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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윤동주, 백석, 김소월, 정지용, 김영랑, 노천명, 심훈, 노자영, 장정심, 조명희, 이용악, 박인환, 권환, 변영로, 윤곤강, 박용철, 오장환, 한용운, 홍사용, 황석우, 허민, 이상, 이상화, 라이너 마리아 릴케, 크리스티나 G. 로세티, 마쓰오 바쇼, 요사 부손, 다이구 료칸, 이케니시 곤스이, 다카하마 교시, 기노 쓰라유키, 고바야시 잇사, 가가노 지요니 (지은이), 칼 라르손, 클로드 모네, 에곤 실레 (그림)
  |  
저녁달고양이
2020-12-25
  |  
1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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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책 정보

· 제목 :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89217082
· 쪽수 : 280쪽

책 소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시리즈의 겨울 시를 합본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겨울>. 윤동주, 백석 등 33명 시인과, 이케아의 모티프가 된 스웨덴의 화가 칼 라르손,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등이 표현하는 겨울의 매력이 흘러넘치는 책이다.

목차

十二月.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1일 편지 _윤동주
2일 호주머니 _윤동주
3일 내마음을 아실 이 _김영랑
4일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_백석
5일 하이쿠 _요사 부손
6일 눈 오는 지도(地圖) _윤동주
7일 하이쿠 _마쓰오 바쇼
8일 눈 밤 _심훈
9일 이런 시(時) _이상
10일 사랑과 잠 _황석우
11일 하이쿠 _마쓰오 바쇼
12일 명상(暝想) _윤동주
13일 손수건 _장정심
14일 창 구멍 _윤동주
15일 이별을 하느니 _이상화
16일 당신에게 _장정심
17일 하염없는 바람의 노래 _박용철
18일 그리움 _이용악
19일 고야(古夜) _백석
20일 편지 _노자영
21일 설야(雪夜) 산책 _노천명
22일 눈보라 _노천명
23일 순례의 서 _릴케
24일 님의 손길 _한용운
25일 새로워진 행복 _박용철
26일 간판 없는 거리 _윤동주
27일 하이쿠 _이케니시 곤스이
28일 개 _백석
29일 마당 앞 맑은 새암을 _김영랑
30일 전라도 가시내 _이용악
31일 그믐밤 _허민

一月.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1일 서시 _윤동주
2일 바람이 불어 _윤동주
3일 가슴 _윤동주
4일 못 자는 밤 _윤동주
5일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_백석
6일 저녁해ㅅ살 _정지용
7일 하이쿠 _다카하마 교시
8일 설상소요(雪上逍遙) _변영로
9일 국수 _백석
10일 눈 _윤동주
11일 개 _윤동주
12일 거짓부리 _윤동주
13일 눈보라 _오장환
14일 유리창(琉璃窓) 1 _정지용
15일 나 취했노라 _백석
16일 하이쿠 _기노 쓰라유키
17일 통영(統營) 2 _백석
18일 별을 쳐다보면 _노쳔명
19일 햇빛?바람 _윤동주
20일 흰 바람벽이 있어 _백석
21일 생시에 못 뵈올 님을 _변영로
22일 호수 _정지용
23일 그리워 _정지용
24일 탕약 _백석
25일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_박용철
26일 월광(月光) _권환
27일 눈 _윤동주
28일 추억(追憶) _윤곤강
29일 눈은 내리네 _이장희
30일 산상(山上) _윤동주
31일 언덕 _박인환

二月.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1일 길 _윤동주
2일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_윤동주
3일 숨ㅅ기 내기 _정지용
4일 노래 - 내가 죽거든 _크리스티나 로세티
5일 이월 햇발 _변영로
6일 못 잊어 _김소월
7일 잠 놓친 밤 _변영로
8일 사랑하는 까닭 _한용운
9일 슬픈 족속(族屬) _윤동주
10일 하이쿠 _료칸
11일 모란봉에서 _윤동주
12일 여우난골족 _백석
13일 비로봉 _윤동주
14일 하이쿠 _고바야시 잇사
15일 두보나 이백같이 _백석
16일 십자가 _윤동주
17일 산협(山峽)의 오후 _윤동주
18일 목구(木具) _백석
19일 하이쿠 _가가노 지요니
20일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_홍사용
21일 시계 _권환
22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_백석
23일 기다리는 봄 _윤곤강
24일 새벽이 올 때까지 _윤동주
25일 팔복(八福) _윤동주
26일 달 좇아 _조명희
27일 이별 _윤동주
28일 묻지 마오 _장정심
29일 고독 _노천명

저자소개

김소월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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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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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 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 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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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 프라하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5년 국립 프라하대학교에 입학했고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이듬해 뮌헨대학교에서 예술사, 미학 등을 수학했고, 뮌헨에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났다. 열아홉 살 때 첫 시집 『삶과 가곡』(1894)을 자비로 출간했고, 『가신봉폐』(1895), 『꿈의 왕관을 쓰고』(1897), 『강림절』(1898) 등 낭만주의 경향의 시집들, 이탈리아 여행기 『피렌체 일기』(1898), 체코 독립운동을 다룬 단편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1899), 로댕의 예술철학을 담은 『오귀스트 로댕』(1903)과 이때의 영감으로 완성한 『신시집』(1907) 등을 펴냈다. 1901년 로댕의 제자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했고, 클라라와 헤어진 후 로마에 머물며 20세기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반자전적인 시적 소설 『말테의 수기』(1910)를 완성했다. 1911년, 두이노성에서 겨울을 보내며 1차 세계대전의 영향과 우울증으로 완성에 십 년이 걸린 만년의 대작 『두이노의 비가』(1923)를 쓰기 시작했다. 말년에 스위스의 뮈조트성에 머물며 폴 발레리 등과 교유했고, 1926년 백혈병으로 발몽요양소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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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26년(1세)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태어나다. 1933년(8세) 인제공립보통학교 입학하다. 1936년(11세) 서울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다. 1939년(14세)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다. 1941년(16세)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고 한성중학교에 다니다. 1942년(17세)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다. 1944년(19세)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다. 1945년(20세) 광복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해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하다. 1948년(23세) 4월 20일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신시론』 발간하다. 4월 이정숙(李丁淑)과 결혼하다. 12월 장남 세형(世馨) 태어나다. 1949년(24세) 4월 5일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하다.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이봉래, 조향 등과 ‘후반기’ 동인 결성하다. 1950년(25세) 1월 『경향신문』 입사하다. 한국전쟁 겪다. 9월 딸 세화(世華) 태어나다. 1951년(26세) 5월 육군종군작가단에 참여하다. 1952년(27세) 5월 15일 존 스타인벡의 기행문 『소련의 내막』 번역해서 간행하다. 6월 16일 「주간국제」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발표하다. 1953년(28세) 5월 차남 세곤(世崑) 태어나다. 7월 중순 서울로 돌아오다. 1954년(29세) 1월 오종식,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규동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족하다. 1955년(30세) 3월 5일 미국 여행하다. 10월 1일 시작품 「목마와 숙녀」(『시작』) 발표하다. 10월 15일 시집 『선시집』 간행하다. 1956년(31세) 3월 시작품 「세월이 가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20일 오후 9시 자택에서 타계해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1959년(3주기) 10월 10일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 번역해서 간행되다. 2014년(58주기) 7월 25일 이정숙 여사 별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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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지은이)    정보 더보기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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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1898년 태어났다. 본명은 영복(榮福)이다. 영로(榮魯)는 22세부터 쓴 필명으로 1958년 개명했다. 1912년 체육 교사와 생긴 마찰로 학교를 그만두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 같은 해 이흥순 씨와 결혼했다. 1934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양창희 씨와 재혼했다. 부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호 ‘수주’는 고려시대 부천 지명이었다. 