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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권근, 김부식, 김시습, 김정희, 박지원, 서거정, 이규보, 이이, 이인로, 이황, 임춘, 정약용, 최치원, 허균, 강희맹, 이수광(지은이), 손광성, 김경수, 임종대(엮은이)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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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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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 
· 분류 : 국내도서 > 고전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 ISBN : 9788932461199
· 쪽수 : 323쪽
· 출판일 : 2003-05-30

책 소개

설종, 최치원, 이규보, 박지원, 정약용, 허균, 김시습 등 우리 문단을 빛낸 선인들의 한문수필 64편을 골라엮었다. 전체 7장이며 주제별로 묶었는데 한문 문체의 특성도 고려했다. 원문의 얼개와 향기를 살리되 딱딱...
설종, 최치원, 이규보, 박지원, 정약용, 허균, 김시습 등 우리 문단을 빛낸 선인들의 한문수필 64편을 골라엮었다. 전체 7장이며 주제별로 묶었는데 한문 문체의 특성도 고려했다. 說類에 해당하는 작품은 1장, '記類'에 속하는 작품은 2장에, 3장은 祭文, 4장은 書類, 5장은 생활 주변의 일화, 6장은 疏와 論, 7장은 각종 獻詞를 모은 것이다.

원문의 얼개와 향기를 살리되 딱딱한 의고체를 피해 요즘 독자들에게 잘 맞는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목차

1. 생활의 예지
늙은 쥐의 꾀 - 고상안
아비 도둑과 아들 도둑 이야기 - 강희맹
세 형제의 등산 - 강희맹
꿩 사냥 - 강희맹
대나무 - 이인로
배에서 사는 어느 노인과의 대화 - 권근
소를 타고 다니는 즐거움 - 권근
대머리의 변 - 권근
여색 - 이규보
백운거사 어록 - 이규보
죽음에 대하여 - 이수광
밤새 강을 아홉 번 건너다 - 박지원

2. 한가로움과 풍류
숨어사는 선비의 즐거움 - 신흠
구름 속의 정자 - 김수온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 정약용
내가 살아가는 모습 - 박지원
운금루기 - 이제현
어부의 즐거움 - 권근
밤나무 예찬 - 백문보
네 벗이 사는 집 - 허균
세 가지 유익한 벗 - 유방선
삼각산 기행 - 이정구
게으름도 때로는 이로움이 되나니 - 성현

3. 사랑과 고뇌 그리고 소망
의로운 거위 이야기 - 주세붕
아내의 영전에 - 김종직
형님 영전에 바칩니다 - 김일손
열녀 함양 박씨전 - 박지원
빠진 이를 아쉬워하며 - 김창흡
아내 숙부인 김씨 행장 - 허균
늙은 말과의 대화 - 홍우원
호조참의를 사양하는 글 - 김창협
친구 박영기가 토계의 수신에게 제사 지내고 그 아우의 시신을 찾는 것을 돕기 위하여 지은 글 - 김택영

4. 오는 정 가는 정
백영숙을 기린협으로 보내며 - 박지원
술 익자 살구꽃 피니 - 이규보
초의 선사께 - 김정희
삽과 칼과 낫을 벗으로 삼은 사람의 이야기 - 권근
아들 학연에게 - 정약용
추강 남효온 선생께 보내는 글 -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 선생께 답함 - 남효온
남명 조식 선생께 - 이황

5. 사랑하는 사람들, 정다운 이웃들
닭의 여섯번째 미덕 - 이첨
나의 어머니 사임당의 생애 - 이이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 - 이현보
이낭중께 서해를 천거합니다 - 임춘
박연과 피리 - 성현
민영감 이야기 - 박지원
개야, 내 너에게 이르나니 - 이규보
청백리의 일화 - 이수광
고양이 - 서거정

6. 인식과 비판의 칼
이상한 관상쟁이 이야기 - 이규보
금남에 사는 어느 야인의 비판 - 정도전
파리를 조문하는 글 - 정약용
박쥐야, 박쥐야 - 서거정
쥐를 쫓는 주문 - 이규보
나의 작은 채소밭 - 이곡
밀양 향교 여러분께 - 김종직
선비 정신 - 신흠

