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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열자, 한비, 장자, 공자, 맹자, 묵자, 순자 (지은이), 정철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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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동양철학 일반
· ISBN : 9788935505210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5-07-25

책 소개

‘동양의 탈무드’라고 일컬어지는 이 책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및 학자들, 즉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장자(莊子), 공자(孔子), 맹자(孟子), 묵자(墨子), 순자(荀子)의 사상과 일화들을 엮은 것이다.

목차

머리글
列子篇
韓非子篇
莊子篇
孔子篇
孟子篇
墨子篇
荀子篇

저자소개

공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춘추시대 노나라 출신으로, 성은 공(孔),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였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으며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예악(禮樂)에 관심이 많았고, 예를 통해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정치적 이상을 품고 있었다. 공자는 약 30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쳤으며, 신분과 출신에 상관없이 교육 기회를 열어 준 최초의 사상가로 전해진다. 제자는 3,000여 명, 그중 뛰어난 인물이 72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의 교육 내용은 시·서·예·악 등 고전 학문을 바탕으로 인(仁)·예(禮) 중심의 인격 수양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노나라에서 중도재, 사구를 거쳐 대사구(법무부 장관), 재상의 역할을 겸직하는 관직에까지 올랐으나,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개혁이 지속되지 못했다. 그는 55세 전후부터 14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정치 이상을 피력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이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정치 활동을 접고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 정리에 힘썼다. 《춘추》 편찬자가 공자로 알려져 있으며, 《논어》는 제자들이 남긴 공자의 언행록이다. 공자는 73세에 세상을 떠났고, 사후에 제자들을 중심으로 유가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한대 이후 국가적 사상으로 채택되며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자는 큰 정치적 성공보다 교육과 사상의 전수로 후대에 결정적 영향을 남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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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성이 묵(墨)이고 이름은 적(翟)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적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것을 알기는 어렵다. 중국의 역사학자 첸무(錢穆)의 고증에 따르면 BC 479년경에 태어나서 BC 381년경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묵자≫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묵적이 묵가(墨家)를 창시해 활동한 시기는 BC 450년경부터 BC 390년경까지로 춘추 말에서 전국 초에 해당한다. 태어난 곳은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곳과도 가까운 노(魯)나라의 등(?)이라는 곳으로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텅저우시(?州市) 근교에 해당한다. 출신 계층에 대해서는 묵(墨)이라는 성과 관련해 전과자라는 설과, 그의 군사 사상과 관련해 무사라는 설 및 기술자 집단을 이끄는 공장(工匠)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모두 분명한 근거가 없는 주장들이다. 그는 무학, 문맹의 농부와는 달리 사각(史角)의 자손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지식인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서민보다는 높은 계층인 사(士)의 신분이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유학을 공부했으나 유가의 번잡한 예(禮)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학설을 창설했다. 그가 살던 때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어 천하가 요동치던 불안한 시대였다. 따라서 그는 분쟁을 제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자기의 주요 임무로 삼았다. 바쁘게 유세하고 자기의 이상을 선전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묵자의 자리는 따뜻할 날이 없다”라는 말이 전해오는 것이다. 맹자가 묵자를 금수(禽獸)와 같은 존재라고 욕하면서도 “머리끝에서 발뒤꿈치까지 온몸이 다 닳도록 천하를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칭찬하는 걸 보더라도 묵자의 천하를 위한 희생정신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상가이면서도 논리학자이고 군사 전문가였다. ≪묵경(墨經)≫이 쓰인 것은 후기 묵가에 의해서지만 이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사상은 묵자에게서 온 것이다. ‘성수(城守)’ 제편에는 그의 탁월한 군사적 식견이 표현되어 있다. 묵자는 또 뛰어난 과학 기술자로 군사 무기를 발명하기도 하고 기하학·광학·역학(力學) 등에 관한 창의적인 이론을 내놓았다. 그의 제자는 300명이라고 ≪묵자≫에 나와 있으나 이것이 전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제자 중에는 각국에 나가 관리가 되거나 유세를 하고 다닌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여씨춘추≫에 “공자와 묵자의 무리가 매우 많고 제자들이 매우 많아서 천하에 가득 차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학술적인 영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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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성은 장莊이고 이름은 주周이며 자는 자휴子休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장자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 『장자』다. 사마천은 장자의 출신지와 활동 연대에 대해 몽蒙 지방 사람이고 이름은 주周라고 말했다. 일찍이 칠원리漆園吏를 지냈으며, 양梁나라 혜왕惠王, 제齊나라 선왕宣王 등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덧붙였다. 역대로 몽이라는 지명을 어디에 있는 땅으로 보느냐에 따라 장자의 출신 국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게 갈라졌다. 즉 송宋나라, 양梁나라, 초楚나라, 제齊나라, 노魯나라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었지만 초나라, 제나라, 노나라 등의 주장들은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송과 양은 같은 나라이거나 동일한 지역에 대한 다른 명칭일 수 있다. 송나라가 양나라에 병합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장자가 송나라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 있다. 칠원리에서 보듯 대개 장자가 관영 옻나무밭을 관리하는 말단관리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장자가 정식으로 밥벌이를 한 것은 이것이 전부였던 것 같다. 장자의 활동 시기는 양나라 혜왕이나 제나라 선왕 등과 같은 시대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370년에서 기원전 301년 사이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근현대의 좀 더 세밀한 역사 추적에 따르면 상한선이 기원전 375년을 넘지 않으며 하한선은 기원전 275년을 벗어나지 않는다. 흔히 노자老子와 더불어 도가道家의 쌍벽으로 일컬어지는데, 특히 위진魏晉시대와 북송北宋 이후의 문사 文士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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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맹자의 본명은 가(軻)다. 그의 탄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서기전 372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89년에 몰했다. 노나라에 붙어 있는 추(鄒, 오늘날 산동성 추현의 남쪽)나라 출신이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제자로부터 유학을 공부했다. 