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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나의 철학 그리고 내가 사랑한 철학자)

강선형, 김분선, 김애령, 김은주, 노성숙, 양창아, 이선현, 이솔 (지은이)
봄날의박씨
1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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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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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나의 철학 그리고 내가 사랑한 철학자)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91192128658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6-01-30

책 소개

여덟 명의 ‘여성철학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과 자신이 사랑하는(그리하여 전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철학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받고 있는 신진, 중진 여성철학자들은 이 책에 각각 두 편씩 글을 실었다.
아렌트·리쾨르·아도르노·사르트르에서 들뢰즈·푸코·주디스 버틀러·로지 브라이도티까지,
국내 여성철학자 8인이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나의 철학’과
그들이 사랑해 온 사상가를 함께 만나는 특별한 철학-에세이!

“개인적 경험 없이 가능한 사유 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는다.”_한나 아렌트

여덟 명의 ‘여성철학자’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과 자신이 사랑하는(그리하여 전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철학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받고 있는 신진, 중진 여성철학자들은 이 책에 각각 두 편씩 글을 실었다. 한편은 그가 철학(혹은 전공한 철학자)과 만난 이야기 또는 철학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고, 또 다른 한편은 그가 파고든 철학자의 사상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소개하는 입문격의 글이다. 사유가 사라져 가는 만큼 사유가 절실해져 가는 지금 여기에서, ‘철학’이 우리 삶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철학함’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여덟 명의 여성철학자들이 각자의 구체적 경험이 녹아든 이야기와 함께 펼쳐 낸다. 철학을 삶의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이 책은, 철학을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는 가장 믿을 만한 문턱이 되고, 이미 철학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다시 사유하게 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여성철학자의 철학 이야기』 지은이 인터뷰

1. 선생님께 ‘철학’(-함)은 어떤 의미인가요?

【강선형】 들뢰즈의 유명한 개념 가운데 ‘거짓의 역량’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들뢰즈가 니체로부터 가져온 ‘거짓의 역량’ 개념은 진실을 일깨우는 허구의 힘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통해서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 자체를 와해시키는 힘을 가리킵니다.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가 와해된다는 것은 철학이 더 이상 고정되어 있는 진리를 발견하거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철학에 관심이나 가질까요? 철학의 쓸모는 단지 개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찾기에 있다는 믿음이 철학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들뢰즈를 공부하며 이런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고 절망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정답이 없는 철학에서만 끝나지 않는 질문들을 배우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정답이나 결과를 바랍니다. 끝나지 않는 과정 속에 있다는 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논의가 끝난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을 기피하기도 하고, 미디어에 나와서 가장 빠르고 명쾌한 답을 내려주는 사람들을 추앙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철학도 ‘쇼츠’로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늘 과정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무엇이’ 되었다고 하면, ‘무엇이’보다는 ‘이런저런’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은 정답을 동어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설명과정에 대한 끊임없는 발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철학과 함께 질문을 배우고, 질문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위대함은 철학이 없었다면 아주 큰 자리를 차지했을 아둔함을 줄여준다는 데에서 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아둔함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즐거움은 인생의 즐거움을 닮은 것 같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무의미한 반복처럼 느껴지더라도 그 과정은 늘 새로운 배움의 과정인 것처럼, 무엇에 답하고자 했는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우리는 철학의 과정을 통해 그 즐거움을 배웁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에 끊임없는 발명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궁극적인 목적지를 가지지 않는 모험이라고 썼습니다.

【김분선】 저에게 철학함은 사유함입니다. 혼자 사유하기보다 함께 사유하기로 확장하여 나아가면 더 좋을 듯하여 연구와 교육을 하며 철학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 파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철학적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 따라가기 벅차서 버거운 시간을 보냈기에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철학을 지식으로 쌓는 것은 말 그대로 질문하면 답이 나올 수 있도록 기계적으로 학습하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철학 공부는 기계적으로 하여 같은 답이 도출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정확하게 그 내용을 인지하고 있는지도 분별되지 않습니다. 또 철학자가 전달하는 바르게 의미를 이해했는지 아는 거부터가 어렵고 나를 시험대에 세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기계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것뿐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가져오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고행의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조각난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면서 맞춰지게 됩니다. 그 시간을 건너야 철학자의 사유 근처에서 맴돌 수 있고 책 속 철학자들의 사유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세계를 파악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철학적 사유의 근원에는 모두 인간인 철학자의 사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사유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하고, 자기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게 하고, 낯선 세상에 발을 맞출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저에게 철학은 오랜 친구와 함께 사유를 나누는 과정과 같습니다.