원래 큰형의 호였는데 변영로가 요청해서 본인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열세 살부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한시를 짓고 열여섯 살에 영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한 천재 문인이었다. 수주의 영민함은 집안 내력이다. 아버지 변정상씨는 1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큰형 변영만은 법률가이자 한학과 영문학에 정통했고, 작은형 변영태는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술에 취해 보낸 40년, 그러나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았던 일제 치하의 문인 ‘천하의 술주정뱅이’, ‘주장을 꺾지 않는 과격한 고집쟁이’, ‘십 대 때부터 영시를 쓴 천재 문인’. 그리고 ‘단 한 번도 일제에 변절하지 않았던 지식인’. 수주 변영로에 대한 평가의 시작과 끝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평가의 표현이 달라져도 그 바탕은 변함없었다. 금주 선언을 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러나 이내 다시 술잔을 든다.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던 겨레의 운명 때문’이라고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술에 취해 몸은 비틀대도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던 작가는 3.1 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해외로 보냈다. 1924년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내놓았지만 발간 직후 일제에 압수되어 판매 금지당했다. 군색한 형편에도 서울의 일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구두는 중국 상하이나 홍콩에서 인편으로 주문해 신을 만큼 멋쟁이였다. 돈키호테를 닮고 싶어 하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1955년 제27차 비엔나 국제 펜클럽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을 당시 세계 문인들에게 ‘동양의 버나드 쇼’라는 별명을 얻었다. 수주는 53세 되던 1951년 8월 20일, 40여 년 마시던 술을 끊었다고 적고 있다. 향년 63세에 타계해 고향인 부천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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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1년 9월 12일 경기도 시흥군 신북면 노량진리에서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본명은 ‘대섭(大燮)’이다. 어렸을 때 ‘삼준(三俊)’, ‘삼보(三保)’로도 불렸으며, 필명으로 ‘금강샘’, ‘백랑생(白浪生)’, ‘해풍(海風)’ 등을 썼고, 1926년 이후부터 아호로 ‘훈(熏)’을 썼다. 1915년 심훈은 서울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2년 뒤인 1917년 3월에는 왕족의 누이동생 이해영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해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재학 중 조선인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한 일본인 수학 선생에게 항의하며, 그 항의의 표시로 백지 답안을 제출해 수학 과목이 낙제되어 유급을 당한다. 1919년 3월 기미년 만세 사건 때 심훈은 남대문 앞에서 가담하며, 3월 5일 경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7월 형 집행을 마치고 풀려나지만 퇴학을 당한다. 심훈은 당시 졸업을 하지 못했지만 2005년 7월 경기고등학교는 심훈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1920년 심훈은 흑석동 본가와 가회동 큰형 집에 머물면서 문학 독서에 매진하며, 이희승에게 한글 맞춤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듬해 1921년 그는 중국 항저우의 즈장대학(之江大學) 문학원에 입학해 극문학 관련 공부를 하다가 1923년 국내에 들어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등과 신극 연구 단체인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한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며,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 활동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송영, 이적효, 이호, 박세영, 김홍파 등이 주축이 된 사회주의 문화 단체인 ‘염군사’ 멤버로 동참하며, 1925년에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도 가담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무산 계급의 해방 문학보다는 전방위적인 해방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2월 심훈은 동아일보 학예부에서 사회부로 옮긴 후 ‘철필구락부’에 가입하며, ‘철필구락부 사건(급료 인상 투쟁 사건)’으로 해직된다. 그해 11월 그는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 소설 <탈춤>부터 “심훈(沈熏)”이란 새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1927년 2월에는 영화 공부를 하기 위해 도일(渡日)하며 일본의 닛카스(日活) 회사에 입사하지만 얼마 있지 않고 5월 귀국해 경성방송국 프로듀서로 입사한다. 그러나 일본 황태자를 전하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3개월도 안 되어 퇴사를 당한다. 그리고 7월에는 나운규를 감독으로 <탈춤>을 영화화하며, 10월에는 원작·각색·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원제 <어둠에서 어둠까지>)를 완성해 상영하기도 한다. 1928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신문 기자직을 이어 가나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아 생계를 외상으로 허덕인다. 이 해 11월 ≪새벗≫에 소년 영화 소설 <기남(奇男)의 모험(冒險)>을 게재한다. 1929년에는 ≪조선일보≫에 소설 <오월비상(五月飛霜)>을 게재하며, <원단잡음(元旦雜吟)>, <거리의 봄>, <어린이날>, <야구(野球)> 등의 시도 여러 편 게재한다. 1930년 심훈은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하나 10월 29일 조선총독부 검열로 중단된다. 그리고 그 해 11월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수석으로 졸업한 안정옥(安貞玉)과 약혼하며, 12월 24일에는 결혼을 한다. 1931년 8월 16일부터는 ≪조선일보≫에 <불사조>를 연재하나 12월에 또다시 검열로 중단된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 기자직을 그만두고 양친이 계신 충남 당진으로 내려가 살게 되며, 그해 4월 아들 ‘재건’이 태어난다. 이해 9월 경성세광사에서 ≪심훈 시가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출간이 미뤄진다. 1933년 7월 심훈은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영원한 미소≫를 연재하며, 8월에는 기자 생활을 못 잊어 서울로 상경해 조선중앙일보사에 들어가 학예부장을 맡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당진으로 다시 내려간다. 그는 1934년 3월 이혼한 부인 이(李)씨를 모델로 <직녀성>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여기서 생긴 원고료로 ‘필경사(筆耕舍)’를 짓고, 그 집에서 ≪상록수≫를 완성한다. 1935년 2월 심훈의 장편소설 ≪영원한 미소≫가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며, 8월에는 ≪동아일보≫ 창간 15돌 기념 현상공모에 ≪상록수≫가 당선된다. 심훈은 그때 받은 상금 500원 중 일부를 야학당에 후원하며, 이 후원으로 상록학원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해 9월부터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상록수≫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1936년 8월 10일 심훈은 서울로 상경했다가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을 접하고는 신문 호외의 뒷면에 시 <절필-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를 써서 ≪중앙≫ 문예지 편집실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해 9월 16일 ≪상록수≫ 출판 문제를 의논하고 ≪심훈 시가집≫ 교정을 보던 중 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경성대학병원에서 치료하다가 36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17일에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사후 1949년 7월 생전에 출간하지 못한 그의 시가집이 중형(仲兄) 심설송(沈雪松)의 도움으로 한성도서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으로 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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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중퇴하였다.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함으로써 시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서정적인 시와 동시 등을 발표하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로 불렸다. 해방 이후 급격한 변화를 보이면서 현실 참여적인 시들을 창작하였다. 