브레터(현진건) - 사랑 받고 싶으면 나를 먼저 사랑하라
가든파티(캐서린 맨스필드) - 나눔은 ‘함께 행복한 것’
눈먼 딸과 어머니(에드워드 골드 세이더) - 사랑 뒤에 가려진 어머니의 희생
카슈탄카(안톤 체호프) - 우리가 선택한 가족, 반려동물

저자소개

오 헨리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단편소설 작가로 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ydney Porter)이고,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 내과의사인 아버지 알게몬 시드니 포터와 어머니 메리 제인 버지니아 와인 포터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잃어 숙모가 교사로 있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2년 텍사스로, 1884년에는 오스틴으로 이주하면서 목장 관리, 제도사, 기자, 은행원 등의 직업을 전전하였다. 1887년 아솔 에스테스와 결혼했으며, 1891년 오스틴은행에 근무하면서 아내의 내조를 얻어 주간지를 창간했으며, 지방신문에 유머러스한 일화를 기고하는 등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896년 2월 은행 공금횡령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온두라스로 도피했으나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체포되었다. 1898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교도소의 병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면서 딸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고, 즉각 잡지 독자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으며, 출감하면서 이름을 오 헨리란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03년 12월부터 1906년 1월까지 뉴욕의 《월드(World)》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였다. 최초의 소설집 《캐비지와 왕(Cabbages and Kings)》(1904)을 시작으로, 《400만(The Four Million)》(1906), 《손질 잘한 램프(The Trimmed Lamp)》(1907), 《서부의 마음(Heart of the West)》(1907) 등의 단편집을 계속해서 출간했다. 헨리의 말년은 악화된 건강, 금전상 압박과의 싸움, 알코올 중독 등으로 얼룩졌다. 1907년에 한 재혼은 불행했다. 1910년 6월 5일, 과로와 간경화, 당뇨병 등으로 뉴욕 종합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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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세기 미국 문학의 거장이자 미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 1804년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태어났다. 17세기 신대륙 개척 시대에 건너온 청교도 가문의 후손으로, 그의 선조 중에는 세일럼 마녀재판을 주도한 판사가 있었다. 이로 인한 가문의 비극적 역사와 죄의식은 호손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보든 대학 시절 시인 헨리 롱펠로,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피어스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졸업 후에는 12년간 고향집에서 은거하며 치열한 독서와 습작 생활을 이어갔다. 1837년 첫 단편집 『두 번 들은 이야기』로 에드거 앨런 포의 찬사를 받았다. 1839년부터 보스턴 세관 검사관으로 근무했고, 1842년 결혼 후 콩코드의 ‘낡은 목사관’에 머물며 에머슨, 소로 등 당대 지성인들과 교류했다. 1846년에는 단편집 『낡은 목사관의 이끼』를 발표했다. 같은 해에 세일럼 세관 검사감독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49년에 정권이 바뀌며 강제로 해임되었다. 1850년, 46세에 발표한 『주홍글씨』는 그의 대표작이자 미국 문학이 유럽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음을 선언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허먼 멜빌은 호손의 문학적 깊이에 경의를 표하며 『모비 딕』을 그에게 헌정했다. 이후 『일곱 박공의 집』(1851), 『블라이드데일 로맨스』(1852), 『대리석 목신상』(1860)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어둠과 빛을 탐구했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고통받다가 1864년, 오랜 벗 피어스와의 여행 중 플리머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호손은 청교도적 도덕주의와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결합해 인간 영혼의 비극적 진실을 파고든 작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죄와 속죄, 은밀한 죄책감의 심리적 작용을 다룬 그의 작품들은 현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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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맨스필드 (지은이)    정보 더보기
뉴질랜드 태생의 영국 소설가로 웰링턴과 런던에서 교육받은 후 열아홉 살에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까지 《리듬》 《블루 리뷰》 등에 단편을 발표했고 1920년에 발표한 《환희》로 확고한 명성을 얻었다. 1922년에 발표한 단편집 《가든 파티》 는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최고로 만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맨스필드는 5년간 결핵으로 고생하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맨스필드의 남편이자 평론가 존 미들턴 머리는 그녀가 남긴 기록을 정리해 《일기》(1927)라는 제목으로 펴냈으며, 그녀가 자신에게 쓴 편지에 주석을 붙여 《서간집》(1928)으로 출간했다. 맨스필드의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받아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 섬세함과 완곡한 서술, 날카로운 통찰력을 고루 갖추었다고 인정받는다. 