【김애령】 나에게 철학은 ‘깊은 사유의 길’ 같은 것입니다. 그 여정을 이끄는 것은 늘 물음들입니다. 매번의 물음에 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답은 또 새로운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대부분 (거의 언제나) 답은 조심스럽게 시도되지만, 부족합니다. 그것은 곧 다른 물음으로 열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물음들이 사유의 길을 계속 따라가게 합니다. 더러 ‘철학공부를 선택하게 된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철학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다는 막연한 열망의 출발점은 ‘재미’였습니다. 구체적인 사건, 에피소드, 고민, 갈등, 불만, 분노 같은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에 대해서 어느 만큼은 거리를 두고 ‘거미줄을 짜듯’ 생각을 굴려가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사유의 힘’에서 느끼는 자유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공부를 하면서 철학적 사유를 계속 밀고 나가게 하는 동력은,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사유가 주는 자유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만나는 복수의 구체적인 ‘텍스트들과 신체들’, 혹은 ‘텍스트의 신체들’, ‘신체라는 텍스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철학(함)은, 이 세계의 구체적인 문제상황들로부터 출발하는, 그치지 않는 물음으로 이끌리는, 아마도 끝이 없을, 깊고 복잡하게 얽힌 사유의 길 같은 것입니다.

【김은주】 삶과 사유를 근접하게 함의 기쁨이나 항구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바다 한가운데로 다시 뒤던지는 풍랑 그러나 위로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나 효과로서 위로를 선사하는 효능감이 저에게 ‘철학’(-함)의 의미입니다.

