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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한국사상선 3차분 전기편 + 후기편 세트 - 전10권

창비 한국사상선 3차분 전기편 + 후기편 세트 - 전10권

유형원, 이익, 홍대용, 김정희, 임윤지당, 이사주당, 강정일당, 정약용, 최한기, 안재홍, 백남운, 유영모, 김재준, 이이효재, 함석헌, 임화, 김수영, 신동엽, 김대중 (지은이), 윤석호, 김보름, 박희병, 이숙인, 백민정, 임형택, 이지원, 이정배, 천사무엘, 강인순, 박재순, 황정아, 이남주 (편저)
창비
2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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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한국사상선 3차분 전기편 + 후기편 세트 - 전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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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창비 한국사상선 3차분 전기편 + 후기편 세트 - 전10권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교양 인문학
· ISBN : 9788936481810
· 쪽수 : 3520쪽
· 출판일 : 2026-09-17

책 소개

창비 60주년을 앞두고 한국사상의 거목 59인의 사유와 철학에서 우리 앞에 닥친 이 거대한 질문의 답을 찾아보려는 특별기획 ‘창비 한국사상선’이 대장정을 마치고 드디어 완간된다. 조선 건국기 정도전부터 한국 현대의 김대중까지, 한반도 현실을 치열하게 사유하며 각 시대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역대 한국사상의 계보를 완성한다.

목차

유형원·이익
홍대용·김정희
임윤지당·이사주당·강정일당
정약용
최한기
안재홍·백남운
유영모·김재준·이이효재
함석헌
임화·김수영·신동엽
김대중

저자소개

김대중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24년 1월 6일 전라남도의 섬 하의도에서 태어나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63년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7·8·13·14대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3단계 통일론과 4대국(미·일·중·소) 안전보장론, 대중경제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각종 사회정책 등 획기적인 공약을 제시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관권 부정선거로 패배했다. 1972년 10월유신 선포 이후 해외에 망명하여 일본과 미국에서 반유신 민주화 투쟁을 전개했다. 1973년 8월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당해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1978년까지 투옥되었다. 1980년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감형되어 수감생활을 하다 1982년 12월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1985년 2월 목숨을 건 귀국을 단행하여 2·12 총선에서 민주세력이 승리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김대중은 5번의 죽을 고비, 6년여의 감옥생활, 3년여의 망명생활, 지속적인 감시 및 연금 등의 고난을 겪었다.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연이어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이후 1993년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고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 전쟁위기 해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5년에 정계 복귀를 선언했고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였다. 대통령 김대중은 IMF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000년 6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제주 4·3특별법 제정 등 각종 개혁조치로 민주인권 신장에 큰 역할을 했다. 지식정보화 및 문화 강국이 되도록 했으며 생산적 복지정책으로 한국이 복지국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한국 외교의 전성기를 이뤄냈다. 김대중은 한국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인권 지도자로서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3년 2월 대통령 임기를 마쳤고, 2009년 8월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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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2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에 재학했다.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이후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했으며 안영일 등과 연극을 했다. 1945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예술부락》이라는 잡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6 ~1948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며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49년 김경린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 탈출했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부산, 대구에서 통역관 및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지냈다. 1957년 12월, 한국시인협회상 제1회 수상자가 되었다.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을 출간했다. 1960년 4·19 혁명 발발. 이후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1968년 6월 15일 밤 귀갓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머리를 다쳤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또한 보여 주었다. “내일의 시”, “미지의 시”를 향한 그의 실험 정신은 언제까지나 신선한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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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운 (지은이)    정보 더보기
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가로 알려진 백남운은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일본 20세기의 경제학자·역사가이자 정치인. 한국의 원시·고대·중세 사회를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등을 저술했다. 일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에 맞서 한국사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밝히려 했으며, 한국 경제사학의 형성과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학술원을 창립하고 좌우 연합을 위한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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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59년 조선일보 신춘현상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가작으로 입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듬해 7월, 교육평론사에 근무하며 4.19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의 시를 엮어 『학생혁명시집』을 펴낸다. 