1946년 임화, 김남천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월북하였고 1951년 신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성벽(城壁)』, 『헌사(獻辭)』, 『병(病)든 서울』, 『나 사는 곳』, 『붉은 깃발』, 『에세닌 시집(詩集)』과 「백석론(白石論)」, 「자아(自我)의 형벌(刑罰)」 등의 다수의 평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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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7년 12월 30일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8~1930년(12세~14세)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1931년(15세) 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16세)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는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20세)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 12월호에 「빗자루」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9년(23세)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했다. 1941년(25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3년(27세)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되었다. 1944년(28세)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45년(29세)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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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지은이)    정보 더보기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언제나 우리를 앞질러 나가는 작가.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화가를 지망하였으나 경성 고등 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한다.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세부터 조선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서 건축 기사로 일했다. 1930년 잡지 『조선』에 장편 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1931년 건축 잡지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 등 20여 편을 발표한다. 이후 직접 다방 <제비>를 운영하며 구인회 구성원이었던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류하며 친목을 쌓았고, 1934년 정식으로 구인회 멤버가 된다. 같은 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삽화가로 참여하는 동시에 「오감도」를 연재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거센 반발을 받아 연재가 중단되었는데, 그럼에도 문단에서는 새로운 형식적 실험으로서 높이 평가했다. 1936년 변동림과 결혼 후, 요양을 목적으로 홀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듬해 <불령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 및 구금되었고, 폐결핵을 앓던 그의 병세가 악화된다. 결국 1937년 도쿄 제국 대학 부속 병원에서 2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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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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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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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1년 대구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의 2남으로 출생했는데, 가정은 부유했으나 7세 때 부친이 별세해, 어머니의 인자하고 후덕한 성정과 백부 이일우의 엄격한 훈도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 이일우는 인품과 재력을 갖추었으며, 민족정신을 선도하고 국민 계도에 앞장선 지사로서, 이상화로 하여금 가내에 설치한 사숙에서 한문 수업을 받게 했다. 백부를 통해 이상화는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상화의 형인 이상정이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것 또한 이러한 가계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이상화는 17세에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 등과 함께 대구에서 ≪거화(炬火)≫라는 습작집을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대구에서 백기만과 더불어 독립운동 거사 모의에 참여하나 사전에 누설되어 서울로 피신, 박태원의 하숙에 기거하게 된다. 이해 10월 서한보의 장녀 서온순과 결혼했다. 1922년, 빙허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된 이상화는,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To___>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마음의 꽃>을 게재하게 된다. 이들 시에는 식민지의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 오는 좌절, 권태, 우울, 애수 등이 불덩이 같은 정열로 분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화는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얻기 위해 도일했는데 도쿄 체류 기간인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한 <나의 침실로>는 문단에 대단한 주목을 불러일으킨다. 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낭만적 상상력과 유미주의의 극한” 또는 “낭만적 에로티시즘의 정화” 또는 한국 데카당스 문학의 전형으로 미학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에는 당시 이상화가 대구에 본처를 둔 상태로 유보화와 사랑에 빠진 일 등 20세 초 청년기에 체험한 사랑과 열정, 일제의 질곡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강박 관념, 불안 심리, 성애의 원죄 의식이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조기에는 ‘데카당이즘’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절망을 다룬 시편들을 주로 창작한다.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1924년 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1925년 2월, 무산 계급 문예 운동 단체인 ‘파스큘라’에 참석하고, 1925년 8월 결성된 카프에 가담하면서 창작기의 절정기를 이룬다. 이상화는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시 34편, 평론 7편, 단편 2편, 감상문 4편 등 50여 편의 각종 시문을 남겼다. <가장 비통한 기욕> <이해를 보내는 노래> <빈촌의 밤> <조소> <가상> 등에는 일제의 압제와 착취 아래서 신음하는 조선인들의 빈궁상을 보여 주면서 당대 현실의 모순과 저항의식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화는 <무산 작가(無産作家)와 무산 작품(無産作品)>과 같은 급진적인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카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렇게 이상화의 한계 지워진 계급투쟁 의식은 <가상> <조소>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비를 다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26년 가을, 연인이었던 유보화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1927년, 이상화는 향리인 대구로 낙향해 카프나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서울 생활을 청산한 이상화는 대구에서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며 애정 행각을 벌이고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해 작고하기까지 14년간 침묵기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 6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신간회에서 출판 간사직에 있던 이상화는 여러 차례 가택 수색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다. 낙향기에서 보여 주는 이러한 침체는 그가 처한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상화가 1934년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했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은 것도 실의와 좌절의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3월부터 약 3개월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난 후, 이상화는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해,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사회에 봉사하게 된다. 이에 대륜중학의 건립에 이상화의 숨은 공로가 지대했다고 전한다. 이상화의 이러한 사회적 헌신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린 민족의 광복을 성취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충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그의 아호 ‘백아(白啞)’는 어둡고 불구적인 식민 치하의 고통을 실의와 자조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40년, 이상화는 사회적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하며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프랑스 시 평역 등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43년 4월 25일, 불치의 병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타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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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도쿄 산분샤[三文社]에서 첫 시집 <分水嶺(분수령)>을 펴내고 1938년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1947년 아문각에서 <오랑캐꽃>, 1949년 동지사에서 <이용악집>을 간행했다. 1950년 월북한 후, 1955년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민주청년사에서, 1957년 <리용악 시선집>을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발간했다. 1963년에는 김상훈과 공역으로 <풍요선집>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펴냈다. 1971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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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노작(露雀)·소아(笑啞)·백우(白牛)·새별 등이 있지만 주로 ‘노작’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1900년 5월 17일(음력),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492번지다. 