【노성숙】 제게 철학은 단지 학문이기보다는 ‘철학함’의 활동으로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이웃들과 더불어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사유하기’와 ‘대화’를 통해서 ‘철학함’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함’에서의 사유하기는 단순히 떠오르는 상상들의 유희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래로 뿌리는 내리며 뻗어 가기도 하고, 위로 뻗어 나가며 그 방향성을 탐색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철학적 질문을 통한 사유는 ‘철학’ 책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 떨어져 나오는 ‘놀라움’, ‘상실’, ‘회의’ 등의 계기를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사유한다’는 것이 곧 ‘영혼이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철학함’에서 중요한 ‘사유하기’는 대화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이웃, 세계에 대해 사유하는 활동을 홀로 전개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스스로 내적으로 대화하듯이 전개되며, 이러한 전개를 좀 더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타인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철학상담’의 분야에서 집단 프로그램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는 ‘소크라테스 대화’는 대표적인 ‘철학함’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창아】 자기 세계의 한계를 감지하고 인식하며 허물어뜨리는 과정. 사람들이 종종 삶에서 배운다고 하잖아요. 그 말은 한편으로 이미 배운 것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뜻하는데요. 철학도 그런 배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철학만이 그러한 배움 버리기로서의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없이 철학함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질문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세계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말이 혼잣말처럼 떠올랐는데요. 왜 이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을까를 다시 생각해보니, 이번 학기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정치적인 것의 기원: 한나 아렌트냐 시몬 베유냐』(The Origin of the Political: Hannah Arendt or Simone Weil?)(trans by Vincenzo Binetti and Gareth Williams, Fordham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7)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는데 그 영향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에스포지토는 그 책 서문에서 아렌트와 베유의 사유 개념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데요. 그는 두 사람의 사유 개념이 특히 ‘비주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들에게는 주관적 의식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구체적 현실의 차원에 진리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얘기해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기 세계의 한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기의 능력 향상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세계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자기 안에 갇힌 상태로부터 벗어난다는 걸 의미합니다. 저는 철학함이, 어느새 견고해진 주관성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사유 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선현】 올해 여름 어머니를 모시고 해운대에 있는 한 화랑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자연에 몰입한 시간을 다양한 기법들로 담아낸 전시였습니다. 어머니는 달맞이 길을 내려가시면서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이제 자연이 다르게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어머니의 말이 ‘철학’의 의미를 고민하는 저에게 다시 말을 걸어옵니다. 농부이신 어머니에게 자연은 철저히 계산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어머니는 자연을 계산의 대상으로 볼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을 작품을 통해 경험한 것 같습니다.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순간을요.
‘철학’을 한다는 것도 이러한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의 현실에서 연구자는 대상을 앞에 세워 계산하고 따져보고 재현합니다. 세계는 재현하는 연구자에 의해 세워지는 한에서만 비로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사물을 대상으로 재현하지 않을 때, 이러한 존재의 본질·구조·조건을 감각할 수 있게 됩니다. 철학은 세계를 ‘나’에게로 끌어와 내 앞에 세우지 않는 것, 즉 나—주체, 세계—대상과 같은 이분법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있게 하는 존재를 숙고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것, 그러한 존재를 보고자 하는 사색의 과정이 철학인 것 같습니다.
주디스 버틀러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재현할 때, 그 주체는 알고자 하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제외시켜 세계와 분리된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위치에 서 있는 인간은 미디어에서 전쟁과 죽음의 장면을 마주한다 해도 눈 감아버리거나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안심하기도 하죠. 어떤 집단의 자유에 대한 호소가 내 삶을 방해하는 불편 요소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버틀러는 이러한 1인칭 시점을 벗어나기 위해 세계를 내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내 바깥에 둘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나의 밖에 서게 되면 내가 어떻게 타자와 세계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후 깨닫게 된 것은 몸이 우리를 지탱하는 세계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접촉을 통한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했지만, 애초부터 세계에 노출된 몸은 서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죠. 즉, 피부와 살을 가진 몸은 접촉과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세계로 열려있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거나 결정한 적 없는 세상에 던져져 그 세상의 규범과 판단 기준으로 이해되고, 그 세계의 필요조건에 의존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점에서 버틀러는 존재의 근원이 우리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고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타자·자연·역사·기술·제도·세계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 관계성을 깨닫는 것이 버틀러 철학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철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성을, 그 구조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이솔】 “철학함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아마도 학문으로서 철학이 가지는 정의를 묻기보다는 철학이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는 질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질문과 마주할 때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에 대해 말했던 하나의 표현을, 곧 ‘한 줌의 신선한 바람(un peu d'air pur)’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디알로그』에서 들뢰즈는 그 자신이 철학사에 얽매여 있던 당대 철학의 경직성을 벗어나 새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사르트르라는 ‘한 줌의 신선한 바람’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해방기에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철학사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저 헤겔·후설·하이데거 속으로 뛰어들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강아지처럼 중세 때의 스콜라 철학보다도 못한 스콜라적인 철학을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때 사르트르가 있었습니다.(Heureusement il y avait Sartre.) 사르트르는 우리의 바깥이었고, 그야말로 뒤뜰에 부는 바람이었습니다. (···) 소르본의 모든 가능성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질서의 새로운 재편을 감당할 힘을 준 것은 바로 사르트르 특유의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절대로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죠. 어떤 모델이나 방법, 사례가 되는 데에서 멈추지 않았어요. 오히려 한 줌의 신선한 바람이었습니다. 막 플로르에 갔다올 때조차 그는 한 줌의 신선한 바람,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이었지요.”(Gilles Deleuze, Claire Parnet, Dialogues, Paris: Flammarion, 1996.)
제가 생각하는 철학함이란, 이미 주어진 사유의 질서 안에서 더 정교한 설명을 덧붙이는 일이라기보다, 그 질서 자체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굳어버렸는지를 감지하고, 그 틈에 다른 숨결을 불어넣는 일에 가깝습니다. 들뢰즈가 회고하듯, 해방기 프랑스의 철학은 이미 철학사 내부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학자들에게 헤겔, 후설, 하이데거라는 이름은 사유의 원천이기보다는 사유의 안전지대로 기능했고, 철학은 점점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보다 “어디에 소속되는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철학은 세계를 여는 언어가 아니라,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철학함이란 이처럼 이미 승인된 문제 설정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질문 방식 자체를 낯설게 만들고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체계가 아닌 ‘사건’, 방법이 아닌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약간 불온하고, 약간 불편한 것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 철학의 가치는 분명해집니다. 들뢰즈가 말하듯, 사르트르는 어떤 학파의 중심이 아니었고, 하나의 모델로 고정될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철학사 내부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기보다, 철학 바깥에서 철학을 흔드는 존재였습니다.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 가치는, 특정한 이론이나 결론에 있기보다, 철학을 다시 세계의 공기 속으로 끌어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문학, 정치, 일상, 역사적 사건과 얽혀 있었고, 그 때문에 종종 “철학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는 철학을 살아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유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세계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언제나 우리를 안락한 해석의 자리에서 밀어내어, 선택과 행위의 자리로 끌어냅니다.
들뢰즈가 말한 ‘한 줌의 신선한 바람’이란, 사르트르가 새로운 교리를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철학이 다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표현일 것입니다. 결국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철학이란 정답을 제공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유가 굳어버리는 순간을 감지하고 그 자리에 한 줌의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그것을 보여준 아주 드물고도 결정적인 사례였다고 생각합니다.

2. 독자들께 선생님이 전공하신 철학자의 한 문장을 전해 주세요. 그리고 그 문장을 선택하신 이유도 함께 말씀해 주세요.

