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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88968492419
· 쪽수 : 300쪽
책 소개
목차
제1장 인지언어학적 탐구의 가능성 / 김동환 / 15
제2장 체화 개념의 지도 그리기 / 이영의 / 51
제3장 도(道)를 아십니까? / 이향준 / 97
제4장 법과 인지 / 강태경 / 129
제5장 체화된 인지와 몸의 분류 / 강신익 / 165
제6장 몸의 습관화와 도덕교육 / 박병기 / 201
제7장 음악적 제스처의 체험적 토대에 관한 인지학적 해명 / 정혜윤 / 229
제8장 왜 고양이와 개는 우리와 영화를 보지 않을까? / 이상욱 / 257
저자소개
책속에서
몸ㆍ인지ㆍ사유
지난 세기 후반에 급속히 성장한 경험적 지식은 우리의 지적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마음’의 본성에 대한 학제적 탐구인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은 우리 자신에 관해 미지의 영역이었던 인지의 본성과 구조에 대한 새로운 탐구의 막을 열었으며, 그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타자와 세계에 관한 이해의 틀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에게 전승되어 온 지식의 많은 부분이 인지적으로 그릇된 가정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졌으며, 그것은 우리 지식의 많은 부분이 근원적으로 수정되거나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우리 시대가 맞게 된 이러한 지적 동요를 ‘인지적 전환’(Cognitive Turn)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의 인지적 전환의 흐름에 부응하는 논의는 여전히 제한되고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지성사를 통해 항상 그렇듯이 새로운 논의가 담고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미래에 속하는 부분이며, 그것은 상당 기간 동안 ‘낯선 것’의 자리에 있다. 더욱이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서 비롯된 지적 동요에 대해 인문학자들은 대부분 그것을 하나의 전환으로 받아들이는 데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이기 쉽다.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인문학이 과학적 지식에 의해 잠식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불만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인지와 관련된 경험적 지식은 다양한 분야에서 흡수되고 확장되어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몸과 인지에 관한 경험적 탐구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은 점차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인지적 접근은 일시적인 선호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지 조건에 대한 반성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필자는 그 지속적 확장이 인문학을 점차 곤경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학적 탐구에 새로운 동력과 계기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전남대학교 철학과 BK21플러스 횡단형철학전문인력양성사업단은 그 동안 국내에서 몸과 인지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논의하는 각 분야의 선도적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동향과 전망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철학적 횡단세미나 2015: 몸과 인지」라는 이름으로 기획했다. 서양철학, 동양철학, 인지언어학, 법학, 의철학, 도덕교육, 음악, 영화이론 분야의 선도적 연구자들이 참여했다.
김동환 교수는 「인지언어학적 탐구의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인지언어학의 최근 성과에 속하는 포코니에(G. Fauconnier)와 터너(M. Turner)의 개념적 혼성(Conceptual Blending) 이론의 개요를 소개했다.
이영의 교수는 「체화 개념의 지도 그리기」라는 제목으로 최근 인지적 탐구의 갈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전망을 소개했다. 신체화된 인지를 중심으로 ‘체화주의’라고 명명된 이론적 흐름을 네 가지 갈래-즉, 체화된 인지 이론, 확장된 인지 이론, 구현된 인지 이론, 행화적 인지 이론-로 구분했다.
이향준 교수는 「도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개념적 은유라는 관점에서 동양철학의 핵심 개념인 도(道) 개념의 의미론적 확장 양상을 조망했다. 되도록 익숙한 사례들과 함께 「경로도식」 「인생은 여행」 「X는 인간」이라는 은유적 기초 위에서 형성된 도의 개념체계가 어떻게 ‘되돌아오는 여행’ 이미지, ‘도의 의인화’, ‘길 없는 길 가기’라는 특징적 양상들을 포함하는지를 설명했다.
강태경 교수는 「법과 인지」라는 발표를 통해 제2세대 인지과학에 기초한 인지이론을 법학 연구에 도입함으로써, 인간 사유의 은유적 특징이 법학의 이해에 끼칠 수 있는 이론적ㆍ실천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강신익 교수는 「체화된 인지와 몸의 분류」라는 발표를 통해 몸에 관한 다양한 이해를 소개하고 오늘날 성장하는 경험적 지식이 우리의 몸 이해를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지를 조망했다. 몸의 은유적 개념체계의 계보를 고찰한 후, 「몸은 기계/전장/시장」이라는 낡은 은유를 대신해서 「몸은 정원/창/이야기꾼」이라는 참신한 은유로의 이행을 제안하기도 했다.