석우리(石隅里)는 속칭 ‘돌모루’라 불리는 곳으로, 남양 홍씨의 집성촌이며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때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된 바 있다. 1920년 박종화, 정백 등과 순문예 동인지 『문우』를 창간하였고 1922년 문화사를 설립하여 신문학운동을 주도하던 동인지 『백조』를 발간했다. 1923년 토월회에 관여하면서 연극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토월회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신극운동에 뛰어들었다. 1927년 박진·이소연 등과 함께 극단 ‘산유화회’를 결성해 창작희곡 「향토심」을 공연했으며, 1930년 최승일·홍해성 등과 극단 ‘신흥극장’을 조직해 연극운동을 이어나갔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로 대표되는 신시는 물론 「저승길」, 「봉화가 켜질 때에」 등 민족의 현실에 밀착한 소설을 창작하였고, 「조선은 메나리 나라」와 같은 비평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창작예술론을 전개하며 민요시 창작에도 힘썼다. 검열로 인해 「벙어리굿」 등 일부 작품은 실전되었으나 「흰 젖」, 「출가」 등 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편희곡을 창작하였고, 그 외에도 다수의 희곡작품을 창작, 번안, 각색, 연출했다. 매체를 확장해 라디오극을 발표하기도 하고 대중가요의 번역가이자 창작자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 희곡 「김옥균전」을 집필하다 원고를 압수당한 후에는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35년을 전후해 서울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에서 흰 고무신과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다니며 한방치료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전한다. 1940년 강경·전주 등지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사찰을 순례하고 불경을 연구하였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담해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7년 1월 5일, 폐환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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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는 1894년 8월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선비이며 학자인 아버지 조병행과 연일 정씨 어머니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경덕(景德), 호적명은 명희(明熙), 애칭은 칠석이었다. 네 살 때 부친인 조병행이 죽고 난 후, 조명희는 둘째 형 조경희 집에 머물며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서당에서 한자를 배우기도 했다. 진천소학교에 다니며 열네 살에 충북 서산에 사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인 민식(閔植)과 혼인을 하게 된다. 1914년 한여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조명희는 북경사관학교로 떠나려다가 평양에서 둘째형 경희에게 잡혀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신소설을 읽었고, <홍루몽>, <삼국지> 등 많은 중국 소설도 접하게 된다. 특히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민우보 역의 ≪희무정(噫無情, 레미제라블)≫에 빠져 지냈으며, 이광수의 ≪무정≫ 등 근대 소설과 ≪태서문예신보≫, ≪창조≫, ≪삼광(三光)≫ 등 근대 잡지를 접하게 되면서 ‘문예’에 눈뜨게 된다. 1919년 3월 초, 3·1 만세 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난 후, 조명희는 5년간의 고향 생활에서 벗어나 일본 도쿄로 가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경제적 사정과 언어 소통, 문화 차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비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괴테를 읽고 타고르와 하이네를 읊었다. 친하게 지내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1920년 봄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근대극 연극 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설한다. 1921년 여름에는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전국 순회 연극단의 공연 작품으로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가 채택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 연극 대본은 한국 근대 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 삶을 그린 조명희 자신의 자전적 작품이다. 친구들과 연극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명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3년 반 만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다음 해에 상경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노적(蘆笛)이라는 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게 된다. 일본에 가기 전 고향집에서 썼던 시들과 도쿄 유학 시절의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근대 문학 사상 개인 창작 근대 시집으로서는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1925년 8월에 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조명희는 ≪개벽≫에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문인 생활을 시작하고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단편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작가가 된다. <낙동강>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이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성운(농업학교 졸업, 군청 농업 조수)이 3·1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히더니, 출옥한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조명희의 경성 생활은 일제 식민 통치 속의 숨 막히는 압박감과 불안감, 헤어날 길 없는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1928년 8월 조명희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이전의 서정시와는 다른 분위기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조생’이란 필명으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이 시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담고 민족 해방과 계급 투쟁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후 조명희는 조선인 육성촌에서 조선어 교사로 있으면서 문예를 지도하며, 동화극 <봄 나라>, 동요 <눈싸움>, <샘물>과 같은 작품들을 쓰게 된다. 1930년 동료 교사인 황명희와 재혼하고, 우수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조선어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당시에 그가 쓴 시, 소설, 정론, 평론 등의 작품들은 소비에트 조선 문학의 방향성을 보여 주었다. 1934년에는 작가 파제예프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했으며, 연해주의 한국신문 ≪선봉≫의 문예면 편집을 자문하게 된다. 이듬해 하바롭스크로 이사한 후 조선사범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선봉≫ 신문에 문예란을 만들고, 자신의 한글 및 문학 교육을 받아 창작된 한글 문학 작품들을 모은 ≪로력자의 조국≫을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 조명희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인근 연해주 또는 빨치산스크 등지에서 많은 제자들을 문학가로 길러 냈다. 1937년 장편소설 ≪만주 빨치산≫ 집필 도중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기관원에 연행되고, 가족은 스탈린의 ‘고려인 시베리아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만주 빨치산≫의 내용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조국(조선)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애국지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일제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바롭스크 현지 주르사 감옥에서 처형당한다. 