【강선형】 “거짓의 역량은 개구리와 전갈들에게 잡히고 말 정도로 허약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예술 혹은 삶의 유일한 기회, 즉 니체, 멜빌, 베르그손, 웰즈…의 기회이다.”(질 들뢰즈, 『시간-이미지』, 290쪽)
위 문장은 『시간-이미지』의 ‘거짓의 역량’ 장의 문장입니다. 특별히 멋있는 문장도 아니고, 부연설명도 필요한 문장이지만, 들뢰즈 철학이 왜 필요한가를 고민할 때, 항상 답이 되어주었던 문장이라 선택해보았습니다.
들뢰즈에게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를 와해하는 ‘거짓의 역량’은 윤리적 사유입니다. 미리 정해져있는 참과 거짓, 선과 악,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아주 강력하고, 그래서 위험한 사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개구리와 전갈들에게 잡힐 정도로 허약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인용문의 개구리와 전갈은 오손 웰즈의 영화 <아카딘 씨>에 나오는 우화에서 온 것입니다. 우화에는 강을 건너기 위해 개구리에게 태워달라고 요청하는 전갈이 등장합니다. 전갈의 요청에 개구리는 분명 자기를 찌를 것인데 태워줄 이유가 없다고 거절합니다. 전갈은 개구리에게 자기가 찌르면 함께 가라앉기만 할 것이니, 찌를 이유가 없다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개구리는 전갈을 믿고 태우는데, 전갈은 강 한 가운데에서 여지없이 개구리를 찔러버립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가라앉습니다. 개구리가 죽음에 이르며 전갈에게 함께 죽을 것을 알면서도 찌른 이유를 묻자, 전갈은 이것이 자신의 성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개구리는 참과 거짓의 판단체계를 믿고 따르는 자를 가리킵니다. 전갈과의 계약의 힘을 믿고, 전갈의 합리적인 설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개구리에게, 다시 말해 옳고 그름의 명확한 잣대를 가진 자들에게 거짓의 역량은 전갈 같은 존재와 마찬가지로 질서를 파괴하는 위험한 힘일 뿐입니다. 또한 전갈에게도, 즉 개구리처럼 보편적으로 믿는 판단체계를 따르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저 타고난 성격대로 사는 것을 의미할 뿐인 자들에게도, 거짓의 역량은 무력합니다. 우리는 고정되지 않는 판단체계를 끊임없이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타고난 성격에 따르다 보면 그러한 창조적 역량이 쉽게 사그라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그토록 허약한 역량만이 삶의 유일한 기회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가치의 창조로서만 그 자체로 긍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늘 미리 주어져 있는 무언가에 빗대어서만 긍정될 수 있고, 또 대체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채로 있겠죠.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 그것이 허약한 거짓의 역량에 있습니다. 들뢰즈의 철학은 늘 이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줍니다.

【김분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역사적 접근을 통해 감옥의 역사를 쓴 이유에 관해 서술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현재의 시대적 상황과의 관련 속에서 과거의 역사를 쓰려고 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며, 현재의 역사를 쓰려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푸코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구이며, 그가 어떤 이유에서 역사가나 사회학자가 아닌 철학자인지를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푸코는 현재의 역사를 쓰려 과거의 역사를 보는 것이지 과거를 보려고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성을 탐구하고 현재의 문제를 조망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답을 찾고자 하는 이가 철학자 푸코입니다. 저는 푸코의 현재성이라는 표현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보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구성하는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중요한 변환 장치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을 현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바뀌게 되기 때문에 현재성은 시간성의 중요한 변환 통로가 됩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용한 위의 문장은 푸코적인 것을 잘 드러낸다고 봅니다.