7. 옛법을 다시 쓰니
꽃으로 왕을 깨우치다 - 설총
규정기 - 조위
<삼국사기> 를 바치며 - 김부식
서낭신께 아룁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 이건창
보정문의 상량문 - 이백순
원나라 살리타 관인에게 보내는 글 - 이규보
황소에게 보내는 격문 - 최치원

저자소개

김부식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인종 때 대문장가. 본관은 慶州. 자는 입지(立志).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렬공(文烈公). 신라 왕실의 後裔로 1145년,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 正史를 찬진(撰進)함. 얼굴은 검고 우람하였으며 고금의 학식에 있어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할 무렵에 증조부인 위영(魏英)이 고려태조(太祖)에게 귀의해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부식(金富軾) 4형제가 중앙관료로 진출할 때까지의 생활기반은 경주에 있었다.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1145년에 《삼국사기》를 완성하였다. 한림원에 있을 때에는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 송 시대의 고문체(古文體)를 수용하였다. 현재 삼국사기 목판본이 보관되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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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지은이)    정보 더보기
1435~1493.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청한淸寒),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반궁(泮宮) 북쪽의 초가집에서 부친 김일성(金日省)과 모친 울진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9년(세종 21), 5세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으로 찾아와 김시습의 시재(詩才)를 확인하였고, 이후 조정의 고관들이 김시습을 보기 위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김시습이 ‘오세신동’으로 불린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1443년(세종 25), 9세 무렵 세종이 승정원 승지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 그 재능을 확인케 했는데, 김시습은 박이창 면전에서 시구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세종은 박이창을 통해 김시습에게 금포(錦袍: 비단 도포)를 하사하고 ‘훗날 이 아이를 크게 쓰겠다’는 말을 전한다. 1455년(단종 3, 세조 1),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3일을 나오지 않다가 홀연 통곡하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 후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가 달아났다. 이후 삭발한 후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였다. 1463년(세조 9), 29세 때,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우거하였는데, 이후 1467년경,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것으로 보인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환속했지만, 성종이 계비(繼妃) 윤씨를 폐비(廢妃)하고 사사(賜死)하는 사건을 보고 2년 만에 다시 승려의 복장을 하고 관동으로 향했다. 1493년(성종 24), 59세 때 「자사진찬」(自寫眞贊)을 짓고, 곧바로 이 해 2월,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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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후기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 실학자·서화가. 예산 출신.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조선조의 훈척 가문(勳戚家門)의 하나인 경주 김문(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 앞으로 출계(出系: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울러 이르던 말)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예조 참의·설서·검교·대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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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 대표적 문신이자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그는 한양 서쪽 반송방에서 노론의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박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였으며 조부 박필균은 정2품 관직에 오르면서도 붕당 정치에 휩쓸리지 않아 적이 없었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건장하고 영민하며 암기력이 뛰어났다. 열여섯 살에 처사 이보천의 딸과 결혼한 후에는 장인과 처삼촌 이양천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배우고 처삼촌에게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와 문장론을 익히며 글쓰기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이때 함께 공부한 처남 이재성은 평생의 문우이자 든든한 조언자가 되었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를 다녀온 삼종형 박명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청나라 선진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향후 그가 실학의 핵심인 ‘북학파(北學派)’의 거두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후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교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특히 홍대용과 교제하며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적 가치를 토론하며 견문을 넓혀나갔다. 과거에 낙방한 후 저술에 전념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 여행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충·효·열을 강조하던 전통 도학에서 벗어나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실학에 주목했다. 자연과학과 서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농업 기술서인 《과농소초》를 저술했다. 