또한 매우 시적이고 독특한 산문 문체를 발전시켜 단편소설이 문학의 한 장르로 발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쳐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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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60년, 러시아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1867년, 타간로크의 김나지야에 입학하지만 수학 및 지리 성적이 부진하여 낙제하고, 13세 무렵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와 「햄릿」, 「검찰관」 등의 연극을 관람하며 예술에 흥미를 느낀다. 1876년 4월,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던 아버지가 파산하며 일가족은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안톤 체호프는 계속 고향에 남아 고학으로 김나지야를 마친다. 1879년,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고, 1882년부터 오 년에 걸쳐 주간지 《오스콜키》에 약 300여 편의 소품을 기고한다. 1884년, 의사로 개업한 뒤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한다. 정부의 검열과 잡지사의 무리한 요구 등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관리의 죽음」(1883), 「카멜레온」(1884), 「거울」(1885) 등 풍자적 유머와 애수가 담긴 뛰어난 단편을 잇따라 발표한다. 1886년 두 번째 객혈과 1888년 소설가 가르신의 자살 등 힘겨운 사건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다. 그럼에도 체호프는 1890년 사회적 참여와 영감을 얻기 위해 사할린섬으로 떠나고, 이태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멜리호보라는 마을에 정착한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체호프는 문학적 원숙기에 접어들고, 1899년 결핵 요양을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 교외로 옮겨 갈 때까지 소설 「결투」(1892),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 등을 비롯해, 그의 4대 희곡 중 첫 작품 「갈매기」(1896)를 발표한다. 그 뒤로 「바냐 아저씨」(1897), 「세 자매」(1900), 「벚꽃 동산」(1903) 등 여러 걸작들을 연이어 집필한다. 1904년, 기나긴 숙환 탓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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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은이)    정보 더보기
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 Пушкин, 1799∼1837)푸시킨(1799∼1837)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열두 살 때인 1811년 6년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했다. 그는 리체이 재학 중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질료나야 람파)’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해 러시아 남부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그는 남러시아의 캅카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풍의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뇨프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인 ≪캅카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 ≪도둑 형제≫ 등을 발표했고,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이 마을에 푸시킨의 집이 있고, 이 마을의 어귀의 스뱌트이 언덕 수도원에 그의 무덤이 있음)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느라 1825년에 발생한 데카브리스트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한다. 그는 1830년 가을 볼지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즉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돌의 손님>, <질병 때의 주연> 등 많은 작품을 쓴다. 1828년 겨울 새해 무렵에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한 푸시킨은 이듬해 봄에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에게 거절당하지만, 다시 청혼해서 결국 1831년 2월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지노 마을(아버지가 80채의 농가, 246명의 남자 농노, 237명의 여자 농노가 사는 이 마을을 물려주어 푸시킨이 젊은 지주가 됨)을 방문해 그곳에서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사≫ 등을 집필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만을 좋아할 뿐,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신의 아내와의 염문이 떠도는 중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는다. 그는 1836년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한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와 황제의 염문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자인 프랑스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국,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1837년 1월 7일 사망한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한다.푸시킨은 ‘러시아 문화의 등불’,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국민(민중)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러시아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에 있어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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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지은이)    정보 더보기