【김애령】 폴 리쾨르가 리처드 커니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철학의 임무는 원을 닫고 지식을 중심화하거나 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의 환원 불가능한 복수성(複數性)을 계속해서 열어 놓는 것이다. 상이한 담론들이 어떻게 상호 관련되거나 교차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본질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담론들을 동일한 것,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저항해야만 한다.” 리쾨르의 이 말이, 나를 리쾨르의 철학, 그의 철학함의 에토스, 그의 철학하는 방법과 이어줍니다. 복수성을 열어두는 것, 담론들을 동일한 것,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것, 그것은 나의 철학함의 에토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김은주】 “긍정의 윤리학에서 타자에게 내가 해를 가하면 힘, 긍정성의 손실, 관계의 능력 즉 자유의 손실이라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 해를 미치는 것으로서 되돌아 온다.”(로지 브라이도티, 긍정, 고통 그리고 임파워먼트, 글로벌 아시아의 이주와 젠더,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 여성학센터, 2011, 64쪽) 이 문장을 알리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 브라이도티의 긍정의 윤리학의 핵심 문장인 동시에, 브라이도티가 들뢰즈의 행동학의 계보에 서 있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노성숙】 “고통이 말해지도록 하려는 욕구는 모든 진리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주체에게 부과된 객관성, 주체가 그 자신의 가장 주관적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현은 객관적으로 매개된다.”(아도르노, 『부정의 변증법』ND 29)
최근 들어 저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부터 ‘실천으로서의 철학함’으로 강조점을 이동해가고 있으며, 철학상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된 주제는 ‘고통’입니다. 고(苦, suffering)와 통(痛, pain)을 구별해본다면, 육체적인 통증(痛症)은 어느 정도 객관화할 수 있겠지만, 심리적인 아픔은 워낙 주관적인 성격이 강해 객관화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양자가 서로 감응하면서 고통이 총체적으로 더욱 심화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도르노는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혹은 철학사적으로 말해진 모든 진리가 현실에서 몸으로 겪는 아주 구체적인 고통 앞에서 무력해질 수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주체가 경험한 것을 어떻게든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며, 그 개념이나 언어로 모두 담을 수 없는 사태를 ‘변증법적으로 사유’하도록 촉진합니다. 따라서 아주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나오는 ‘철학함’을 위해 ‘고통’의 계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양창아】 한 문장이 아니라 한 문단을 전해야겠어요. 아렌트 사상의 핵심과 그녀의 인격적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고 여겨지는데, 한 문장만 잘라내기가 힘드네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홍원표 옮김, 인간사랑, 2010)에 수록된 「어두운 시대의 인간성: 레싱에 관한 사유」에 있는 구절인데요. 이 구절을 선택하게 된 이유와 맥락을 먼저 말하고 싶어요. 아렌트가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남다르기 때문이지요. 이 글에서 아렌트는 형제애와 우정을 구분하고, 우정이야말로 정치에 적합한 관계이자 감정이라고 말해요. 흔히 우정을 사람들 사이의 친밀성을 드러내는 현상 중 하나로, 형제애 또는 연인이나 가족 간의 사랑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잖아요. 하지만 아렌트가 보기에, 사랑은 말이 필요 없는 관계나 동질성에 기반한 관계를 추구하는 데 반해, 우정은 그 본질이 대화 속에 있는 관계로서, 우리가 함께 사는 세계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진 존재와 맺는 관계입니다. 친구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공동의 세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 내가 보지 못한 세계의 다른 면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생각이 똑같다면, 대화는 끝이 나겠지요. 그러니까 아렌트에게 친구는 나와 코드가 맞고 말없이도 생각이 통하는 존재라기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존재,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다른 이질적 존재입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관점의 ‘복수성(plurality)’이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 조건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공동의 세계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질 때 세계는 ‘인간적인’ 것이 된다고 말하기도 해요. 달리 말해, 공적 영역에서 다른 의견이 말해지지 않고 다른 시각이 드러나지 않으면, 세계는 ‘비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인간성(humanity)’도 인간의 동질적인 자연적 본성의 의미가 아니라 우정(philia)의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애, 즉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여기에는 친구와 세계를 공유하는 경험의 기쁨, 이질적 존재와 함께 살고 이야기하며 세계의 면면을 풍요롭게 경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물론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니 대화는 논쟁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논쟁 과정을 통해 세계의 다른 면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를 이전보다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때때로 이러한 공적 대화를 통해 함께 사는 세계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도 있지요. 아렌트는 이런 경험이야말로 정치적 경험의 핵심(heart)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어두운 시대’의 어두움은 이와 같은 정치적 경험이 그 의미를 잃고 사람들에게서 그 경험 자체가 소실되는 사태를 가리켜요. 여기서 이질적 존재는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나 적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대의 징후 중 하나는 공적 영역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차이를 드러내는 논쟁적 대화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공적 영역에서 타자와 동등하게 맺는 우정의 관계가 불가능해진 세계, 즉 ‘비인간화된’ 사회에서는 위로와 위안을 주는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만이 자기다움과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겨지게 되어요. 하지만 그렇게 논쟁과 차이가 사라진 세계는 다양한 관점의 결핍으로 인해 타자에게 가혹해질 수밖에 없지요. ‘타자’의 이질성은 ‘우리’ 공동체의 특성에 맞춰서 동화되어야 할 요소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아렌트의 견해에 따르면, 타자의 이질성에 기반한 다른 시각이 공론화되고 공적으로 존중될 수 있을 때, 그것이 공동체에 새로움으로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때, 정치의 경험이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저는 현재 우리가 레싱과 아렌트의 시대와는 또 다른 결로, 그러나 같은 의미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 구절을 선택했어요.
“레싱도 이미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으며, 시대의 어둠은 결국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의 삶을 파괴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가지며, 공적 영역만이 줄 수 있는 빛과 조명을 대신해, 친밀함의 온기 속에서 위안을 찾으려 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논쟁을 피하고, 가능한 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싱 같은 기질의 사람에게는 그런 시대와 폐쇄적 세계 내에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 따뜻해지기 위해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레싱으로부터 멀어져갔다. 하지만 다투기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논쟁적인 성향을 지닌 그는 외로움도 견딜 수 없었지만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형제애의 과도한 친밀함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결코 자신과 논쟁을 벌였던 사람과 결별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다만 세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세계를 인간적으로 만들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많은 사람과 친구가 되기를 바랐지, 누군가의 형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On Humanity in Dark Times: Thoughts about Lessing,” Men in Dark Times, San Diego: Harcourt Brace Jovanovich, c1983, p. 30(국역본 53-54쪽).)