나아가 백성에게 이롭다면 오랑캐의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정신을 주장하며 명분에 치우쳤던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또한 그는 기발한 문체로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고발한 문학가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산문으로 조선 문단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청나라 견문록인 《열하일기》에서는 현지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서체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글씨체를 선보이기도 했다.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그의 문장은 조선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열하일기》에 수록된 〈양반전〉, 〈허생전〉, 〈호질〉을 비롯해 〈민옹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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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세종 2년에 태어나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요 학자였다. 자는 강중(剛中) 또는 자원(子元)이며,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으로 불렸다. 목사를 지낸 달성 서씨 미성(彌性)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세종 20년에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세종 2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폭이 넓어 천문·지리·의약·점성술·풍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으로 다녀왔고, 세조가 즉위하자 세자 사부로 보임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사은사로 중국에 갔을 때 그의 문장을 대륙에까지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성종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 깊이 관여하였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지사를 오래도록 겸하면서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45년간의 관직생활 동안 절반이나 문형을 관장할 정도였다. 아울러 전후 23 차례에 걸친 과거 시험을 관장하여 수많은 인재를 그의 손으로 뽑았다. 학풍과 사상은 조선 초기 관학의 분위기를 대변하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대신 입장을 견지하기도 했지만, 여러 전적들을 편찬할 때는 신진 사림계의 인물들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가 주축이 되어 편찬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이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문집 ≪사가집(四佳集)≫이 세상에 전한다. 대구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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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문학자이자 정치가인 이규보는 경기도 여주의 문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이며 백운거사(白雲居士), 백운산인(白雲山人), 지헌(止軒) 등 다양한 호를 사용했다. 말년에는 시(詩), 거문고, 술을 몹시 즐겨 스스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칭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수재’로 칭송받았으나 과거 시험에 세 번 낙방하는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네 번째 응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며 능력을 입증했다. 초기에는 하급직을 전전했으나 무신집권자인 최충헌을 칭송하는 시를 지어 올린 것을 계기로 발탁되어 고위직에 올랐다. 이후 중 앙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무신정권의 혼란 속에서도 탁월한 문장력으로 국가의 기틀을 세웠고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왕권 강화와 사회 안정을 위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이끌었다. 이규보의 사상과 문학 세계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불교, 도교, 민간 신앙까지 폭넓게 포용하고 경전, 사기(史記), 선교(仙敎), 잡설 등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하며 깊이 있는 철학을 구축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국선생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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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 1536년(중종31년) 1세 : 12월 26일 강릉부 북평촌 외가에서 출생함. 부친은 이원수(李元秀), 모친은 신사임당(申師任堂), 본관은 덕수(德水), 字는 숙헌(叔獻), 號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 1541년(중종36년) 6세 : 강릉에서 한양으로 올라옴. - 1542년(중종37년) 7세 : 「진복창전(陳復昌傳)」 지음. - 1543년(중종38년) 8세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花石亭)」 시 지음. - 1545년(중종40년) 10세 : 「경포대부(鏡浦臺賦)」 지음. - 1548년(명종3년) 13세 : 진사초시에 장원급제함. - 1551년(명종6년) 16세 : 5월 어머니 신사임당 별세, 「선비행장」을 지음. 파주 두문리에 어머니를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함. - 1554년(명종9년) 19세 : 우계 성혼(1535~1598)과 도의의 교분을 맺음. 3월 어머니 시묘 3년을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함. - 1555년(명종10년) 20세 : 금강산에서 강릉으로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유학에 전념함. - 1556년(명종11년) 21세 : 봄에 한양으로 돌아와 漢城試에 장원급제함. - 1557년(명종12년) 22세 : 9월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함. - 1558년(명종13년) 23세 : 봄에 경북 예안 도산(陶山)을 방문하여 퇴계 이황을 만남. 겨울에 別試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함. - 1561년(명종16년) 26세 : 5월 아버지 이원수 별세. - 1564년(명종19년) 29세 : 7월 생원 진사시에 장원급제함. 8월 明經試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으로 첫 벼슬길에 나아감.(모두 9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 불림.) - 1565년(명종20년) 30세 : 봄에 예조좌랑에 전임. 8월 요승(妖僧) 보우(普雨)와 권간(權奸) 윤원형(尹元衡)을 단죄하는 상소를 올림. 11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사퇴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불허. - 1566년(명종21년) 31세 : 2월 병조좌랑에, 3월 다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됨. 