1956년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정권 때,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1938년 4월 15일의 결정을 파기, 무혐의로 처리하고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1959년 12월 10일에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편찬한 ≪조명희 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1988년 한국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을 해금 조치함으로써, 조명희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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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 바쇼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하이쿠의 완성자이며 하이쿠의 성인이라 불리는 마쓰오 바쇼는 에도 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1644년 일본 남동부 교토 부근의 이가우에노에서 하급 무사 겸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이고, 어렸을 때 이름은 긴사쿠였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자 곤궁한 살림으로 인해 바쇼는 열아홉 살에 지역의 권세 있는 무사 집에 들어가 그 집 아들 요시타다를 시봉하며 지냈다. 두 살 연상인 요시타다는 하이쿠에 취미가 있어서 교토의 하이쿠 지도자 기타무라 기긴에게 사사하는 중이었다. 친동생처럼 요시타다의 총애를 받은 바쇼도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하이쿠의 세계를 접하고 기긴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요시타다가 25세에 갑자기 병사하자 충격을 받은 바쇼는 고향을 떠나 교토로 갔다. 이후 20대 후반까지의 행적은 밝혀진 바가 없다. 교토의 절에 머물며 불교 공부와 참선 수행을 했다는 설도 있다. 31세에 바쇼는 스승 기긴에게서 하이쿠 작법서를 전수받음으로써 독립된 하이쿠 지도자가 될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이해에 교토 생활을 접고 걸어서 지금의 도쿄인 에도로 향했다. 에도의 번화가 니혼바시에 도착한 그는 상점의 서기 일을 하거나 다른 시인의 하이쿠 문집을 필사해 주며 생계를 이었다. 에도 시내의 상수도 공사장에서 4년간 일하기도 했다. 이 사이에 하이쿠 습작생들이 하나둘 그의 밑에 모이기 시작했다. 언어유희에 치우친 기존의 하이쿠에서 탈피해 문학적인 하이쿠를 갈망하던 이들이 바쇼에게서 진정한 하이쿠 시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산푸, 기카쿠, 란세쓰, 보쿠세키, 란란 등 수십 명의 뛰어난 젊은 시인들이 바쇼의 문하생으로 모임으로써 에도의 하이쿠 문단은 일대 전기를 맞이했다. 이 무렵 시가 궁정의 귀족들 사이를 떠나 무사와 상인들 속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바쇼의 문하생들은 다양했다. 왕실의 일원이나 의사들도 있었으며, 전직 무사, 화가, 쌀장수, 감옥에 갇혔다 나온 이들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하이쿠 지도자의 삶을 시작한 바쇼는 에도의 하이쿠 문단에서 나날이 명성이 높아 갔다. 부유한 문하생들의 후원으로 더 이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문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었다. 서른일곱 살에 '옹'이라는 경칭을 들을 정도로 하이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누렸다. 그러나 37세에 바쇼는 돌연 모든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한겨울에 에도 접경을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 건너 후카가와의 작은 오두막으로 은둔해 들어갔다. 그곳은 해수면과 높이가 같은 저지대로 도쿄 만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거친 물결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심한 태풍이 불 때는 대피해야 하고, 식수도 배로 실어다 주는 물에 의지하는 거칠고 척박한 땅이었다. 성공의 궤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변두리로 은둔해 들어간 것은 하이쿠 지도자로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문하생 한 명이 파초 한 포기를 마당에 선물함으로써 오두막은 '파초암(바쇼안)'으로 불리게 되었고, 바람에 잘 꺾이는 파초를 무척 사랑해 바쇼는 자신의 호를 그때까지의 '도세이'에서 '바쇼(파초)'로 바꾸었다. 해학의 재치와 능란한 언어유희를 겨루는 작품들만 인기가 높던 시대에 바쇼가 목표로 한 것은 정적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 인생의 고독과 허무,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시 속에 담는 일이었다. 웃음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탐구하는 시였다. 그래서 에도의 번화가를 떠나 오직 진정한 문학에 대한 갈구만을 가슴에 품고 파초암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른 하이쿠 지도자들의 눈에는 ‘패배’로 보였지만 바쇼의 문하생들은 후카가와로의 이사를 크게 환영하며 힘을 합쳐 스승의 생활을 지원했다. 바쇼가 문하생들로부터 존경받은 것은 단순히 시적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스승으로서의 실천적 자세 때문이었다. 이 무렵 오니쓰라, 라이잔, 신토쿠, 곤스이 등 뛰어난 시인들이 바쇼의 새로운 하이쿠 운동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바쇼를 통해 본격적인 하이쿠 문학이 탄생하고, 단순한 경구나 번뜩이는 재치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에 깃들인 깊은 시상을 17자의 제한된 형식 안에 응축해 표현하는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문학에서 바쇼는 '방랑 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의 근본 사상은 안주의 거부였다. 문하생들의 후원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 한적한 거처를 마련하고 시인으로서의 명성도 얻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것이 불행으로 작용했다. 화재로 전소된 첫 번째 파초암 자리에 두 번째 파초암이 지어졌을 때가 40세, 그 이듬해부터 바쇼는 오두막을 거점으로 '인생은 곧 여행'이라는 사상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방랑은 생을 마칠 때까지 10년 동안 수천 킬로미터나 반복되었으며, 이 기간에 대표 하이쿠 대부분이 탄생했다. 41세의 가을, 바쇼는 은둔 생활을 박차고 방랑에 나섰다. 42세 여름까지 아홉 달이나 걸린 긴 도보 여행이었다. 이 여행의 핵심만을 기록한 짧은 기행문이 『노자라시 기행』이다. ‘노자라시’, 즉 ‘들판에 버려진 해골’이라고 제목이 붙은 까닭은 여행기 서두에 실린 하이쿠에 있다. '들판의 해골 되리라/ 마음먹으니/ 몸에 스미는 바람'. 44세의 늦가을에 바쇼는 또다시 6개월 동안의 『오이노코부미』 여행을 떠났다. 이제 바쇼의 이름은 일본 전역에 알려졌고, 가는 곳마다 문인들과 습작생들이 모여 그를 중심으로 하이쿠 모임을 열었다. 그리고 46세의 봄, 바쇼는 또다시 긴 방랑을 계획했다. 오쿠, 즉 일본 동북부의 깊숙한 지역들을 도는 대장정이었다. 지난번 여행들에서 가 보지 않은 내륙 오지들을 가기로 한 것이다. 바쇼를 바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여행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150일간의 여정을 기록한 『오쿠노호소미치』는 일본 기행문학의 꽃이라 일컬어지며 바쇼의 저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시와 마음의 여정 『오쿠노호소미치』 여행은 바쇼의 문학 인생의 정점이었다. 여러 대표 시가 이 여행 중에 탄생했으며, 자연과 합일된 순간들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건강은 나빠졌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속세의 소유와 이름을 버리고 운명을 바람에 맡긴 채 출가자처럼 떠돈 방랑이었다. 여행을 마친 바쇼는 고향과 교토 부근의 여러 장소에서 여행기를 수정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의 구체적인 기록이 아니라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독특한 장르의 탄생이었다. 여행기에 실린 하이쿠들은 5·7·5 열일곱 자의 하이쿠가 독립된 시로 훌륭하게 자리 잡는 역사적인 출발이 되었다. 교토 부근의 여러 장소를 전전하던 바쇼는 여행을 떠난 2년 후인 48세의 겨울, 에도로 돌아왔다. 이 무렵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문하생들의 세력 다툼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지친 그는 오두막 문을 닫아걸고 한동안 세상과 절연했다. 51세의 여름, 다시 오두막을 떠나 방랑길에 오른 바쇼는 여행 도중 오사카의 길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생전에 좋아하던 비와코 호수 부근의 절 기추지 마당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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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부손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16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에도로 나와 하진이라는 하이카이 선생의 집에 기거하며 그에게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1742년 그의 나이 27세에 스승이 세상르 떠나자, 관동과 동북 지방을 순례하며 그림과 하이카이 수업을 쌓다가 1751년 에도로 나왓다. 1754년부터 요사 지방에 4년 동안 머문 뒤, 귀경하여 성을 요사라 칭했다. 그 후 교토에 거처를 정하고 1768년에는 <헤이안 인물지>에 화가로서 이름을 올렸고, 하이카이 중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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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잇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 에도 시대 활약했던 하이카이시(俳諧師, 일본 고유의 시형식인 하이카이, 즉 유머러스한 내용의 시를 짓던 사람)이다. 15세 때 고향 시나노를 떠나 에도를 향해 유랑 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소바야시 지쿠아로부터 하이쿠(俳句) 등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잇사는 39세에 아버지를 여윈 뒤, 계모와 유산을 놓고 다투는 등 어려서부터 역경을 겪은 탓에 속어와 방언을 섞어 생활감정을 표현한 구절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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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G. 