정확한 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맹자》의 내용 중 그의 아버지 상은 사의 예로 치르고, 그의 어머니 상은 대부의 예로 치렀다는 것으로 판단할 때 부유한 젊은 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극진히 섬기고 말씀에 충실한 점으로 볼 때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아래 성장한 듯하다. 40세가 넘어 정치 일선에 나섰는데, 주로 군주의 정책 고문 등을 담당했다. 책과 살림살이를 잔뜩 실은 수십 대의 수레에다 수백 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유세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다. 그는 추, 노, 임, 제, 송, 설, 등, 위나라 등에 유세했는데, 제선왕으로부터 경의 벼슬을 제수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나 끝내 어진 정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환갑 무렵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를 양성하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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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기원전 400년경 정(鄭)나라에서 태어났으며 노자의 제자이자 장자의 선배이다. 활동 시기는 공자와 맹자의 중간시대라 할 수 있는데, 혹자는 열자가 실존인물이 아니며 <열자>라는 책 자체도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문점을 안고 있는 <열자>에는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철학을 보여주는 독특한 우화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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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국 시대 말기의 유교 사상가이자 학자이다. 일찍이 유가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수재로 이름이 나 열다섯 살에 학술 문화의 중심지였던 직하학궁에서 유학했다. 이후 20여 년간 여러 학자와 교류하며 학문적 명망을 쌓았고 직하학궁의 우두머리인 좨주를 세 차례 역임했다. 제나라 사람의 모함으로 초나라로 쫓겨갔을 때는 저명한 재상 춘신군이 그를 난릉 지방의 영으로 삼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두려워진 춘신군은 곧 순자를 물리쳤다. 순자는 결국 진나라로 가 법가의 정책가로 명성을 날리던 응후, 범수와 진소왕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을 왕도정치로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해 고향인 조나라로 돌아가게 되니 이때 그의 나이는 거의 여든에 가까웠다. 한편 초나라의 춘신군은 한 참모의 설득으로 다시 순자를 부른다. 그러나 순자는 신랄한 풍자가 담긴 답신을 보내 거절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차례 정중한 청을 보내오는 춘신군에게 순자는 결국 초나라의 난릉령직을 수락했다. 순자의 나이 아흔여덟으로 추측되는 서기전 238년경에 춘신군은 살해되었고 순자는 난릉령에서 물러나 수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는 격동의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의 모든 학설을 섭렵하는 치열한 학문적 노력으로 초기 유가 사상의 학문적 체계를 집대성했다. 《논어》, 《맹자》, 《도덕경》 등이 일화, 경구 등으로 채워진 서술양식이었던 데 비해, 《순자》는 유가에서 저자가 쓴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이며, 총론적인 설명, 연속적인 논증, 세부적인 상술 등으로 구성된 응집력 있는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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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약 280년경 태어나 233년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름은 ‘한비’로 그의 이름을 높여 부른 것이 ‘한비자’이다. 그는 한나라 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이었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을 잘 꾸미지 못했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써 중국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이름난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법가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과 한 나라의 어려운 처지 안에서 발전했다. 약한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오직 엄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나라의 힘을 한 길로 동원함으로써 부강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글은 한나라의 군주에게는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진왕만은 한비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진시황이 진왕이던 시절, 한비자의 저술을 읽고는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한을 공격하여 실제로 한비자를 만난 진왕은 자신의 통일 대업에 한비자의 도움을 얻고 싶어 했으나 그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러다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이사의 모함을 받자 마음이 돌아서 한비자에게 사약을 보내고 만다. 사마천은 한비자의 죽음을 두고 “세난(說難, 유세와 설득의 어려움) 같은 훌륭한 글을 썼으면서도 자신은 그로 인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죽였으나 진시황이 된 뒤 한비자의 법술 이론에 큰 영향을 받고, 천하 통치의 이론적인 버팀목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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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옮긴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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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위(魏)나라에 동문오(東門吳)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조금도 슬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해 그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끔찍이도 자식을 사랑하더니만 그 자식이 죽었는데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그러자 동문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동안에도 내게 자식이 없지 않았는가. 자식이 없었을 때 별로 자식 없는 것이 슬픈 줄을 모르고 지내왔지. 지금도 그때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다시 원래대로 된 것뿐이니 슬퍼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송(宋)나라의 시골 사람 하나가 박옥(璞玉)을 얻어 대신인 자한(子罕)에게 바치려 했으나 자한이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의 뜻을 말했다.
“이것은 보물이옵니다. 상공과 같은 높으신 분이 가지실 물건으로, 저같이 천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 자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그것을 보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대가 주는 박옥을 받지 않는 것을 보물로 생각한다네.”
말하자면 이 시골 사람은 박옥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줄로 생각했지만, 자한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재물을 바라지 않기를 바라고, 얻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제(齊)나라의 대부인 습사미가 당시 실권자인 전성자를 만나러 갔었다. 전성자는 그와 함께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 사방을 구경했다. 삼면은 한없이 멀리까지 보이는데, 남쪽만은 습사미의 집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습사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 나무를 베게 했는데 도끼로 몇 번 찍다가는 다시 그만두게 했다. 그래서 청지기가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달라지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속담에 ‘깊은 물속의 고기를 헤아리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화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전성자는 큰일을 꾸미려 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내가 남의 속마음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면 내 몸이 위태롭다. 나무를 베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될 리는 없다. 그러나 남의 속을 들여다본 죄는 실상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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