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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일본사 > 일본근현대사
· ISBN : 9791198063953
· 쪽수 : 399쪽
책 소개
목차
차 례 . . . . . . . . . . . . . . . . . . . . . . . . . . . 6
총론 : 일본 국가주의의 기원 . . . . . . (박훈)
‘국가’의식의 형성 . . . . . . . . . . . . . . . . . 9
도쿠가와 시대와 막말기의 ‘국가’ . . . . . . . . . 11
도쿠가와 시대 충성의 중층성 . . . . . . . . . . . 19
제1의 충성대상 : 주군과 오이에 . . . . . . . . . 23
천황으로의 충성의 전회 . . . . . . . . . . . . . . 28
메이지인들의 국가의식 : 본서의 구성 . . . . . . 32
제 1 장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국가 구상. . (이새봄) 1
1.1 문명론에 대한 두 가지 접근 . . . . . . . . 41
1.2 국민국가 형성의 전제 조건 . . . . . . . . . 43
1.3 ‘양학자’로서의 정체성과 현실: 막부말기에서 폐번치현까지 . . . 48
1.4 『학문의 권장』: 국민국가론의 시작 . . . . 54
1.5 『문명론의 개략』: 일본의 문명 이론 . . . . 62
1.6 『분권론』이후의 전략 . . . . . . . . . . . 77
1.7 『민정일신』: 1879년의 전환 . . . . . . . . 82
1.8 국회 개설을 앞두고 . . . . . . . . . . . . . 87
제 2 장 오쿠마 시게노부의 국가 인식 (조국)
2.1 유명하지만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정치가 97
2.2 막말?메이지 초기의 오쿠마 . . . . . . . . . 101
2.3 영국식 의원내각제의 구상과 좌절 . . . . . 111
2.4 여론과 세론의 구별 . . . . . . . . . . . . . 124
2.5 헌정 실시 이후의 오쿠마 시게노부 . . . . . 128
2.6 현실정치가로서의 미덕과 한계 . . . . . . . 142
제 3 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메이지 국가 건설. . . (박완)
3.1 ‘동지이자 라이벌’ 이토와 야마가타 . . . . . 147
3.2 어친병 편성과 중앙 집권화 추진 . . . . . . 152
3.3 징병령 제정과 국민 국가 건설 . . . . . . . 161
3.4 민권파에의 대항과 입헌제 구상 . . . . . . 173
3.5 국회 개설 대책으로서의 지방 자치 제도 설계 183
3.6 현실주의와 침략주의가 공존하는 외교 ·국방론 193
3.7 끝없는 ‘적’에 맞서서 . . . . . . . . . . . . 215
제 4 장 다카무라 고운과 국가 건설기 일본미술 . . (오윤정)
4.1 ‘국가를 위한 미술’과 직인의 에토스 . . . . 221
4.2 박람회와 수출공예품 . . . . . . . . . . . . 230
4.3 도쿄미술학교와 ‘일본미술’ . . . . . . . . . 241
4.4 ≪구스노키마사시게상≫과 ≪사이고다카모리상≫ . . 256
4.5 메이지 일본의 ‘국가 미술가’ . . . . . . . . 272
제 5 장 우치무라 간조와 근대 일본 (박은영)
5.1 우치무라 간조라는 인물 . . . . . . . . . . . 279
5.2 사상형성의 계기들 . . . . . . . . . . . . . 285
5.3 일본국의 천직 . . . . . . . . . . . . . . . . 294
5.4 주전론과 비전론 . . . . . . . . . . . . . . . 301
5.5 허위의 애국과 진정한 애국 . . . . . . . . . 317
5.6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스트 . . . . . . . . . 330
제 6 장 쓰다 우메코와 일본의 사이 (이은경)
6.1 쓰다 우메코와 일본 . . . . . . . . . . . . . 337
6.2 최소한의 전기와 미 ·일 인식의 원점 . . . . 347
6.3 ‘가까운’ 일본: 황실?정부?애국심 . . . . . 354
6.4 ‘아쉬운’ 일본: 이교도?남녀차별?학교 교육 373
6.5 다시, 일본 . . . . . . . . . . . . . . . . . . 391
찾아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395
저자소개
책속에서
자칫 쇼군은 본래의 ‘왕자王者’인 천황을 억누르고 권력을 장악한 ‘패자?者’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주자학에서 왕자와 패자, 왕도와 패도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후반 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자, 본래의 왕자는 천황이며 막부는 그의 위임을 받아 대권을 대행하고 있다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으로 자기 변호했다. 막부 로주老中이자 당대 최고의 유학자 중 한명이었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아예 일본 전국의 60여주는 천황으로부터 맡겨진 것이라고 명언했다. 오규 소라이나 아라이 하쿠세키는 한때나마 천황을 뛰어넘어 막부의 통치정당성을 사상적으로 확보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이 시기에 와서 막부는 아예 그런 시도를 포기한 것이다. 막부의 힘이 천황을 압도할 때에는 ‘대정위임론’에 새삼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없었지만, 이 논법은 ‘위임’의 종식과 그 ‘반환’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이기도 했다. ‘대정위임론’은 사실 그 후 100년도 채 안되어 일어난 ‘대정봉환론’으로 가는 길을 예비한것이었다.
- 대정위임론은 논리적으로 천황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대정봉환과 가깝기 때문에 쇼군에게는 위험했음
후쿠자와의 국회에 대한 낙관은 정부가 초연주의를 주장하고 의원내각제를 사실상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장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정당 내각이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국회가 개설된 이후에도 몇 년 간은 ‘회의의 훈련’이나 ‘의사議事 연습’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 속에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무탈하게 보낼 것인가가 관민조화론의 초점이었다. 하지만 제국의회의 현실은 그의 기대를 계속해서 배신했다. 결국 후쿠자와는 정부와 정당 사이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관민조화론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한 국회 해산 등의 수단에 호소해 정당과 힘으로 대결하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 관민조화를 지향했으나 현실정치 속에서 종종 국권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문제는 이같은 일관된 인식과 정치활동이 내재적으로 완결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주지하듯 근대 일본의 역사는 한국, 중국 등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이기도 했다. 오쿠마의 시대 흐름에 대한 민감한 포착은 일본 국내에서의 헌정 실시에 대한 일관된 인식으로 나타났으나,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안이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우세로 전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오쿠마는 일본이 산동성, 나아가 양자강 지역까지 점령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물론 오쿠마가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중일 간 우호 관계를 심화할 수 있다 보았다. 실제로 청일전쟁, 의화단 사건 이후 와세다대학은 청국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기관인 청국유학생부를 신설하는 등 중일 간 교류와 우호관계 수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것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쿠마 내각 시기에 이뤄졌다. 중국과의 우호 관계 수립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국익이라는 관점 속에서만 이해되었던 것이다.
- 주변국과의 공존을 지향하면서도 청일전쟁에서 강경하게 나아갔던 오쿠마 시게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