로세티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30년 12월 5일 영국 런던의 샬럿 가 3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아브루초에서 런던으로 정치 망명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로세티였고 모친은 바이런과 셸리의 친구이며 내과 의사이자 작가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여동생 프랜시스 폴리도리였다. 막내딸인 그녀에게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는 빅토리아조 후기 예술가들의 문예 운동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끈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또 다른 오빠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와 언니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세티는 작가였다. 주로 낭만적인 시, 종교적인 시, 동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조숙한 감상력을 나타냈으며, 오빠처럼 시인 기질을 타고 났는데, 열두 살인 184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빠 단테는 일찍이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해 시를 발표하도록 권고했는데, 열여덟 살인 1848년에 그녀는 ≪아테나 신전(Athenaeum)≫에 첫 번째 시를 발표했고, 그 후에는 “엘렌 앨런”(Ellen Alleyne)이라는 필명으로 라파엘 전파가 간행하고 오빠 윌리엄이 편집을 맡은 문학잡지 ≪기원(The Germ)≫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서른한 살 때인 1862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시집인 ≪고블린 시장과 기타 시들(Goblin Market and Other Poems)≫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많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그녀를 당대 주요 여류 시인으로 확고히 서게 해 주었는데, 1861년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죽고 그 이듬해에 나온 이 시집은 곧바로 그녀를 엘리자베스의 계승자로 열렬한 환호를 받도록 했다. 또한 환상적인 시, 동시, 종교시, 설교문, 논설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녀에게 홉킨스, 스윈번, 테니슨 등도 찬사를 보냈으며, 후에 암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테니슨의 뒤를 이을 계관시인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1870년대 초부터 그녀는 고통스럽고 보기 흉한 그레이브스병(안구가 돌출되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걸려 고생했다. 그리고 1893년에는 유방암에 걸려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이듬해에 재발해 결국 1894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생전에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 동물을 실험에 이용함으로써 학대하는 것, 미성년자를 창녀로 이용해 노동 착취하는 것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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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4년 경남 사천군 곤양에서 태어났다. 1929년부터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기슭으로 옮겨 살다 1943년 스물아홉 나이에 지병인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곤양공립보통학교와 해인사 강원을 거쳐 해인사립강습소 교사,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일했다. 열여덟 살 때인 1932년 처음으로 시 「이별한 님」이 《불교》에 발표된 뒤, 스물두 살 때인 1936년 《매일신보》 현상 공모에 소설 「구룡산」이 당선되었고, 1940년과 1941년 《문장》에 시 「야산로」, 소설 「어산금」이 잇달아 추천되어 문재를 떨쳤다. 그는 길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 동안 시와 소설, 동화, 수필 갈래에 걸쳐 모두 329편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시가 299편으로 압도적인데, 여섯 편을 뺀 나머지는 모두 미발표 육필 시집 여섯 권에 남아 전한다. 경남의 지역성을 바탕으로 삼아 열정적으로 민족 현실을 안고 뒹굴었던 청년 허민의 문학은 나라잃은시대 후기, 윤동주의 내성적 비전과는 다른 현실적 비전을 앞세우며 우리 근대 민족문학의 마지막 자리를 힘차게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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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0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고향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서울로 올라와 《장미촌》 《백조》 동인의 일원이 되었다. 시집 《처녀의 화환》 《내 혼이 불탈 때》 《백공작》, 소설집 《무한애의 금상》 《처녀의 화환》 《영원의 몽상》, 수필집 《인생안내》 등이 있다. 잡지 《조광》 《신인문학》을 편집하는 등 편집자로, 그리고 호머의 시를 비롯한 작품의 번역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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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 쓰라유키 (지은이)    정보 더보기
생몰년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개 서기 870년경에 태어나 945년경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일본의 가가(加賀), 미노(美濃), 도사(土佐) 등의 지방 수령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특히 도사를 다녀와서 도사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회를 일기로 적은 ≪도사 일기(土佐日記)≫라는 작품은 일본 일기 문학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젊은 시절부터 와카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며, 개인 와카집인 ≪쓰라유키집(貫之集)≫이 남아 있다. ≪고금와카집≫에는 102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고금와카집≫에 실려 있는 전체 작품수가 1100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작품이 얼마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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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곤강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1년 9월 24일에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 777번지에서 부친 윤병규(尹炳奎)와 모친 김안수(金安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다. 아호 ‘곤강(崑崗)’은 천자문의 “금생려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崗)”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1930년에 일본 센슈(專修)대학에 입학해 ≪시인춘추(詩人春秋)≫로 활동하던 그는 1931년 11월에 종합지인 ≪비판(批判)≫(7호)에 <녯 성터에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이 ≪비판≫을 비롯해서 ≪조선일보≫, ≪우리들≫, ≪중앙≫, ≪조선중앙일보≫ 등에 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1933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신계단(新階段)≫(8호)에 평론 <반종교문학의 기본적 문제>를 발표해 시뿐만 아니라 비평 활동도 같이 한다. 1934년 2월 10일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해 오던 윤곤강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인 ‘카프(KAPF)’에 가입한다. 그러나 몇 개월 뒤 제2차 카프 검거 사건에 연루되어 7월에 전북 경찰부로 송환되었다가 장수(長水)에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12월에 석방된다. 당시 수감 생활의 모습은 그의 시 <향수 1>, <향수 2>, <향수 3>, <창공>, <일기초>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처음으로 소설 <이순신>을 ≪형상≫(1호)에 발표한다. 이후 그는 충남 당진읍 유곡리로 낙향했다가 1936년에 상경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37년에 서울의 사립학교인 화산(華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그의 첫 시집 ≪대지(大地)≫(풍림사)를 발간하게 된다. 이듬해에 제2시집 ≪만가(輓歌)≫(동광당서점)를 펴낸다. 그리고 1939년에는 제3시집 ≪동물 시집≫(한성도서주식회사)을 발간하게 되고, 다음해에 제4시집 ≪빙화(氷華)≫를 출간하는 등 4년에 걸쳐 시집 네 권을 펴내는 왕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1943년에 명륜전문학교(성균관대학교 전신) 도서관에서 근무하던 그는 ‘조선문인보국회(朝鮮文人報國會)’ 시부회(詩部會) 간사로 임명되기도 한다. 1944년 동거하던 김원자와 사별하게 된 그는 충남 당진읍 읍내리 368번지로 낙향한다. 이 시기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면 서기로 근무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상경한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카프에 가담해 식민지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출하던 작품 세계가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모교인 보성고보 교사로 근무하게 되고, 이후 그는 조선문학가동맹을 탈퇴한다. 이 시기 문우들과 함께 해방 기념 시집인 ≪횃불≫을 발간한다. 1947년 그는 성균관대 시간강사로 출강하면서 편주서인 ≪근고조선가요찬주(近古朝鮮歌謠撰註)≫(생활사)를 펴낸다. 1948년에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여 준다. 