【이선현】 “내가 생각하기에 슬픔이란 파도처럼 밀려오는 법이어서, 목표, 기획, 계획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한다 해도 실패하고 만다. 무너지게 되는 때가 있다. 지쳐 쓰러져도 왜 그런지 모른다. 우리의 의식적인 계획, 우리 나름의 기획, 우리 자신의 앎과 선택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책 『위태로운 삶』 49쪽에 나오는 문장들입니다. 별안간 세상이 고요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나를 덮쳐온 슬픔이 더 큰 무언가와 연결되어있다는 감각, 세계와 이어지는 감각의 경험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위태로운 삶』을 읽을 당시 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첫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사흘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가족의 죽음에도 흔들림 없는 이성적인 나의 모습을 조금 대견해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며칠 뒤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냄새가 확 떠올랐고, 그 냄새의 기억으로 인해 목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잠시 동안 온전한 존재로 남아있기를 원했고 또 잠깐 그럴 수도 있었지만, 상실의 슬픔은 결국 저를 와해시켜 버렸습니다. 그런 제게 버틀러의 이 문장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알려줍니다. 내가 타자와 세계에 연루되어 있음을 슬픔이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상실의 순간에 저는 무엇을 잃었던 걸까요? 아버지를 잃은 것뿐만 아니라, 나라는 인물을 구성했던 아버지를 잃음으로써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상실한 것은 아버지와 나를 이었던 유대관계였어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일 수도 있으며, 반려종일 수도 있겠죠. 혹은 미디어를 통해 접한 죽음의 소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어떤 방식으로든 상실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슬픔은 자율적이고 통제가능한 ‘나’라는 존재의 환상을 무너뜨립니다. 내가 침투 불가능하고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 상실의 슬픔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버틀러의 이 문장은 상실을 경험한 자들을 위한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사건 너머에 있는 신의 계획을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자신의 앎과 선택보다 더 큰 무언가’란,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관계성입니다.
다만 슬픔을 통한 관계성을 이해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관계성은 상실에 대한 단순한 감정적 공감이 아닙니다.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상실에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위선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죠.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소식에 안타까워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죄책감을 털어버리려는 수단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버틀러는 슬픔이 보는 것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 나와 너를 구성하는 조건과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버틀러의 문장을 통해 독자들도 세상이 고요해지는 순간을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관계성을 이해함으로써, 나와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심지어 적대하는 이들과도 연대할 수 있기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솔】 제가 독자들께 전하고 싶은 사르트르의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L’ecrivain est en situation dans son epoque: chaque parole a des retentissements. Chaque silence aussi.(작가는 자신의 시대 안에 위치해 있다. 그의 모든 말은 파장을 낳는다. 침묵조차도 마찬가지다.)”(Jean-Paul Sartre, Situations II, 1948.)
그 많은 문장들 가운데 제가 이것을 택한 까닭은 이 문장이야말로 ‘가장 사르트르다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을 명징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그의 철학을 특징짓는 개념들, 이를테면 실존, 앙가주망(engagement), 자기기만, 자유, 책임과 같은 논의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언제나 ‘상황(situation)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떤 본질이나 규범 바깥에서 중립적으로 사유하거나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특정한 시대, 사회, 정치적 조건, 언어와 관습 속에 던져진 채로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합니다. 이 점에서 “작가는 자신의 시대 안에 위치해 있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단지 직업적 작가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사유하는 모든 인간에 대한 규정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에게 말한다는 것은 단순한 표현 행위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말은 세계를 단지 기술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와 동시에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구성합니다. 이것이 “각각의 말은 파장을 낳는다”는 문장이 가진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문장이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면, 그 이유는 마지막 한 문장에 담겨 있을 겁니다. “침묵조차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는 침묵을 결코 무책임의 은신처로 허락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판단을 유보하는 중립적 상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상황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취하는 방식입니다. 부정의(不正義) 앞에서의 침묵, 폭력 앞에서의 침묵, 차별 앞에서의 침묵은 그 자체로 특정한 세계를 선택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책임 개념이 가지는 무게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말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진다고 말합니다. 제아무리 눈을 가리고 몽매(蒙昧)한 상태를 자처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책임을 떠맡고 있습니다. 침묵조차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르트르 철학에서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부담입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갖지 않습니다. 말하든, 침묵하든, 관망하든, 우리는 언제나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바로 이 사실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말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침묵이 전략화된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립’을 가장한 회피, 피로를 이유로 한 거리 두기. 이 문장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우리에게 더 많이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묻습니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 그리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어떤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관객’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의 문장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사르트르 철학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목차