겨울에 이조좌랑에 임명됨. - 1568년(선조원년) 33세 : 2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됨. 가을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함. 11월에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가 강릉 외조모 이씨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강릉으로 내려감. - 1569년(선조2년) 34세 : 6월 교리에 임명됨. 9월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림. - 1570년(선조3년) 35세 : 4월 교리에 임명됨. 10월 병으로 사직하고 해주로 감. - 1571년(선조4년) 36세 : 1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여름에 교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해주로 감. 6월 청주목사에 임명됨. - 1572년(선조5년) 37세 : 여름에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감. 8월에 원접사 종사관, 9월에 사간원 사간, 12월에 홍문관 응교, 홍문관 전한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퇴함. - 1573년(선조6년) 38세 : 7월 홍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3차례 상소를 올린 후 사임하고 8월에 파주로 돌아감. 9월 다시 직제학에 임명되어 사퇴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함. 겨울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임명됨. - 1574년(선조7년) 39세 : 1월 우부승지에 임명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림. 3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됨. 10월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됨. - 1575년(선조8년) 40세 : 8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됨. 9월 『성학집요』를 지어 올림. - 1576년(선조9년) 41세 : 우부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전라감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나아가지 않음. 10월 해주 석담에 청계당을 지음. - 1577년(선조10년) 42세 : 1월 해주 석담에서 「동거계사」를 지음. 5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12월 『격몽요결』 지음. - 1578년(선조11년) 43세 :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를 지음. 3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6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 1579년(선조12년) 44세 : 5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 1580년(선조13년) 45세 : 5월 「기자실기」 지음. 9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 12월 대사간에 임명. 1581년(선조14년) 46세 6월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다시 예문관 제학으로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8월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9월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상소를 올림. 10월 호조판서에 제수됨. 11월 『경연일기』 완성 - 1582년(선조15년) 47세 : 1월 이조판서에 제수됨. 7월 선조의 명으로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학교모범」, 「사목(事目)」을 지어 올림. 8월 형조판서에 임명됨. 9월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고 숭정대부로 특진. 10월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가 되어 「극기복례설」을 지음. 12월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 1583년(선조16년) 48세 : 2월 「시무육조」 지어 올림. 3월 경연에서 십만양병을 건의함. 6월 동인의 탄핵을 받고 파주로 돌아갔다가 7월에 석담으로 돌아감.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불허. - 1584년(선조17년) 49세 : 1월 「육조방략」을 최후로 지음. 1월 16일 한양 대사동에서 별세함. 3월 20일 파주 자운산에 안장됨. - 1624년(인조2년) : 문성(文成)의 시호를 받음. - 1681년(숙종7년) : 문묘의 종사를 허락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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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로 (지은이)    정보 더보기
1152년, 고려 왕조 500년 동안 내우외환이 가장 많던 시기에 태어난 관료이자 시인. 처음으로 시평을 써서《파한집》이라는 시평집을 내놓은 사람이다.《파한집》은 이인로의 설화 문학집으로, 저자가 죽기 직전에 지은 작품을 사후 40년이 지난 뒤, 그의 아들인 이세황이 간행한 것이다. 시대적인 불운으로 인해 18세 때 무신 반란인 정중부의 난을 맞고, 이 계기로 이인로는 중이 된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뒤, 정중부 일당이 숙청되자 그는 환속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 관직에 재임하던 중 고종 7년(1220), 향년 69세로 개경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저서로 《파한집》3권, 《은대집》20권, 《후집》4권, 《쌍명재집》3권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파한집》3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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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평생 이학 연구와 실천에 힘을 기울여 동아시아 이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종사하다 일찍 물러나 서당을 짓고 이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계몽전의』를 편찬하여 이학을 밝혔고, 『연평답문』 『심경부주』를 활용하여 수신에 힘을 기울이면서 『자성록』을 남겼다. 만년에 조정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 등 정책과 학문 양쪽으로 선정의 방략을 건의했다. 문하에서 김성일·유성룡·정구·조목·이덕홍 등 후일 영남학파를 이룬 주요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기대승·성혼·이이 등 당대 조선의 학자들 대부분이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모범으로 삼았다. 이후 조선과 동아시아의 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현대에도 계속 재성찰되고 있다. 