여기에 「아사녀(阿斯女)」라는 시를 싣는다. 그 후 1963년 시집 『아사녀』, 1966년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1967년 서사시 「금강」, 라디오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 등을 발표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1961년부터 8년간 명성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문예반 및 교지 『성원(星苑)』을 지도했으며, 1968년에는 백병동 작곡가와 함께 학생들을 위한 오페레타 <석가탑>을 상연한다. 오페라 <아사녀>, 서사시 「임진강」 등을 구상했으나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완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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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10세 때 수하동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05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1910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의 초빙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2년간 봉직하기도 했다. 22세 때인 1912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갔다가 재일본 YMCA에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귀국해 24세 때인 1914년부터 최남선(崔南善)과 가까이 지내면서 잡지 『청춘』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1919년에는 이승훈으로부터 3·1운동 거사 자금을 맡아 아버지가 운영하던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다가 아버지 류명근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1년 조만식(曺晩植) 후임으로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1년간 재직했으며, 이때 제자 함석헌(咸錫憲)을 만나 사제지간이 되었다. 1928년 중앙YMCA 간사 현동완(玄東完)의 요청으로 YMCA 연경반 모임을 1963년까지 지도했다. 1941년 예수 정신을 신앙의 기조로 삼기 시작했으며, 일일일식(一日一食)을 몸소 실천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 치하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43년 2월 5일, 북악 산마루에서 천지인(天地人) 합일의 경험을 했으며, 1956년 4월 26일에는 죽는다는 사망 가정일을 선포하고 그날부터 ‘다석일지’(多夕日誌)를 쓰기 시작했다. 『노자』(1959)를 완역했으며 다수의 경전 주요 부분을 우리말로 옮겼다. 1981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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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주당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여성 학자. 유학적 소양과 자신의 임신·출산의 경험,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태교신기』를 저술했다. 태교를 단순한 임신 중 생활수칙이 아니라 부모의 몸과 마음가짐, 수양과 책임을 아우르는 교육의 출발점으로 보았으며, 태아기 교육의 중요성과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정리해 우리나라 전통 태교론을 체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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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익 (1681년 10월 18일~1763년 12월 17일, 숙종 7~영조 39)조선의 17, 8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학자이다. 정치·경제·사상사 분야에서 거대한 업적을 이루어 당대부터 지금까지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된다. 탈주자학적인 수사학洙泗學적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을 추구한 그의 학문은 당시 조선의사회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고자 하는 개혁적인 것이었다. 그는 학문의 중심을 전통적인 경학經學에 두었지만, 현실에 보다 긴요한 것은 경세치용의 학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학문 경향과 업적에 따라 성호를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이자 중농학 파의 거성으로 규정한다. 성호의 학문은 이후 윤동규·안정복·신후담·이병휴 등에게 이어졌고, 그의 학통은 권철신·이중환·채제공·정약용·이가환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윤동규는 지리, 안정복은 역사, 신후담은 수학, 이병휴는 경학으로 한 시대에 이름을 떨쳤다. 성호는 그의 폭넓은 관심을 다양한 저서로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과 『곽 우록藿憂錄』·『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성호사설星湖僿說』·『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編』·『이자수어李子粹語』 그리고 『사서삼경四書三經』·『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의 질서疾書 등이 있다. 또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세상에 떠도는 속담을 모아 정리하고 풀이를 덧붙인 속담집 「백언해百諺解」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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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다. 임화는 필명이다. 1908년 10월 13일, 서울 종로의 낙산 아래에 위치한 보통 가정에서 태어난다.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는 한편, 카프(KAPF)에 가입해 이후 우리나라 프롤레타리아문학 활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1927년에는 ‘임화’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하면서 다다이즘 성격의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카프에 몸을 담기 시작한 이래 일관되게 계급주의문학을 추구해 나갔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박영희의 지도를 받으며 김기진, 송영, 김영팔, 최서해, 최승일, 박팔양, 이기영, 안석영 등 카프 맹원들과 친교를 맺고 프로문학 운동에 더욱 깊숙이 관여한다. 1929년에 박영희의 도움으로 동경으로 가서 김남천, 안막 등을 만나 훗날 카프를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이른바 제3전선파로 불리는 일본 유학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카프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바로 이 시기, 도일을 전후해 단편 서사시 양식을 개척한다. 또한 이즈음에 김기진과 박영희의 이른바 내용·형식 논쟁이 일어나는데, 임화는 박영희의 편에 서서 김기진을 기회주의적 개량형 활동가라고 비판한다. 이 무렵 영화에도 관심을 보여 <유랑>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한편 <혼가>를 직접 제작하여 개봉하기도 한다. 1931년, 동경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안막, 김남천, 권환 등과 손잡고 카프의 구세대 인물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키고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1931년에 벌어진 일제의 카프 맹원들에 대한 제1차 검거 사건에서 박영희와 함께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이듬해에 김남천 등과 함께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을 주도한 후 최고 지도자인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1934년에는 박영희의 전향 선언이 나오고 세칭 신건설사 사건(전주 사건)으로 불리는 카프 제2차 검거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에 카프 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폐병으로 투옥을 면한다. 