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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열자, 한비, 장자, 공자, 맹자, 묵자, 순자 (지은이), 정철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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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제자백가의 숲에서 나를 힐링하라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동양철학 일반
· ISBN : 9788935505210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15-07-25

책 소개

‘동양의 탈무드’라고 일컬어지는 이 책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및 학자들, 즉 열자(列子), 한비자(韓非子), 장자(莊子), 공자(孔子), 맹자(孟子), 묵자(墨子), 순자(荀子)의 사상과 일화들을 엮은 것이다.

목차

머리글
列子篇
韓非子篇
莊子篇
孔子篇
孟子篇
墨子篇
荀子篇

저자소개

공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기원전 551년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아버지 숙양홀(叔梁紇)과 어머니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 둘레가 언덕처럼 솟아 있어 이름을 구(丘: 언덕 구)라고 했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열아홉 살 때 송나라 출신 여인과 혼인했다. 스무 살 때부터 계씨(季氏) 가문의 창고지기로 일했고 가축 사육일도 맡았지만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흔여덟 살 때 정치에서 물러나 본격적으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3년 뒤 양호가 망명하면서 중도(中都)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고 다시 사공(司空) 벼슬과 대사구(大司寇) 벼슬을 지냈다. 기원전 497년 이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기원전 484년 노나라로 돌아왔고 일흔세 살 때인 기원전 479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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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공자가 세상을 떠난 몇 년 후에 태어났으며, 흔히 묵자(墨子)라고 한다. 주(周)나라 봉건제도가 급속히 붕괴되어 작은 봉건국가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성장한 그는 겸애(兼愛)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도 역시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학자였으나, 주례(周禮)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에 생각을 달리하여 자신만의 사상을 세상에 내놓고 그것을 실천할 군주를 찾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에 적합한 군주를 찾지 못하자, 학교를 세워 후학을 키우는 데 힘썼다. 그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했으며 전쟁에 반대하여 평화주의를 주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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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중국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장자[본명은 장주(莊周)]는 태어나고 죽은 해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읍(蒙邑: 현재의 허난성의 고을)에서 태어나 맹자와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칠원(漆園)에서 관리로 일하다 그만둔 이후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쓰려 한 적도 있었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장자는 노자를 계승하여 도(道)를 천지 만물의 근본 원리로 삼고, 어떤 대상에 욕심을 내거나 어떤 일을 이루려 하지 않으며[무위(無爲)],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자연(自然)]고 주장하여,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도 하는 도가(道家)를 이루었다. 이러한 장자 사상은 중국 사람들의 중요한 생활철학의 일면으로 발전하였으며, 당(唐)나라 왕실에서는 노자[이이(李耳)]가 같은 성이라 하여 노장사상을 무척 존중하였다. 이에 현종(玄宗)은 장자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고 그의 책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높였다. 장자 사상은 중국의 문학과 예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자』는 원래 52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정리해 엮은 33편(내편 7, 외편 15, 잡편 1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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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맹자는 성은 맹孟, 이름은 가軻이다. 전국시대 중·후엽 추鄒나라 사람이다. 도가 사상가 장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공자 사후 100년이 지나서 태어나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에게서 유학을 배웠다. 여러 나라가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어 혼란이 극심하던 때, 폭력과 무력을 쓰는 패도정치가 아닌 인의仁義로 천하를 다스리는 왕도정치로 구세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분투 헌신했다. 여러 제후를 만나 이상 정치를 현실화할 방안을 모색했으나 공자가 그랬듯 여의치 못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후대 유학자들에게 ‘아성亞聖’, 즉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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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기원전 400년경 정(鄭)나라에서 태어났으며 노자의 제자이자 장자의 선배이다. 활동 시기는 공자와 맹자의 중간시대라 할 수 있는데, 혹자는 열자가 실존인물이 아니며 <열자>라는 책 자체도 위작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문점을 안고 있는 <열자>에는 고대 중국인들의 생활철학을 보여주는 독특한 우화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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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국 시대 말기의 유교 사상가이자 학자이다. 일찍이 유가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수재로 이름이 나 열다섯 살에 학술 문화의 중심지였던 직하학궁에서 유학했다. 