별세 뒤 도산서원이 건립되어 향사되었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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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의종과 명종 시대 문인이자 학자이다. 자는 기지(耆之)이며 호는 서하(西河)이다. 예천 임씨의 시조이기도 하며 고려 건국 공신의 후예로 할아버지 평장사(平章事) 임중간(林仲幹)과 상서(尙書)와 좌의정을 지낸 아버지 임광비(林光庇)와 한림원 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林宗庇) 등 귀족사회의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던 임춘은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무신 정변 시기에 가문 전체가 화를 입어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 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전부 탈취당하여 가문이 몰락한 후 이인로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벗들과 시와 술을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토하면서 자신의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술을 의인화하여 당대의 부패한 정치 현실을 비판한 〈국순전〉, 〈공방전〉의 가전체 소설과 불우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장편시 〈장검행〉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이인로가 엮은 유고집 《서하선생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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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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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지은이)    정보 더보기
허균(許筠, 1569∼1618)은 어떤 사람인가? 흔히 허균은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 또는 반역을 기도하다가 처형된 인물로 운위된다.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적서 차별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욕망이 허균의 평소 염원을 반영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의견은 허균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적대적 인물의 전언(傳言)에만 등장할 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허균이 반역을 도모했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진위가 불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반역죄로 처형된 여타 인물의 경우와 달리, 허균에 대해서는 직접적 물증 없이 주변 인물들의 증언만으로 사형이 결정되었기에 ‘훗날 반드시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기도 할 정도다. 이처럼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음에도 위의 두 가지 사안은 학교 교육이나 대중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그 결과 일반 대중이 허균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허균에 관한 직접 경험이 아니라 허균에 대한 소문을 채록한 야사(野史) 계통의 자료에 의존한 현대의 전언들이 허균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를 증폭시킨 면이 있다. 하지만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허균의 면모는 그런 대중적인 인식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는 조선 시대를 풍미한 사상과 문화, 정치 제도에 순응한 점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여느 관료 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례로 허균은 유가 전통의 핵심을 이루는 경서(經書)나 사서(史書)에 대한 학습 및 내재화, 충효라는 덕목에 대한 숭상과 실천을 사대부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으로 인정한다. 본서에 수록한 〈엄처사전〉은 물론, 〈학산초담〉을 비롯한 초기작이나 허균의 나이 40대 초반에 쓴 〈학론(學論)〉(1610) 같은 글에서 일관되게 이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흔히 허균이 당대 관료나 사대부 문인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지녔다 해 운위되는 것이 불교 서적이나 도가 사상에 대한 애호라고들 한다. 하지만 도가적 어휘가 대거 등장하는 〈남궁선생전〉을 쓴 이후에도 〈학론〉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정치의 기본 원리로서 성리학의 기본적 사유 방식을 옹호한 점은 특기될 필요가 있다. 또한 허균이 혁명 내지 사회 개혁을 도모한 인물로 거론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호민론〉이다. 〈호민론〉에 피력된 입장은 민(民)의 역량에 대한 호감과 긍정이 아니라, 민의 불만을 조기에 무마해야 기성 지배층의 안정적 집권이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는 점이 최근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왔다. 민에 대한 허균의 입장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으며, 이 점은 본서에 수록한 〈남궁선생전〉의 조회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은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기성의 가치에 상당히 동조하는 가운데 주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했던 인물이다. 40대 이후에 정계의 고위직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그에 응했던 사실은 허균의 본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연마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상류층이기에 접근할 수 있었던 문화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는 대부분 그의 사회적 지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다양한 자원들에 힘입고 있다. 가령 허균의 척독과 같은 초단형(超斷形)의 편지 양식이나, 그의 산문 창작에 있어서 중요한 참조점이 된 《세설신어》 같은 책은 단지 허균이라는 한 개인의 기호에 의해 개발되거나 주목된 책이 아니다. 선조?광해군 연간 조선 문단에서는 명대 문학, 특히 강남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서 애호된 문학 양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허균 역시 이러한 동향에 참여하고 있었다. 《세설신어》 역시 강남 사대부들 사이에서 16세기에 재발견되고 주목된 서적 중 하나다. 