그러나 조직 내외의 여건이 악화되자 임화는 1935년에 카프 해소파들과 함께 카프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1936년 이후 정세 악화로 문학을 통한 정치적 투쟁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자, 문학의 정치적·현실적인 문제보다는 그 본질 문제나 문학사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1938년에 이르러 첫 시집 ≪현해탄(玄海灘)≫을 발간하는데, 이 시집은 계급주의 이념과 서정성이 절실하게 조화를 이룬 수준 높은 시 세계를 보여 주었다. 이듬해에는 ≪개설 신문학사≫를 집필하고 1940년에는 일제 치하에서 가장 방대하고 수준 높은 평론집인 ≪문학의 논리≫를 발간하는 한편, 1944년에는 ≪조선 영화 연감≫과 ≪조선 영화 발달사≫ 등 영화 관련 저서를 집필하기도 한다. 광복이 되자 임화는 이원조,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그 중심인물이 된다. 1946년에는 위조지폐 사건인 이른바 ‘정판사 사건’이 터지면서 미군정의 남로당 탄압이 적극화되는데, 이 어려운 때에 임화는 남로당 외곽 단체인 ‘민전(民戰)’의 기획 차장을 맡아 남로당 문화 담당 최고 이론가로 활동한다. 그런 와중에도 1947년에는 제2시집 ≪찬가(讚歌)≫와 시선집 ≪회상시집(回想詩集)≫을 발간해 문학 활동을 꾸준히 전개한다. 미군정의 남로당원 탄압이 심해지자 끝내 월북해 황해도 해주로 이동한다. 1948년 이후 박헌영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그를 지지하는 문학 노선을 견지하면서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잠시 머문 뒤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간다. 이때의 전선 체험은 1951년에 발간한 네 번째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생생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듬해에 관제 비평가 엄호석 등에 의해 이 시집의 시편들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정치적 비판을 받는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부에서 미제의 고정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지은 책으로 시집 <현해탄>, <찬가>, <회상 시집>, 평론집 <문학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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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 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었고,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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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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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북학파의 선구자 혹은 과학사상가로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지전설을 주창한 홍대용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태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를 보장받는 가문 출신이지만,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하여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12세에 석실서원에 들어가 23년간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원행 아래에서 수학하였으며, 천문학·수학·역산학·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 홍대용의 일생에서 가장 전환점이 된 사건은 중국 연행이다. 1765년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불멸의 명저 『의산문답』은 중국 연행을 다녀 온 후 쓴 책이다. 40대에 들어서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고 정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17개월 동안 세자익위사에서 근무하면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계방일기』라는 글을 남겼다. 어머니의 병을 구실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홍대용은 1783년 10월 23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꼭 52년하고도 7개월 남짓의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그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홍지弘之라 했고, 자는 덕보德保, 당호로는 담헌湛軒을 썼기 때문에 오늘날 그의 문집은 『담헌서湛軒書』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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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효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재학 중 유학을 떠나 미국 앨라배마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58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조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여자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사회학회 회장, 한국가족학회 초대 회장, 한국여성민우회 초대 회장, 한국여성단체 연합 회장, 한겨레신문 이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여성사회교육원 이사장, 진해 경신사회복지재단 부설 사회복지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여성운동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2020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가족과 사회』, 『한국 여성의 지위』(공저), 『여성의 사회의식』,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 『조선조 사회와 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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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동아시아 학술을 집대성하여 우주를 ‘기’로 이해한 세계적으로 손꼽을 학자다. 자는 지로(芝老)이며 호로는 『인정』에서 쓴 혜강(惠岡)이 가장 많이 알려졌고, 『지구전요』의 패동(浿東), 그밖에 주로 서문에서 사용한 기화당(氣和堂), ‘명남루(明南樓)’ 등이 있다.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종숙부 최광현의 양자로 입양되어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 1825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엄청난 책 사랑과 광적인 독서, 그에 따른 저술로 그의 시간을 불태웠다. 당시 금기시된 서양의 학문도 배척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천체(天體)를 공부했고, 그에 따른 지구의 동정과 세계를 그려냈으며, 나아가 그 이치로 사람과 사회를 논설했다. 그 결과가 바로 『기측체의(氣測體義)』, 『지구전요(地球典要)』, 『인정(人政)』이다. 여기 소개하는 『지구전요』는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영환지략(瀛環志略)』의 중심에 서 있는 19세기 세계 최고의 인문 지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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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지은이)    정보 더보기