남프랑스 님에서 출생. 리옹의 고등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업이 파산하여 중퇴하고, 알레스에 있는 중학교 사환으로 일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857년 형이 있는 파리에 가서 문학에 전념하며 시집인 《사랑에 빠진 연인들 Les Amoureuses》을 발표, 이것이 당시의 입법의회 의장 모르니 공작에게 인정받아 비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문학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 그 후에 남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라르를 비롯하여 플로베르, 졸라, E. 공쿠르, 투르게네프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아내 쥘리의 내조로 행복한 57년의 생애를 파리에서 보냈다. 그는 친교를 맺은 문인들과 더불어 자연주의의 일파에 속했으나 선천적으로 민감한 감수성, 섬세한 시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적인 면이 넘치는 유연한 문체로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고향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애착심을 주제로 하여 인상주의적인 자신만의 작풍을 세웠다. 그의 문장은 보여 줄 것이 많은 예술가의 문장이자 시니컬하면서도 동정심을 담은 시인의 문장이다. 익살스런 농담에서부터 더없이 섬세한 환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재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학자들부터 군중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매혹했다.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 경험담으로 작품에 활기를 부여할 줄 알았던 그는, 세월이 흘렀어도 빛바래지 않은 다양한 작품으로 ‘아름다운 문학’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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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20년 조선일보사에 입사, 같은 해 11월 《개벽》에 첫 작품인 「야생화」를 발표하지만 혹평을 받으며 작가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개벽》에 「빈처」를 발표하면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발돋움했다. ‘백조 동인’을 거쳐 ‘파스큘라’와 ‘카프’로 이어지는 현진건의 문학 이력은 그의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숙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했으며 김동인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의 죽음」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정신병원장」 등의 단편과 《적도》 《무영탑》등의 장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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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50년 프랑스 항구도시 디에프 근처 미로메닐 성城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별거 이후 에트르타에 있는 어머니의 별장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이때 경험한 노르망디의 대자연, 시골 사람들의 성정과 습성 등은 그의 작품의 배경과 소재로 자주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작가로서의 삶에 사표가 된 두 명의 스승, 시인 루이 부예와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만난다. 1869년부터 파리 법과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지만, 이듬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대에 징집되어 학업을 중단한다. 1871년 7월에 제대하여 1872년 3월 아버지의 소개로 해군성에 취직한다. 1880년 모파상은 에밀 졸라 등과 함께 소설집 『메당의 저녁Les Soirees de Medan』을 출판하고, 여기 수록된 「비곗덩어리」가 프랑스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0년까지 10년 동안 300여 편에 이르는 중·단편과 6편의 장편, 5편의 희곡 등을 창작하며 플로베르, 졸라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 10년은 육체와 정신의 병이 심각하게 나빠진 시기로, 그는 척추 통증과 시력 저하, 불면증 등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몇 번의 자살 기도 이후 1892년 파리 교외의 정신병원에 보내진 뒤 그곳에서 거의 혼수상태로 지내다가 1893년 7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사진출처 -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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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 요시키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 후쿠오카 현 출신 프롤레타리아 작가다. 와세다대학에 진학하지만 학비 미납으로 제적당했다. 외항 선원으로서 홋카이도와 인도 콜카타를 왕래하는 화물선에서 근무한 경험을 훗날 작품으로 발표하기도 하고, 1920년에는 나고야 시멘트 공장에 근무하면서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다가 해고당하기도 한다. 그 후 나고야 노동자 협회에 가입해 각종 노동 쟁의를 지도하고, 1923년에 나고야 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된 후 미결수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창작 활동에 열중하는 한편 관동 대지진을 경험하기도 한다. 1925년 출옥 후 그의 대표작이자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매춘부>, <바다에 사는 사람들>, <시멘트 통 속의 편지>를 발표해 신진 작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된다. 다소 도식적이고 관념적이던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비해 하야마는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꾸밈없이 그려 내어 문학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한 단계 높였다. 그러나 1934년 무렵, 특별 고등 경찰에 의한 사상 통제가 강화되고 일본의 국론이 중국 대륙 진출로 통일되자 하야마는 전향해 당시의 체제에 대한 지지 입장을 강화하게 된다. 1945년 만주로 이주하기 위해 건너갔던 그는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귀국하던 도중, 그해 10월 열차 내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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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18년 11월 9일 러시아 오룔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귀족으로서 누리는 특권과 농노제의 모순을 동시에 경험하며 자랐다.