박병기 교수는 「몸의 습관화와 도덕교육」이라는 발표를 통해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을 전제로 최근의 자연주의적 윤리학의 요점을 ‘몸의 습관화를 중심으로 하는 마음의 확장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고 그것의 윤리학적 의미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정혜윤 교수는 「음악적 제스처의 체험적 토대에 관한 인지학적 해명」이라는 글을 통해 음악에서 드러나는 제스처라는 독특한 현상이 인지언어학의 ‘영상도식’을 통해 해명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비언어적 텍스트에 대한 영상도식적 접근이라는 방법론적 특징이 명료하게 드러난 것이다. 「경로」 도식과 「수직」 도식, 「주기」 도식을 포함한 영상도식들이 쇼팽과 슈베르트의 작품 분석에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음악적 제스처가 우리의 신체적 경험을 통해 창발한 영상도식이 음악에 적용된 결과”라는 일반화된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상욱 교수는 「왜 고양이와 개는 우리와 함께 영화를 보지 않을까?」를 통해 기본적으로 신체화된 인지이론이 영화 언어를 해석하는 방법론적 통로임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는 ‘신체적 정서’와 ‘인지적 정서’의 차이, 서사의 중요성 등이 영화를 인간 지향적인 매체로 만들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향으로의 기술적 형식적 발전이 고양이와 개가 감상하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최적화된 영화적 발전을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개와 고양이를 위한 영화를 원한다면 “인지적 정서보다 신체적 정서를 유발하는, 이야기보다는 더 원초적인 정보처리에 집중하도록 새로운 영상문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영화서사가 개념혼성과 모방의 이중 기제를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 영화의 보편적 향유 가능성을 담보하는 인지적 기제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책은 「철학적 횡단세미나 2015: 몸과 인지」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선도적인 연구 성과를 점검하고 조망하려는 협력적 노력의 산물이다. 여기에 실린 8편의 글은 인지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지식이 다양한 학문 분야에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불러오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그것들은 한데 묶여 앞으로서의 탐구가 가야 할 방향성을 제안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이 책은 이러한 시도가 학제적 탐구의 전망과 방향을 이끌어 가는 의미 있는 출발점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작고 낯선 출발점을 마련하는 데 많은 분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지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횡단세미나에 흔쾌히 참여해 발표하고 토론해 주신 여덟 분의 학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세미나의 준비를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 준 이향준 교수와 김경훈 간사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세미나 개최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준 전남대학교와 세미나를 공동으로 주최해 준 전남대학교 철학연구교육센터에도 감사드린다.
2015년 7월
전남대학교 철학과 BK21플러스 횡단형철학전문인력양성사업단장
노양진
제1장 인지언어학적 탐구의 가능성
-개념적 혼성 이론을 중심으로-
김동환
1. 서론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는 학문간 통합(integration), 융합(fusion), 통섭(consilience)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화두이다. 이런 학문간 융합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인지과학이다. 이는 인지과학이 철학, 심리학, 인공지능, 신경과학, 언어학, 인류학, 문학 등을 아우르는 일종의 융합 학문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인지과학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듯이, 인문학도 인지과학에 기여할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인지과학의 연구결과들이 주목을 끌자 전통적인 학문적 경계가 느슨해졌으며, 이에 따라 관련 분야의 인지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인문학의 핵심 연구 주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분야에 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없다면 어두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이때 인문학은 인지과학의 연구에 결정적인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 논문에서는 인지과학의 각 세대와 언어학의 하위분야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성을 맺는지 파악하면서, 이 논문에서 말하는 인지언어학, 특히 개념적 혼성 이론이 인지과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 줄 것이다. 더 나아가 개념적 혼성 이론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를 보여 줌으로써 이 이론의 학제성을 암시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인지과학을 크게 세 가지 세대로 구분하고, 현재까지의 인지언어학이 2세대 인지과학에 머물러 있고, 3세대 인지과학에 맞도록 인지언어학이 발전해야 한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2. 인지과학의 세대
이 장에서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세 가지 세대를 구분하고 각 세대를 특징지으면서, 인지과학 내에서 인지언어학의 위치를 파악할 것이다.
