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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한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88200498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8-12-14
책 소개
목차
계절의 끝_임성순
관음종자_한현영
붉은 가면을 쓴 사나이_김이환
스팀워커_정명섭
용서_강지영
육식주의자 클럽_전건우
탐정 애랑_배상민
폭수_문지혁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당신은 이 클럽의 아홉 번째 회원이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육식주의자 클럽’이라 쓰인 네온간판 아래 지하로 향하는 계단참의 문을 열었습니다. 계단 아래에는 허름한 건물 외관과는 달리 제법 그럴듯한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레스토랑에는 오래된 유럽의 성 안에 놓여 있을 것 같은 기다란 식탁과 아홉 개의 의자가 있습니다. 그중 여덟 개의 의자에는 오랜 여행 끝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붉은 가면을 쓴 사나이와 어젯밤 옆집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본 후 불안으로 밤을 지새운 웹툰 작가가 앉아 있습니다. 천재 수학자와의 마지막 인터뷰를 앞둔 대학원생도,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이 무거운 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로봇을 타고 온 군인도 있습니다. 식탁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지하를 빠져나가지 못한 음식 냄새를 쫓다 소식 없는 연인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탐험가도 있습니다. 조선의 탐라에서 지금의 제주를 거쳐 오느라 옛날 복식인 탐정과 자신이 예순두 살의 국어 교사라고 우기는 갓난아이는 서로를 믿지 못해 의심의 눈길이 가득합니다.
당신은 계단을 내려와 이 기묘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섭니다. 마지막 회원의 도착을 확인한 클럽 회장은 식탁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포크로 영롱한 소리를 냅니다. 당신을 포함한 여덟 명의 회원은 그 소리에 주목합니다.
회장은 당신을 포함한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을 찬찬히 읽습니다. 그간 자신을 포함한 여덟 명의 회원이 차례로 가져온 음식을 떠올리는 듯 입술을 훔치는 혀의 놀림이 제법 군침을 돌게 합니다. 이제 당신을 포함한 여덟 명의 회원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앞에 놓인 유리잔을 포크로 두드리며 회장을 재촉합니다.
“지금부터 육식주의자 클럽의 아홉 번째 정기 시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그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음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상상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을 근거로 하는 것이기에, 지금부터 맛볼 요리는 절대 상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할 겁니다.
하지만 이곳에도 규칙은 있습니다. 이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지금부터 매우 만족스러운 요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육식주의자 클럽의 규칙에 따라 이 시간 이후로 들은 이야기는 모두 비밀에 부칠 것을 제안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서문 중에서)
“왜? 왜 당신이야? 왜 당신이 가야 하냐고.”
“논문을 쓴 적 있거든. 대멸종과 GRB의 관련성에 대해서. 아마 우리나라에선 그런 주제의 논문을 쓴 학자는 내가 유일할 거야.”
“그게 말이 돼? 논문을 쓴 적이 있다고 가야 한다고?”
“그러게. 사실 나도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정말 GRB인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가는 것보단 낫겠지.”
“그 GRB라는 게 뭔데?”
“감마레이버스트.”
“그게 뭐길래? 좀 알아듣게 설명하라고!”
“우주에서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폭발해 갑자기 엄청나게 강력한 감마선 폭풍이 몰아치는 거야. 감마선이란 핵폭탄이 터지면 나오는 죽음의 광선인데, 그게 뜬금없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거지.”
저는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황혼이 물들기 시작한 하늘은 지평선 끝이 조금 밝은 것 빼면 별다를 것 없어 보였습니다.
“갑자기? 그게 말이 돼?”
“갑자기는 아니고, 거리에 따라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 전, 몇 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어. 다만 지금 지구에 그 광선이 도착한 거지.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직격했던 거 같아. 만일 그렇다면 그쪽 사람들은 모두 즉사했을 거야. 전자장비는 다 타버렸을 거고, 생명체들은 크고 작은 것 가리지 않고 세균까지 죽어버렸을 거야. 감마선을 맞으면 세포를 이루는 분자들이나 DNA가 이온화되니까.”
(계절의 끝)
“야, 담배 피우지 마.”
“뭐 어때.”
중저음에 가까운 남자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잠 때문에 조금씩 멍해지는 순간, 매캐한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콜록콜록!”
나는 놀라 내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나에게 담배 냄새를 맡으면 기침을 하는 버릇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저쪽 방에서도 선명하게 내 기침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옆방에서 당혹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뭐야? 옆집 기침 소리가 왜 이리 가깝게 들려?”
“방음이 잘 안 되나 보지.”
“오피스텔이 이렇게 방음이 안 된다고? 이상한데.”
저벅저벅, 옆방의 남자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인영이 구멍 너머로 아스라하게 보였다.
“알고 보면 옆방에서 다 듣고 있는 거 아니야?”
그는 내가 앉아 있는 벽 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그 틈새를 발견할 수 있을 위치였다. 구멍에 눈만 가져다 대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입을 막은 채로 숨도 쉬지 못하고 앉은 자세 그대로였으므로. 얼른 피했어야 했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등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남자가 막 내가 보이는 벽의 틈새를 향해 몸을 숙이려고 했을 때였다.
(관음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