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던 투르게네프는 강압적인 어머니와 농노제의 부조리를 목격하면서 예리한 관찰력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사냥꾼의 수기 Записки охотника』에서 농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여 집필하였는데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실제 농노제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투르게네프는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작품 속에 녹여낸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 본성의 다양한 면을 그려 냈으며, 시대적 가치가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에서 개인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깊이 탐구했다. 1843년 스물다섯 살이었던 투르게네프는 한 오페라 무대에서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프랑스 오페라 가수 폴린 비아르도(P. Viardot)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사랑에 빠져 버렸다. 투르게네프는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폴린 비아도르를 짝사랑했으며,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짝사랑 Ася』과 청년의 가슴 아픈 짝사랑을 다룬 『첫사랑 Первая любовь』에 그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주로 유럽에서 활동했던 투르게네프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서 서구 문화 예술계와 활발히 교류했다. 당대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L. Tolstoi)와 도스토옙스키가 최고로 인정받는 작가였지만, 서유럽에서는 투르게네프가 이들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척추암으로 고통받던 그는 1883년 9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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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인기 선정소설 작가로서 연극과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지기도 한 《레이디 오들리의 비밀》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부정으로 부모는 이혼했고, 오빠는 인디아로 갔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태즈매니아의 수상이 되었다. 매리 브래든은 3년간 작은 역할이기는 하지만 여배우 역할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1861년 정기간행물 출판업자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을 만났는데, 그는 매리 앤 크로울리와 결혼하여 다섯 아이를 두고 있었다. 매리와 존은 동거했고, 맥스웰의 아내가 죽은 다음 그들은 정식으로 결혼(1874)했는데 그들 사이에는 여섯 명의 아이가 있었다. 매리 브래든은 창의적인 플롯을 가진 소설을 80개 이상 쓴 다작을 한 작가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레이디 오들리의 비밀》(1862)이다. 그녀를 크게 인정받게 한 작품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돈을 벌 수 있게 했다. 중혼의 트랩에 걸린 여성을 다룬 《오로라 플로이드 Aurora Floyd》는 또 다른 베스트셀러로 소설로 출판되기 전 잡지에 연재되었다. 매리 브래든은 초자연적인 소설, 귀신 이야기를 다룬 소설, 역사 소설을 쓰기도 했다. 2014년에는 매리 브래든의 삶과 작품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매리 엘리자베스 브래든 학회가 창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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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골드 세이더 (지은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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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사에서 교열기자를 지냈으며, 여러 출판사에서 편집기획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사랑학 수업≫은 사랑을 꿈꾸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랑을 하고 있는, 이별로 상처 입은 이들이 문학 작품 속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통해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여 17편의 감동적이고 아름다우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세계 유명 작가들의 단편 소설로 엮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 인생극장》 《꼬마 유령의 놀이터》가 있다. 엮은 책으로는 《별》 《루이 브라유》 《노인과 바다》 《금오신화》 《고전문학 스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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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마린 (그림)    정보 더보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마음속에 흩어져 있는 말들을 풀어내고자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며, 마음과 마음이 닿는 그곳에서 오래도록 그리는 것이 꿈이다. 단행본 작업으로는 《내 마음에 두었습니다》《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너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의 일러스트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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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녀는 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뒤 평생을 사랑했던 그 사람에게 모아 놓은 돈 전부를 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적어도 한 번은 그가 자기를 생각해 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 <의자 고치는 여인> 중에서


“상황이 이런데 마차를 타고 가는 6분이나 8분 사이에 그녀가 제 사랑 고백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천만에요. 그리고 극장 안에서나 연극이 끝난 뒤에나 무슨 기회가 있겠어요? 전혀 없습니다. 그래요, 아버지. 이거야말로 아버지 돈으로도 풀 수 없는 매듭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돈으로 단 1분도 살 수 없어요.”
- <황금의 신과 사랑의 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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