2.1. 1세대 인지과학
현재까지 인지과학은 크게 1세대와 2세대로 나뉘어 논의되었다. Sinha(2007: 1266)는 The Oxford Handbook of Cognitive Linguistics에 수록된 자신의 논문에서 1세대 인지과학(First Generation Cognitive Science)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전적 인지과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술적ㆍ지적 발달의 결과로 발생했다. 컴퓨터 과학의 발달, 동물 행동이 아닌 인간 행동에 대한 심리학자들의 새로운 초점, 초기 생성언어학의 형식적 엄격함이 결합하여 많은 과학자들에게 마음의 ‘블랙박스’의 내부 작용을 무시하라는 행동주의자의 권고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득시켰다.” 이러한 1세대 인지과학은 선천적인 영역 특정적 지식을 받아들이면서 다목적 학습 기제는 거부한다는 이론적 주장을 공유하고, 방법론적으로는 형식화와 알고리즘 표상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1세대 인지과학은 철학에서 객관주의(objectivism)로 표명된다. Lakoff & Johnson(1980/2003: 186-88)은 객관주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1) 세계는 사물로 구성되어 있고, 사물에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과 독립적인 자질이 있다.
(2) 우리는 세계의 사물을 경험하고, 사물이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사물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앎으로써 세상의 지식을 얻는다.
(3) 우리는 세계의 사물을 범주와 개념을 바탕으로 이해한다.
(4) 객관적인 실재가 있고, 세계에 대한 객관적ㆍ절대적ㆍ무조건 참 또는 거짓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5) 단어에는 고정된 의미가 있다.
(6) 사람들은 객관적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명확하고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7) 은유를 비롯한 다양한 시적ㆍ공상적ㆍ수사적ㆍ비유적 언어는 객관적으로 말할 때는 항상 피해야 한다. 그런 의미는 명확하지 않고 정확하지 않으며 실재와 명확하게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8) 객관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고 객관적인 지식만이 진정한 지식이다.
(9) 주관성은 실재와 접촉이 끊어지기 때문에 위험하다.
1세대 인지과학과 객관주의 철학에 뿌리는 둔 언어학은 촘스키(Chomsky)의 생성문법(generative grammar)이 대표적이다. Lakoff & Johnson(1980/2003: 198-209)에서는 객관주의 철학이 의미론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의미는 객관적이다.
(2) 의미는 신체화되지 않는다.
(3) 의미론은 언어 표현이 인간의 이해가 개입하지 않고서도 세계와 직접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연구이다.
(4) 의미론은 진리론에 기초를 둔다.
(5) 의미는 사용과 독립적이다.
(6) 의미는 합성적이다.
(7) 객관주의 철학은 인간의 이해 없이 존재론적 상대성을 허용한다.
(8) 언어 표현은 사물이다. 사물로서의 언어는 언어 사용자와 독립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다.
(9) 문법은 의미 및 이해와 독립적이다.
(10) 의미와 언어 표현은 존재하는 사물과 독립적이다.
(11) 주어진 문맥에서 어떤 문장은 그것의 객관적 의미와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세대 인지과학, 객관주의 철학, 생성문법은 의미를 인간에서가 아니라 진리조건에서 찾는다는 점을 공유한다. 언어학에서는 언어가 연구 대상이고, 언어는 사람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런 인간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언어 연구에 인간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합리한 연구 방법이다.
2.2. 2세대 인지과학
Nerlich & Clarke(2007: 591)는 The Oxford Handbook of Cognitive Linguistics에 수록된 자신의 논문에서 2세대 인지과학(Second Generation Cognitive Science)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세대 인지과학이라고 불렀던 인지과학의 새로운 유형이 미치는 영향 때문에, 마음을 형식적 상징에 대한 비신체화된 조작으로 간주하고, 언어를 형식적 상징의 통사적 배열로 간주하는 것에서부터 마음, 의미, 언어를 신체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전이가 일어났다.”