한 단락 정도 되는 짧은 분량의 일화나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동원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의 품성을 간결하게 스케치하는 《세설신어》의 스타일은 위진 남북조 시대에 나온 것이지만, 당시 명대 문학을 선도하고 있던 16세기 강남 문단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16세기 말 명대 문단을 주도했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에 의해 1585년에 《세설신어보》가 출간되고, 이어서 《세설신어》를 모방한 각종 후속 작품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대 강남 사대부 문인 그룹 내에서 《세설신어》가 크게 유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제기되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대 강남의 경제적 부흥에 힘입어 문화적 소양이 일천한 신흥 부유층이 부상했고, 이들의 도전에 응전하는 기성 사대부 계층은 자신들이야말로 선천적인 차원에서 우수한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는 입장을 정립해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지(李贄, 1527∼1602)나 원굉도(袁宏道, 1568∼1610)처럼 문학에 있어 개성 표현의 가치를 중시한 것도, 강남 지역의 그러한 문화적 동향의 한 단면으로, 기성 사대부들의 문화적 권위를 수성하려는 경향의 한 지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시야에 넣고 다시 허균의 저 유명한 발언,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라는 개성 중시의 선언을 되짚어 보면, 일견 독창성을 중시하는 듯한 허균의 지향 역시 보다 넓은 문화적 흐름의 일부일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실로 허균은 《세설신어》를 비롯해 왕세정으로 집약되는 강남 문인 사회의 문예적 동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허균은 그의 〈사우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세설체 저작의 저자이자 왕세정과 더불어 강남의 문예 담론을 주도했던 인물인 하량준(何良俊, 1506∼1573)의 글에 대해서도 열렬한 호감을 표했다. 특히 명 사신이자 강남 출신 문인인 주지번(朱之蕃, 1558∼1624)과 1606년에 직접 만난 이후로는, 강남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회화, 서예, 미식 등 다채로운 문화적 활동 전반으로 관심의 폭을 확장해 갔다. 작문에 있어서도 기성의 전범이나 관습을 답습하기보다 글쓴이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 역시 주지번과의 만남 이후 뚜렷하게 정식화된다. 요컨대 동시대 조선 관료 문인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허균의 개성도 좀 더 시야를 확대해 보면 일정한 문화적 동향과의 동질성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짚어 본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허균은 당대 조선 사회 상류층의 일원으로서 일종의 고급문화에 깊이 침잠함으로써 자신의 소양을 형성해 나갔으며, 결국 허균의 문학적 성취와 개성 강조의 문학론은 단순한 개인의 독창성의 발로라기보다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문화와 명대 강남 문인 문화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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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 (지은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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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성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함경남도 홍원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일월오악도(日月五嶽圖)에 관한 연구>로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2012년 한국 최초로 수필 장르의 공연예술 가능성을 보고 일현수필낭송회를 발족시켜 2025년 현재까지 연 2회 정기공연을 실행하고 있음. 2013년 7월 1일 수필 계간지《에세이피아》를 창간하여, 2018년 1월 1일 19호로 종간함. 제6대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사)국제펜한국본부 부이사장 역임. 현재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고문. 제16회 현대수필문학상, 제11회 현대수필문학대상, 제21회 국제펜문학상, 제1회《가천환경문학상》수필부문, 제11회 대한불교미술대전 현대화부에서 <념念>으로 우수상 수상. 수필 <비에 젖은 참새>가 금성출판사 편 중학 국어 1-1, <앓으면서 자란다>가 천재교육사 편 고등국어(하)에 수록. 저서 :《나의 꽃 문화 산책》 , 편역서《한국 고전 명수필선》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화문집《작은 것들의 눈부신 이야기》(2005년 문예진흥원 우수도서 선정),《손광성의 수필쓰기》 ,《꽃, 그 은밀한 세계》 (2019년도 세종도서 문학나눔 도서 선정),《손광성과 그의 문학 세계》출간. 수필집《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출간. 수필선집《달팽이》(2005년도 우수도서 선정) ,《하늘잠자리》,《바다》 (2024년도 세종도서 문학나눔 도서 선정)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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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엮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성신여자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를 지냈으며, 동아시아 국제회의 비교문학학회 회장, 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중앙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한국 한문학회 평의원, 어문정책 정상화 추진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이규보시문학연구』, 『고려문학산고』, 『처용은 누구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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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대 (엮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과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한문교육과를 졸업했다. 태동고전연구소 및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연구부를 수료하고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시민대학 경서 강사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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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제공 : Yes24(www.yes24.com), 알라딘(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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