독립운동가, 국학자, 민족사학자, 언론인, 정치인.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1891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하였고, 1907년 서울 황성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으며, 1910년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 입학하였다. 1913년 상해, 북경 등 중국을 여행하였고, 신규식 선생 주도하의 독립혁명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으며, 1914년 일본 조도전(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1917년 민족종교이자 당시 독립지사들의 구심점이었던 나철 선생의 대종교(大倧敎)에 입교(入敎)하였으며, 1919년 11월 비밀항일결사인 청년외교단 활동으로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후 1943년까지 독립운동으로 9차례 투옥되며, 도합 7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었다. 1924년 <조선일보> 주필 겸 이사로 입사하였고, 이후 발행인, 편집인,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총무로 선임 1930년 백두산에 오르고 <백두산등척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여순 감옥에 수감 중이던 단재 신채호의 한국사론을 <조선일보>에 연재시켰다. 또한 1934년 단군 유적지인 구월산을 답사한 후 <구월산등람지>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위당 정인보와 함께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4년 여에 걸쳐 교열·간행하였다. 1946년 1월 상해임시정부 주도하의 ‘비상국민회의’ 주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47년 2월 미군정 민정장관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어 1965년 평양에서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89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저서로는 《백두산등척기》(1931), 《조선상고사감》(1947~1948),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 《한민족의 기본진로》(1949), 《민세안재홍선집》(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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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지은이)    정보 더보기
호 장공(長空). 함경북도 경흥 출생.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 1929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1932년 미국 웨스턴 신학교를 졸업했다. 1940년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전신) 설립과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창립에 중심인물로 참여했다. 1949?1961년 한신대학교(한신대학교 전신)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며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창립하고, 1961?1987년 한신대학교 명예학장을 지내고, 그 사이 1965년 기독교장로회 제50회 총회 총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군사 독재가 강화되어가자 반독재 투쟁 대열에 나서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장, 1972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이사장, 1973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일생을 한국 교회의 발전과 사회 참여의 신학 정립, 민주화 등을 위해 헌신했으며, 저서에 《범용기》, 《낙수》, 《계시와 증언》, 《하늘과 땅의 해후》, 《인간이기에》, 《장공전집》 《광야에 외치는 소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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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 (지은이)    정보 더보기
1622(광해군14)~1673(현종14).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둔암(遁庵)이다. 부친인 유흠(柳��)이 유몽인(柳夢寅)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은 뒤 5세 때부터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 수학하였다. 두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32세 때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저술로는 그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반계수록(磻溪隧錄)》 외에 《주자찬요(朱子纂要)》, 《이기총론(理氣總論》,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무경사서초(武經四書抄)》, 《기효신서절요(紀效新書節要)》, 《정음지남(正音指南)》, 《동국문초(東國文抄)》 등 수십 권이 있으나 《반계수록》과 《동국여지지》 외에 시문 몇 편만 전하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그의 저작과 사상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100여 년이 지난 뒤 《반계수록》의 개혁 사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영조의 관심을 받아 높은 평가를 받고 책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1770년(영조46) 통정대부 호조참의 겸 세자시강원찬선에 증직되었다. 그의 개혁안은 이후에도 실행되지 못하였으나 이익, 안정복,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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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지당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여성 성리학자. 오빠 임성주에게 『효경』『소학』과 사서, 중국 역사서 등을 배우며 학문을 익혔고, 여성의 학문 활동이 제한되던 시대에도 성리학의 주요 문제를 깊이 탐구했다. 이기론·심성론·사단칠정론·인물성동이론·예악론·정치론 등에 관한 논설을 남겼으며, 사후 저술이 『윤지당유고』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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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일당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여성 성리학자이자 시인.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경서를 공부하고 시문을 창작하며 학문과 수양을 이어갔고, 서예에도 능했다. 성리학적 수양과 일상의 실천에 관한 생각을 글로 남겼으며, 남편 윤광연이 이를 모아 『정일당유고』를 간행하면서 그의 학문과 문학세계가 후대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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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서화가. 중국 연행 이후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여 금석학과 경학 방면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주자학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설은 배격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다. 중국의 서법을 깊이 연구해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세한도〉 〈불이선란도〉 같은 기품 있는 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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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지은이)    정보 더보기