이런 2세대 인지과학은 철학에서 객관주의 철학과 의미는 사적이고 의미에는 자연적 구조가 없다고 보는 주관주의(subjectivism) 철학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 철학으로 표명된다. 체험주의 철학의 핵심은 인간의 몸(body)이다. 그러면 체험주의 철학은 어떤 식으로 객관주의 철학과 주관주의 철학을 통합하는지를 살펴보자. 객관주의 철학은 의미의 주관적 양상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즉, 객관주의 철학에서 의미란 상징과 세계 사이의 단순한 관계의 문제이다. 반면에 체험주의 철학에서 의미란 항상 특정 사람에게만 의미이며, 의미는 신체적 체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체험주의 철학에 따르면, 의미는 신체화되어 있다. 신체화된 의미, 즉 주체의 물리적 체험과 밀접하게 관련된 의미는 객관주의 철학에서 제시하는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객관주의 철학과 주관주의 철학의 통합이기 위해서 체험주의 철학은 주관주의 철학의 절대적 상대주의를 피해야 한다. 즉, 체험주의 철학은 의미에 대한 탄탄하고 비사적인 토대를 가져야 한다. 이런 토대는 사적이지 않지만, 특정 문화권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체험에서 발견될 수 있다.
2세대 인지과학과 체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학은 인지언어학(cognitive linguistics)이다. 인지언어학은 미국에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론 래내커(Ron Langacker), 렌 탈미(Len Talmy)의 연구에서 시작되었고, 최우선 과제는 언어의 체험적 기초를 분석하는 것이다. 즉, 인지언어학은 체험에 기반을 둔 언어 이론이다. 몸과 체험에 기반을 둔 인지언어학 연구를 가장 잘 대변하는 Johnson(1987: xix)은 The Body in the Mind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우리는 ‘이성적 동물’이지만, 우리는 또한 ‘이성적 동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의 합리성이 신체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인간은 공통적으로 몸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는 문구로 정의한다고 할 때, 인지언어학에서는 ‘이성’이 아닌 ‘동물’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이성’은 수학과 논리를 암시하는 반면, ‘동물’은 인간의 본능을 강조한다. 언어를 연구할 때 객관주의 철학이나 형식주의 철학에서 수학과 논리를 이용하는 것과는 달리, 인지언어학에서는 인간의 본능, 인간의 몸, 인간의 지각과 인지 능력을 활용한다. 따라서 인지언어학에서는 언어 연구 이전에 인간의 몸의 양상을 잘 들여다보고, 그것을 잘 파악한다면 언어 분석의 기초가 마련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2.3. 3세대 인지과학
Brandt(2013: 2)는 The Communicative Mind: A Linguistic Exploration of Conceptual Integration and Meaning Construction에서 3세대 인지과학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1세대와 2세대 인지과학이 의미를 각각 진리조건과 몸을 비롯한 무의식적 개념적 체계에서 찾아낸다면, 3세대 인지과학은 의미를 의사소통하는 마음과 몸(communicating minds and bodies)에서 찾아낼 것이다. 따라서 ‘의사소통적’ 마음이라는 개념은 발화 상황의 고양된 인식을 언어에서 의미심장하고 사실상 구성적인 요인으로 나타낸다.”
3세대 인지과학은 인간의 인지를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본다. 인간 마음의 어떤 특성에 의해, 별도의 물리적 뇌를 가진 서로 다른 인간 마음들이 서로 의사소통하고, 이런 능력을 통해 우리의 마음들을 정렬시켜 개인들이 서로의 사고의 내용을 알고 심지어 인과적으로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언어는 모든 구조적인 층위에서 면대면 상호작용의 근본적인 전제에 의해 형성된다. 언어와 인지는 본질적으로 공존재 또는 공거주뿐만 아니라, 화자 또는 언술자(enunciator)가 상호 의식과 주의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기본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상호교환을 다루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말걸기(address)의 이런 기본적인 상황은 언어학에서 언술행위(enunciation)로 알려져 있다. 이런 3세대 인지과학에서는 나의 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지가 중요하다. 나의 인지는 자체적으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인지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
인지과학의 각 세대와 인간의 관련성에 비추어 각 세대의 특징을 정리해 볼 수 있다. 1세대 인지과학은 기호와 실재의 대응 또는 진리조건에 비추어 의미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그 접근법에서 인간을 배제한다. 2세대 인지과학은 나 자신의 몸과 인지, 상상력 등에 비추어 의미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으로서의 한 개인에 집중한다. 마지막으로 3세대 인지과학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인 타인의 인지에 집중한다. 3세대 인지과학을 표명하는 인지언어학은 아직 알려진 바 없지만, Brandt(2013)는 기호학과 개념적 혼성 이론을 융합하여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3. 인지언어학의 신념
인지언어학은 세밀한 하나의 이론이라기보다는 핵심적인 신념과 지침 원리를 가진 하나의 접근법으로서, 이런 신념과 원리를 통해 서로 보충하고 중복되며 때로는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했다. Lakoff(1990)에서는 인지언어학을 두 가지 기본적인 신념으로 특징짓는다. 인간 언어의 모든 양상을 통제하는 일반 원리를 특징짓고자 하는 일반화 신념(generalization commitment)과 다른 분야들에서 밝혀진 마음과 뇌에 대한 지식과 일치하는 언어의 일반 원리를 특징짓고자 하는 인지적 신념(cognitive commitment)이 그것이다. 이 절에서 이 두 가지 신념과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논의할 것이다.