제5시집 ≪피리≫(정음사)와 제6시집 ≪살어리≫(정음사)를 펴냈으며, 김기림의 ≪시론≫에 이어 두 번째로 시론집 ≪시와 진실≫(정음사)과 찬주서 ≪고산가집(孤山歌集)≫(정음사)을 발간한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7일 서울 종로구 화동 138-113번지에서 작고하게 되고, 충남 당진군 순성면 갈산리에 안장된다. 제주 조각공원과 보성고교, 그리고 충남 서산시 서산문화회관과 그의 묘소 입구 등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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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우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5년 경성부 천연동 16번지 출생 1911년 보성전문학교 입학, 3년 수료 후 보성전문학교 모표 사건으로 퇴학 1914-15년경 도일 1916년 1월 16일 격월간지 <근대사조> 발간 1918년 미키로후(삼목로풍)가 주관한 미래사 동인으로 활동 1919년 2월 홍영우, 유지영, 이병도 등과 함께 동경 유학생 낙우회(樂友會)의 기관지 <삼광(三光)> 창간 1920년 4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입학 1921년 5월 <장미촌> 창간(동인 변영로, 노자영, 박종화, 박영희, 정태신, 이훈, 오상순 등) 1921년 11월 25일 동경에서 원종린, 조용희, 정재달과 함께 문화주의 운동 선전문을 배포하다 검거됨 1922년 7월 <폐허(廢墟)> 창간(창간 동인 김억, 남궁벽, 오상순, 이병도 등과 함께 참 여) 1922년 9월 제적. <삼광> 3월호에 ‘고뇌(苦惱)의 려(旅)’ <창조> 6호에 ‘눈으로 애인아 오너라’, ‘소곡(小曲)’ 등을 발표하며 여러 매체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 1927년 2월 만주 장춘에서 만주이주조선농민보호연구회 부회장으로 취임 1927년 10월 <조선시단> 창간 1945년 대동신문 주필 취임 1945년 12월 건국기금조성회 총무부에 참여 1946년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 가입 1953년 4월 국민대학교 교무처장 취임 1955-58년 동아일보, 현대문학 등 각종 매체에 작품 활동 활발히 함 1959년 4월 지병으로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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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4년 8월 2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면 소촌리 363번지(현 광주광역시 광산군 소촌동 363번지)에서 마을의 대지주였던 부친 박하준(朴夏駿)과 모친 고광(高光)의 삼남으로 태어났으나, 장남과 차남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법률상 장남으로 자랐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한 뒤, 1921년 봄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곳에서 18세의 박용철은 한 살 연상인 김영랑과 처음 만난 이래 평생 교분을 나눴다.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일문학과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1학년 2학기로 편입했으나 몇 달 만에 자퇴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에서 한문학과 조선 문학을 강의하던 위당 정인보에게 시조를 배우고, 일성(一星) 이관용에게 독일어를 배우면서 동시에 일어, 영어, 독일어로 된 해외 시집을 탐독했고 또 영국 낭만주의 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소네트를 탐독하면서 희곡에 심취하기도 했다. 1925년 봄 누이동생 박봉자가 배화여자고동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함께 상경한 이후 영어와 독일어 및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1926년 지속된 유폐 생활로 인한 위병(胃病)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는 등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1926년 창작 희곡 <말 안 하는 시악시>가 연희전문학교 학생극 대본으로 선정되어 처음 공연되었다. 1928년 9월 박봉자의 요청에 따라 쓴 배화 학생극용 창작 희곡 <석양>이 공연 무대에 올랐다. 1929년 4월 박봉자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박용철은 소촌리에 남아 영시와 독일시 번역에 몰두했다. 박용철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들, 즉 <떠나가는 배>, <이대로 가랴마는>,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은 대부분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1929년 10월 22일 김영랑과 함께 시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서 정지용을 처음 만났고, 12월 10일경 변영로와 정인보 등을 만나 순수 서정시파인 ‘시문학’ 동인을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시문학≫에 수록된 외국 시 번역에서 영미 시는 정지용이, 프랑스 시는 이하윤이, 독일 시는 박용철이, 한시는 정인보가 전담하게 되었다. 이후 1930년 가을 무렵 박용철이 옥천동에서 견지동으로 이사하면서 견지동 집은 ‘문예월간사’ 사무실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문예월간≫이 종간된 이후 박용철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평론을 비롯해 해외 번역시와 수필, 창작시를 꾸준히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해외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가 결성되면서 이하윤의 중재로 박용철이 ‘극예술연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4년 1월 ≪문학≫ 창간호를 발간, 편집과 발행 및 재정을 박용철이 맡았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극예술연구회’의 기관지 ≪극예술≫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했다. 1935년 봄 박용철은 정지용, 김영랑과 함께 폐병으로 병석에 누운 임화의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발간에 대해 합의하고 나서 산실된 원고들을 모아 10월 27일 ≪정지용 시집≫을 발간하고 이어 같은 해 11월 5일 ≪영랑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발간했다. 이후 <‘기교주의’설의 허망>, <기술의 문제> 등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무렵 박용철의 공식적인 문단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다시 문학잡지 간행을 계획했다. 이헌구, 구본웅 등과의 논의를 거쳐 잡지명을 ≪청색지(靑色紙)≫로 하고, 이듬해 1월 문단인들에게 발간 취지서를 발송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잡지 간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1937년 초겨울부터 박용철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석에서 <시단: 정축년 회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고 곧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필답으로만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서 시와 편지를 썼다고는 하나, 시 <만폭동>이 그의 마지막 공식 발표작이 되었다. 1938년 5월 12일 오후 5시 후두결핵으로 사직동 자택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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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은 권경완(權景完)이며, 1903년 2월에 경남 진주부 진해군 서면 오서리(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경행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중동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야마가타(山形)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4년에 단편소설 「아즈매의 사(死)」가 『조선문단』현상공모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후 소년소설, 동화 등을 발표하였다. 1929년에 교토제대를 졸업한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하였고, 카프 도쿄지부와 무산자사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와 프로문학 작품을 발표하고 프로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 공동시집 『카프시인집』을, 1933년에 공동소설집 『농민소설집』을 출간하였다. 1931년, 1934년 두 차례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는 동안 폐결핵으로 고생하였다. 1935년에 석방된 후 낙향하여 김해의 하자마(迫間) 농장에서 일하였다. 1939년에 재차 상경하여 문학에 매진하였다. 1943년에 첫 단독시집 『자화상』을, 1944년에 두 번째 시집 『윤리』를 출간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서기장을 비롯해 여러 직책을 맡았으나, 폐결핵의 악화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1946년에 시선집 『동결』을 출간하였다. 1947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좌익세력 검거의 와중에 귀향하여 경남 마산에 머물렀다. 가난과 병마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1954년 7월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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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마 교시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하이진俳人(하이쿠 시인).소설가. 본명 기요시淸. 교시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로부터 받은 호. 시키의 영향으로 언문일치의 사생문을 썼으며, 소세키에게 자극을 받아 사생문체로 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여유파의 대표적 작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메이지 40년대(1907)부터 소설에 주력하여 하이쿠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적이 있다. 1911년 4, 5월에 조선을 유람하고 7월에 <조선>을 신문에 연재한 후 1912년 2월에 단행본으로 간행했다. 1937년 예술원 회원. 1940년 일본하이쿠작가협회 회장. 1954년 문화훈장 수장. 1959년 4월 8일 85세를 일기로 사망. 대표적인 소설로 '풍류참법風流懺法'(1907), '배해사俳諧師'(1908), <조선>(1912), '감 두 개柿二つ'(19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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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시인. 1898년 개성출생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와서 이화학당유치사범과 협성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작(詩作)은 1927년경부터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잡지 《청년(靑年)》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등단했다. 그녀의 시는 서정시, 시조, 동시로 구성되며 조국과 자연, 동심을 어우르는 시를 썼다. 신앙을 바탕으로 섬세한 내면세계를 담백하고 담담하게 표현하는 시를 씀으로써 선구자적 소임을 다한 여성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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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노 지요니 (지은이)    정보 더보기