국문학자, 사상사 및 예술사학자. 1996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오랜 시간 깊이 있는 고전문학 강의를 해오며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생들에게 지침이 되어주었다. 주요 저서로 『통합인문학을 위하여』 『한국고전소설 연구의 방법적 지평』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범애와 평등』 『나는 골목길 부처다』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저항과 아만』 『유교와 한국 문학의 장르』 『연암을 읽는다』 『한국의 생태사상』 『엄마의 마지막 말들』 등이 있으며 다수의 편역서 및 논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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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택 (옮긴이)    정보 더보기
한국문학 연구자로 출발하여 실학과 한문고전 연구·해석에 주력해온 원로학자. 저서로 『한국문학사의 시각』 『동아시아 서사와 소설사론』 『한국학의 실사구시』 『문명의식과 실학』 『21세기에 실학을 읽다』 등이 있고, 만해문학상·다산학술상·한국학저술상 등을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교수로서 동아시아학술원장을 역임하고, 정년 이후로는 익선재연구실을 운영하며 현재 『반계수록』의 역주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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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무엘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구약학 교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예일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구약 외경의 이해』, 『지혜전승과 지혜문학』(2010년 문체부 우수학술도서), 『신구약중간시대의 성서해석』, 『성경과 과학의 대화』, 『사해사본과 쿰란 공동체』, 『김재준』, 『민중인권실천신학자 김찬국』 등이 있고, 공저서로는 『토라의 신학』, 『창조 신앙, 어떻게 볼 것인가』, 『구약학자들의 잠언 설교』, 『구약학자들의 시편설교』 등이 있으며, 공역서로는 『하나님과 진화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가』, 『부끄럽지 않은 수치심』, 『한국 문화 이야기』, 『한국 선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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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유교 경전의 여성사상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가족과 여성의 시각으로 조선시대 사상사를 읽고 쓰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연구교수를 지냈고,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다. 저서로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정절의 역사』 『신사임당』 『또 하나의 조선』 『유교와 여성, 근대를 만나다』 『조선시대 첩의 삶과 애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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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정약용 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동아시아 유학과 한국사상을 연구해왔으며, 서양 학문과 만난 조선 후기 유학의 성격 및 근현대 한국사상의 맥과 흐름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 『정약용의 철학』 『정약용의 정치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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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철학과 재학 중 함석헌을 만나 배우며 씨생명철학을 연구해왔다. 한신대학교 연구교수,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씨사상연구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씨재단을 설립했다. 안창호, 유영모, 함석헌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으며, 현재 '상생사회 일천인 선언'에 공동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다석 유영모』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도산철학과 씨철학』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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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지은이)    정보 더보기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대학원,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Dr. Theol.)를 마치고,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미국 게렛신학교, 버클리 GTU, 일본 동지사대학교 신학부에서 활동했으며, 감신대 부설 통합학문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한국문화신학회 회장, 조직신학회 회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종교간대화 위원장, 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사단법인 나눔문화 이사장직을 수행했고, 최근에는 3.1운동 100주년 종교개혁 연대 공동대표, 국제기후시민종교네트워크(ICE) 공동대표, 현장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웃 종교인들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생태 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문광부 우수학술도서), 『빈탕한데 맞혀놀이多夕으로 세상을 읽다』,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문광부 우수학술도서),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기독교출판문화상 대상), 『켄 윌버와 신학』(문광부 우수학술도서), 『기독교 자연 신학연구』, 『생명의 하느님과 한국적 생명신학』, 『 ‘역사유비’로서의 李信의 슐리얼리즘 신학』 등이 있고, 『종교개혁 500년과 以後 신학』(문광부 우수학술도서)과 『3.1정신과 以後 기독교』, 『한국전쟁 70년과 以後 교회』, 『李信의 묵시의식과 토착화의 새 차원』(문광부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등을 공동으로 엮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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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 (엮은이)    정보 더보기
부산대학교 사학과 교수. 정약용 경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조선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 동아시아 경세론의 전개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한국토지용어사전』 『민장치부책으로 보는 1906년의 강진』 등의 저역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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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제공 : Yes24(www.yes24.com), 알라딘(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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