기획의 말

아렌트와 바깥을 향한 사유 _ 양창아 ×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를 만난 시간
기억의 조각 | 대학에 갈까 말까 | 대학의 안팎에서 | 사유의 과제

한나 아렌트와 파리아 개념
경험과 사유 | 파리아, 접촉할 수 없는 | 자각한 파리아의 관점 | 사유의 조건

리쾨르, 삶은 이야기다 _ 김애령 × 폴 리쾨르

맺음을 거부하는 끝없는 과정
폴 리쾨르와의 만남 | 이해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 “삶은 이야기다”— 현장에서 | 여성으로, 경계에서 그리고 경계를 넘나들며 철학하기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소박하고 성실한 철학자 | 리쾨르의 미메시스론 | 서사 정체성 이론의 가능성과 한계

아도르노, 고통에 대한 변증법적 성찰_노성숙 × 테오도어 아도르노 64

내가 만난 철학, 철학상담의 길
철학에 매료된 첫 계기 | 학부와 대학원에서 전공으로 배운 철학 | 독일 박사과정 동안 철학공부의 심화 | 철학을 포기하려다 만난 만난 철학상담 | 철학상담을 통해 꾸는 꿈 —더불어 철학함

상처입은 개인의 삶과 사회적 고통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사상가 아도르노
철학상담의 관점에서 본 아도르노 | 이주와 탈주를 거듭하며 상처 입은 아도르노 개인의 삶 | 사회적 고통의 진원지를 탐구한 『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뿌리로부터의 비동일적 사유 『부정 변증법』 | 사회적 고통으로부터 상처 입은 아도르노의 자기 치유

사르트르, 자유로서의 주체 _ 이솔 ×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 자유로서의 주체
사르트르 철학은 어떤 것인가?
첫번째 답변 | 두번째 답변
왜 사르트르인가?
선택의 의미 | 문제의 전환

들뢰즈와 배움 _ 강선형 × 질 들뢰즈

들뢰즈와 배움
들뢰즈를 공부하며 배운 것 | 철학이란 무엇인가 | 철학을 한다는 것 | 글을 쓴다는 것 | 기호와 잃어버린 시간 | 기호와 배움

차이와 반복의 세계
배움과 수련의 철학 | 차이와 반복 | 반복이라는 조건 | 들뢰즈 철학으로 할 수 있는 것

푸코와 함께 현재를 사유하기 _ 김분선 × 미셸 푸코

멋진 인간이 되려는 분투, 철학과 함께 살기
철학을 소개할 준비 | 철학의 멋에 빠져들기 | 철학의 세계에 들어설 용기

함께 사유하는 친구, 미셸 푸코와 함께 걷기
철학계 슈퍼 아이돌, 미셸 푸코 | 우주 보편 철학에서 지구별 일상 철학으로 | 자기 배려와 쾌락의 윤리학 | 성실하고 진지한 철학자이자 나의 오랜 친구

버틀러와 관계성 _ 이선현 × 주디스 버틀러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하다: 기독교인이 읽는 주디스 버틀러
What Is Love for You? | ‘이웃 사랑’의 함정 | 사랑의 양가성 |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주디스 버틀러, 몸 그리고 수행성: 경계로서의 몸을 넘어 몸들의 틈새로
경계로서의 몸과 젠더 수행성 | 슬픔이 가르쳐 준 박탈된 몸 | 몸들의 틈새와 복수적 수행성

브라이도티와 여성-되기 _김은주 × 로지 브라이도티

몰락과 우연이라는 철학하기의 여정
나의 몰락 | 우연의 길에 들어서, 여성주의 철학과의 만남 | 윤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 오래된 도시라는 ‘언어’로 철학의 세계에서 사유하기