3.1. 일반화 신념
인지언어학자들이 상정하는 한 가지 가정은 언어의 다양한 양상들 전반에 적용되는 공통된 구조화 원리가 있으며, 언어학의 임무가 이런 공통된 원리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현대 언어학에서 언어 연구는 흔히 음운론(소리), 의미론(단어 의미와 문장 의미), 화용론(담화 문맥에서의 의미), 형태론(단어 구조), 통사론(문장 구조)처럼 다양한 분야들로 분류된다. 촘스키의 생성문법과 같은 형식주의 접근법 내에서는 흔히 음운론, 의미론, 통사론의 분야들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모듈에 따라 작용하고 서로 다른 종류의 구조화 원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음의 모듈 견해에서는 언어 연구를 개별적인 하위분야로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인지언어학에서도 통사론, 의미론, 음운론 같은 분야들을 개념상 별도의 것으로 다루는 것이 때로는 실용적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인지언어학에서는 일반화 신념에 근거하여 언어의 모듈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다는 생각에 반대하고, 실제로는 별도의 모듈이 존재한다는 생각에도 반대한다. 따라서 일반화 신념은 언어적 지식의 다양한 양상들이 마음의 모듈들에서 생산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양상들이 어떻게 공통된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부터 발생하는지를 탐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말한다.
일반화 신념은 언어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선, 인지언어학 연구는 언어의 양상들 중에서 공통된 것에 초점을 두고, 성공적인 방법과 설명을 이런 양상들 전체에 다시 이용하고자 한다. 예컨대, 한 단어의 의미들은 그 단어가 가리키는 좋은 구성원과 나쁜 구성원이 있다는 원형 효과(prototype effect)를 보여 주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에서는 동일한 원리를 형태론(Taylor 2003), 통사론(Goldberg 1995), 음운론(Jaeger & Ohala 1984)에도 적용했다.
3.2. 인지적 신념
인지적 신념은 언어 구조의 원리가 다른 인지과학 분야에서 밝혀진 인간 인지에 대한 지식을 반영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즉, 인지적 신념은 심리학, 인공지능, 인지신경과학, 철학 등의 다른 인지과학과 뇌과학에서 밝혀진 인간의 인지에 대해 알려진 것에 따라 언어의 일반 원리를 특징짓고자 하는 신념이다. 바로 이런 인지적 신념 때문에 Slingerland(2008)에서 말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합, 즉 통섭이 정당화된다.
언어가 주의(attention)라는 인지 능력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살펴보자. ‘주의’란 인지적 신념을 가장 잘 표명하는 현상으로서, 장면의 한 양상으로부터 또 다른 양상으로 주의를 돌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언어적으로 부호화되고 있는 장면의 특정 양상에 주의를 돌리는 방법을 제공한다. 언어에서 표명되는 이런 능력은 윤곽부여(profiling)라고 부른다.
여러 개의 문법 구문이 임의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언어가 윤곽부여를 보여 주는 방법에 따른 결과이다. 즉, 문법 구문들마다 장면에서 서로 다른 양상에 윤곽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한 소년이 꽃병을 걷어차서 깨뜨리는 장면에서 서로 다른 양상들이 언어적으로 윤곽부여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