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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32026718
· 쪽수 : 235쪽
책 소개
목차
여는 글
박지호, 패션이라는 파사주
들다
김중혁, 종이 위의 욕조
쓰다
정이현, 상자의 미래
정용준, 미드윈터
신다
은희경, 대용품
편혜영, 앨리스 옆집에 살았다
백가흠, 네 친구
입다
손보미, 언포게터블UNFORGETTABLE
닫는 글
이광호, 보잘것없는 비밀들
IN THE CLOSET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 들다
가방 안에 뭐 들어 있어요?
별거 없어요.
가방 안에 든 것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글쎄요.
잃어버리면 절대 안 되는 거.
없을걸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건 가방에 안 넣죠.
그래요?
전 그래요.
―김중혁, 「종이 위의 욕조」
- 쓰다
양은 그들의 사랑이 불투명한 도기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청주 같은 것이었다고 의심해야 했다. 한 잔씩 따라 달게 홀짝이다 보면 이윽고 비어버리는 것. 퍼내어도,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 술병은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 전에 박은 음모에 대해 말했었다. 공작에 휘말렸어. 그는 ‘적들’이라는 명사와 ‘저들’이라는 대명사를 병행해 사용했다. 정치인이라는 직업답게 전에도 종종 쓰던 용어였다. 적들이 이미 증거를 확보하고 있어. 저들은 덫에 걸린 짐승은 그냥 놔주지 않아. 그때까지 그녀는 오로지 시간만은 그들의 편이라고 믿었다. 모두에게 져도, 시간에만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이현, 「상자의 미래」
1월의 어느 밤이었어. 겨울도 그쯤 되면 바위처럼 단단해지지. [...] 뭔가 극복해야 하거나 이겨내야 한다는 마음조차 사라지거든. 순록이 자신의 무뚝뚝한 기질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저조한 감정에 대해 깊이 회의하지 않게 되지. 그런 나날들이 지나고 있었어. 그 밤은 이상하게 포근했던 것 같아. 우리는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어.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지만 이상하게 미명처럼 푸르게 느껴지더군. 그에게 물었어. 괜찮으냐고. 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나쁘지 않아,라고 답하더군. 그도 내게 같은 질문을 했지. 나는 우는 시늉을 하며 말했어. 죽겠다,라고 말이야. 그와 나는 잠시 웃었던 것 같아. 그리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어. [...] 그때 그는 내게 줄 모자를 만들고 있었어.
―정용준, 「미드윈터」
- 신다
작은 소년은 자기 신발을 벗더니 친구의 신발에 발을 집어넣었다. [...] 그는 잠깐 도로 엉덩이를 붙인 다음 제 어깨로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이것 봐. 앉은키는 내가 더 커. 그런 다음 몸을 일으켜 지도교사의 자리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소년은 고개를 통로 쪽으로 기울인 채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비틀비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단히 바닥을 딛고 버티는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은희경, 「대용품」
유신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런 짓을 벌일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연은 불쑥 신발장 문을 열었다. 무엇이 그렇게 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유신이 옆집 도어록을 두고 비밀번호로만 열 수 있다고 해서일까. 금은방 도어록을 설치했다고 거짓말을 해서일까. 하루 종일 제목도 모르는 올드팝을 듣고 가사도 모르면서 허밍으로 뭔가 따라 부르기 때문은 아닐까.
―편혜영, 「앨리스 옆집에 살았다」
혜진은 비를 흠뻑 맞으며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배수구로 쓸려 내려가는 빗물과 멀리 도망가 뒤집어진 가방을 번갈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더듬더듬 흩어진 여자의 낡은 구두를 가지런하게 모았다. 앞부리의 굵은 주름이 만져졌다. 한 번도 닦아 신지 않은 듯 보이는 구두. 먼지와 때가 굳어 가죽의 일부가 되어버린 구두를 그녀가 가슴에 움켜쥐었다. 그녀는 여자의 낡고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절뚝이며 골목길을 내려갔다. 굽이 나간 하이힐이 가방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덜그럭거렸다.
―백가흠, 「네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