로지 브라이도티, 여성-되기 그리고 포스트 휴먼
로지 브라이도티의 문제 의식 | 들뢰즈의 신체 개념과 브라이도티의 유목적 주체 | 여성-되기와 포스트휴먼적 주체성 |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의 페미니즘

저자소개

노성숙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아도르노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여성철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철학상담 전공 교수이자 철학상담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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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령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했고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고, 『여성, 타자의 은유』, 『은유의 도서관: 철학에서의 은유』, 『듣기의 윤리』, 『애프터 해러웨이』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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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들뢰즈와 칸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40회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여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비평가 들뢰즈』(공저), 『들뢰즈와 칸트: 차이와 이념의 철학』, 『자크 데리다』, 『철학극장: 철학과 영화의 마주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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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해제)    정보 더보기
철학연구자,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서 헤겔 연구로 석사학위를, 들뢰즈와 브라이도티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페미니즘 철학 입문』,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함께 쓴 책으로는 『인지와 인공지능』, 『출렁이는 시간[들]: 제4물결 페미니즘과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즘』, 『디지털 폴리스』, 『디지털 포스트휴먼의 조건』이 있다. 『죽음정치: 증오의 정치에 관하여』,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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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솔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질 들뢰즈의 이미지 이론을 비교 분석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있으며, 서강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자아의 초월성』을 공역했으며, 공동 저서로는 『사르트르의 미학』, 『놀이꾼의 상상력』, 『비평가 들뢰즈』가, 단독 저서로는 『이미지란 무엇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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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창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부산대학교 철학과 강사. 아렌트의 ‘자각한 파리아의 관점’에 주의를 기울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정치적 행위를 시작하고 정치적 역량을 키워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하며 박사 학위논문을 썼고, 그것을 『한나 아렌트, 쫓겨난 자들의 정치』로 펴냈다.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적 파시즘 현상에 주목하면서 아렌트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페미니즘 철학』을 옮겼고, 공저로 『젠더, 이주, 난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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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분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중앙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일반대학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 「푸코의 배려 주체와 자기 배려의 윤리」로 철학 박사학위(2017)를 받았다. 세부 전공은 서양 현대철학, 윤리학이다. 숭실대학교, 홍익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현재는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신뢰사회사업단의 연구전담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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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부산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동 대학 인문학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비평이론과 세계문학론 등에 관심이 있으며, 현재 ‘주디스 버틀러와 세계문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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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기획의 말

“각 선생님께는 두 편의 글을 요청드렸습니다. 한 편은 자신이 철학(혹은 전공한 철학자)과 만난 이야기, 또는 철학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개인적인 사유를 담은 에세이입니다. 다른 한 편은 선생님이 깊이 파고들어 온 철학자의 사상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풀어낸, 입문서에 가까운 글입니다(한 분의 선생님은 특별히 이 두 가지 요구를 한 편의 글에 직조하여 보여 주십니다). 이 두 편의 글은 철학자의 삶과 사유가 분리될 수 없음을, 또 철학이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여성철학자들의 목소리를 한 자리에 모아 보여 주는 일은 단순한 소개를 넘어, 철학의 장을 다시 구성하는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얼굴이 대개 남성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철학 자체의 본질 때문이 아니라, 어떤 사유가 기록되고 전승되며 제도화되어 왔는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철학함에 성별의 구분은 당연히 없지만, 철학자의 이름이 호명되는 방식에는 분명 성별의 정치학이 작동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온 기준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 ‘여성철학자’라는 명명을 사용합니다. 이 명명은 특정한 맥락에서 필요하며, 언젠가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질 이름이지만,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모인 여성철학(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삶을 다시 사유하게 만들고, 당연하게 여겨 온 경계에 질문을 던지며, 이질적인 존재들과의 연결을 사유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한 이 작업들을 철학자 자신의 경험과 함께 들려주는 이 책이,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자신의 삶을 더 사유하는 쪽으로, 우리에게 그어진 경계를 의심하는 쪽으로, ‘우리 공동체’ 바깥의 존재를 상상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면, 기획자로서 더 이상의 바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 모임의 구성원이 서로 알게 되면서 ‘강정’, ‘영도’, ‘밀양’, ‘만덕’에 함께 연대하게 되었고 저 장소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중요한 사건들도 만나게 되었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공동의 장소를 지키기 위해 이른바 전쟁 반대, 노동, 환경 및 에너지, 주거권 운동을 새롭게 이어 나가고, 다양한 연대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연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제껏 배운 것들이 깨어지거나 생생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말하고자 했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관계망이 형성되면서 공동의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정치적 행위가 시작된다는 게 뭘 뜻하는지를 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창아, 「한나 아렌트를 만난 시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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