이후 20여 년간 여러 학자와 교류하며 학문적 명망을 쌓았고 직하학궁의 우두머리인 좨주를 세 차례 역임했다. 제나라 사람의 모함으로 초나라로 쫓겨갔을 때는 저명한 재상 춘신군이 그를 난릉 지방의 영으로 삼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이 두려워진 춘신군은 곧 순자를 물리쳤다. 순자는 결국 진나라로 가 법가의 정책가로 명성을 날리던 응후, 범수와 진소왕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을 왕도정치로 설득시키는 데는 실패해 고향인 조나라로 돌아가게 되니 이때 그의 나이는 거의 여든에 가까웠다. 한편 초나라의 춘신군은 한 참모의 설득으로 다시 순자를 부른다. 그러나 순자는 신랄한 풍자가 담긴 답신을 보내 거절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여러 차례 정중한 청을 보내오는 춘신군에게 순자는 결국 초나라의 난릉령직을 수락했다. 순자의 나이 아흔여덟으로 추측되는 서기전 238년경에 춘신군은 살해되었고 순자는 난릉령에서 물러나 수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그는 격동의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의 모든 학설을 섭렵하는 치열한 학문적 노력으로 초기 유가 사상의 학문적 체계를 집대성했다. 《논어》, 《맹자》, 《도덕경》 등이 일화, 경구 등으로 채워진 서술양식이었던 데 비해, 《순자》는 유가에서 저자가 쓴 최초의 체계적인 논문이며, 총론적인 설명, 연속적인 논증, 세부적인 상술 등으로 구성된 응집력 있는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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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출신으로 기원전 약 280년경 태어나 233년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름은 ‘한비’로 그의 이름을 높여 부른 것이 ‘한비자’이다. 그는 한나라 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후궁이었다. 한비자는 말을 더듬고 말을 잘 꾸미지 못했지만, 재주와 생각이 남다르고 글을 잘 써 중국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이름난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법가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과 한 나라의 어려운 처지 안에서 발전했다. 약한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오직 엄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나라의 힘을 한 길로 동원함으로써 부강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글은 한나라의 군주에게는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진왕만은 한비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았다. 진시황이 진왕이던 시절, 한비자의 저술을 읽고는 “이 사람을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한을 공격하여 실제로 한비자를 만난 진왕은 자신의 통일 대업에 한비자의 도움을 얻고 싶어 했으나 그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러다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이사의 모함을 받자 마음이 돌아서 한비자에게 사약을 보내고 만다. 사마천은 한비자의 죽음을 두고 “세난(說難, 유세와 설득의 어려움) 같은 훌륭한 글을 썼으면서도 자신은 그로 인한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죽였으나 진시황이 된 뒤 한비자의 법술 이론에 큰 영향을 받고, 천하 통치의 이론적인 버팀목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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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옮긴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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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위(魏)나라에 동문오(東門吳)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죽었는데도 조금도 슬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해 그의 아내가 물었다.
“당신은 끔찍이도 자식을 사랑하더니만 그 자식이 죽었는데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으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그러자 동문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동안에도 내게 자식이 없지 않았는가. 자식이 없었을 때 별로 자식 없는 것이 슬픈 줄을 모르고 지내왔지. 지금도 그때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다시 원래대로 된 것뿐이니 슬퍼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송(宋)나라의 시골 사람 하나가 박옥(璞玉)을 얻어 대신인 자한(子罕)에게 바치려 했으나 자한이 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의 뜻을 말했다.
“이것은 보물이옵니다. 상공과 같은 높으신 분이 가지실 물건으로, 저같이 천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자 자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그것을 보물로 알고 있지만, 나는 그대가 주는 박옥을 받지 않는 것을 보물로 생각한다네.”
말하자면 이 시골 사람은 박옥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줄로 생각했지만, 자한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재물을 바라지 않기를 바라고, 얻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했다.


제(齊)나라의 대부인 습사미가 당시 실권자인 전성자를 만나러 갔었다. 전성자는 그와 함께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 사방을 구경했다. 삼면은 한없이 멀리까지 보이는데, 남쪽만은 습사미의 집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전성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습사미는 집으로 돌아오자, 곧 나무를 베게 했는데 도끼로 몇 번 찍다가는 다시 그만두게 했다. 그래서 청지기가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달라지셨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속담에 ‘깊은 물속의 고기를 헤아리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화를 입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전성자는 큰일을 꾸미려 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내가 남의 속마음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면 내 몸이 위태롭다. 나무를 베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될 리는 없다. 그러나 남의 속을 들여다본 죄는 실상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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