加賀千代尼. 1703~1775. 여성 시인. 원래 이름은 ‘지요조(千代女)’이나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지요니’라고 불린다. 나팔꽃 하이쿠로 친숙하다. 바쇼의 제자 시코가 어린 지요니의 재능을 발견하고 문단에 소개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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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구 료칸 (지은이)    정보 더보기
1758~1831. 에도시대의 승려이자 시인.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시승이다. 시승이란 문학에 밝아, 특히 시 창작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불교 승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 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살아가는 방도로 탁발, 곧 걸식유행(乞食遊行)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일본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 역시 대개 탁발을 하는 형상이다. 료칸은 떠돌이 생활 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하며 청빈을 실천했고, 그의 철학관은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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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니시 곤스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650~1722. 에도 시대 시대 중기의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와 교유하였고, 교토에서 활약했다. 당시 그는 시대의 새로운 바람을 추구하는 급진적 하이쿠 시인이었다. ‘초겨울 찬바람 끝은 있었다, 바다소리’의 유행으로 ‘고가라시 곤스이(木枯しの言水)’로 불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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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르손 (그림)    정보 더보기
Carl Larsson. 1853~1919. 스웨덴의 사실주의 화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살 때 학교 선생님의 설득으로 스톡홀름 미술 아카데미(Stockholm Academy of Fine Arts)에 들어갔으며 1869년에는 엔티크 스쿨(antique school)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파리로 건너가 프랑스풍의 부드러운 빛깔로 두텁게 칠한 수채화 작품을 많이 그렸다. 스웨덴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라르손은 1882년 파리 외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거주지 그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스웨덴 미술가 단체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장차 그의 아내가 될 미술가 카린 베르게를 만났다. 둘은 결혼해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1888년 라르손은 장인이 순트보른의 리틀 휘트네스에 마련해준 집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사했다. 1888년 순트보른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집을 예술가적인 취향으로 꾸며 그곳에서 가족들과 평화롭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였다. 작품도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 아름답고 장식성이 강한 그림들을 그려 화제를 모았다. 그는 가정생활의 소박하고 평화로운 모습을 그린 그림들로 유명하며, 종종 자신의 가족을 그리기도 했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고 출판계를 놀래게 했던 작품은 바로 책의 삽화로, 《해 뜨는 집》(1895)의 삽화가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라르손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공공건물에 그린 커다란 크기의 벽화들을 꼽았다. 그중에서도 〈한겨울의 희생〉(스웨덴어: Midvinterblot)은 자신 생애 최고의 작품이라고 했다.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주제로 그린 이 그림은 스톡홀름의 국립미술관을 장식하고 있다. 작품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개성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가구 브랜드인 이케아(IKEA)의 정신적 모토가 되었고, 현재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5억 원을 호가하는 가치를 지니며, 시대를 뛰어넘어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수많은 삽화들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10월(October)>(1882), 〈커다란 자작나무 아래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4~1899) 〈한겨울의 희생(Midwinter sacrifice)〉(1914~15) 등이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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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그림)    정보 더보기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 툴룬에서 태어나 1918년 10월 31일 2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어릴 때부터 회화에 두각을 드러내어 16세 때 빈 미술학교에 조기 입학허가를 받아 미술을 배우지만 보수적인 학풍과 교수들과의 갈등으로 3년 만에 중퇴한다.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극적인 양식의 그림을 그렸고,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나 죽기 전까지 새로운 형태의 표현법을 마련하며 표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모든 것들’ 혹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투쟁’이었다. 실레는 회화가 사람이 가진, 생이 가진 진실만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4년 발발된 1차 세계대전 중 에디트 실레와 결혼한다. 그녀의 도움으로 첫 전시를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그녀가 독감으로 인해 임신한 채 세상을 떠나고 곧 그도 사망한다. 대표작에는 ‘자화상Self-Portrait’(1910),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1915), ‘가족 The Family’(191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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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그림)    정보 더보기
Oscar-Claude Monet. 1840~1926.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 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外光) 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1862년부터는 전통주의 화가 샤를 글레르 밑에서 쿠르베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지만 2년 후 화실이 문을 닫게 되자, 친구 프리데리크 바지유와 함께 인상주의의 고향이라 불리는 노르망디 옹플뢰르에 머물며 자연을 주제로 한 인상주의 화풍을 갖춰나갔다. 1874년 파리로 돌아온 모네는 바지유와 함께 작업실을 마련하여,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출품된 작품 중 《인상·일출(soleil levant Impression)》이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인상파’라는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 위치를 굳혔다. 한편 1878년에는 센 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外光)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 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그려내려는 그의 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 낮, 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소풍》 《강》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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