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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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다. 37세에 처음으로 출판한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1857)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지만, 그전에 오랜 습작 시기를 거쳤다.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작가가 되려 했으나 의사였던 부친의 반대로 법대에 진학했다. 얼마 후 신경 발작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적성에 맞지 않던 학업을 중단하고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때부터 오직 글쓰기와 독서가 전부인 변함없는 생활을 평생 지속했다. 당대의 지방 부르주아 풍속을 꼼꼼하게 그린 《마담 보바리》로 소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소설에서 ‘무엇’을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심함으로써 소설의 형식, 언어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주요 작품으로 《살람보(Salammbo?)》(1862), 《감정 교육(L’Education sentimentale)》(1869), 《성 앙투안의 유혹(La Tentation de saint Antoine)》(1874), 《세 단편(Trois Contes)》(1877), 그리고 미완의 마지막 소설 《부바르와 페퀴셰(Bouvard et Pe?cuchet)》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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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딘 고디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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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넬슨 만델라가 28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옥문을 나서며 “나는 나딘을 만나야 합니다”라고 했을 만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양심을 상징하는 작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가 백인과 흑인 모두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다수의 작품들을 발표했고, 199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위원회는 고디머를 수상자로 발표하며 “노벨의 유언처럼 그는 장엄한 서사적 소설들로 인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2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하우텡주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위치한 탄광촌 스프링스에서 유대계 이민자 집안의 딸로 태어나,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교에서 교양 과정만 이수한 후 중퇴했다. 그즈음 고디머는 인종차별에 기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이한 정치현실에 눈을 뜨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첫 단편소설 〈금을 찾아서The Quest for Seen Gold〉를, 1949년 첫 단편집《얼굴을 대면하고Face to Face》를, 1953년 첫 장편소설 《거짓의 날들》을 발표했다. 이후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넬슨 만델라가 이끌던 흑인정치조직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하는 등 번번이 백인 정권과 마찰을 빚어《줄라이의 사람들July’s People》(1981) 등 책 세 권이 판매 금지되기도 했다. 노벨위원회가 고디머의 초기작 중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꼽은 《명예로운 손님A Guest of Honour》(1971)과 《보호주의자들The Conservationist》(1974)은 각각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과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 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이방인들의 세계A World of Strangers》(1958),《가버린 부르주아의 세계The Late Bourgeois World》(1966), 《버거의 딸Burger’s Daughter》(1979) 등 15편의 장편소설과 《6피트의 시골 땅Six Feet of the Country》(1956), 《프라이데이의 발자국Friday’s Footprint》(1960) 《왜 당신은 쓰지 않았는가Why haven’t You Written》(1993) 등 21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스미스 문학상, 프랑스 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1999년 남아프리카 국민훈장과 200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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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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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 마을에서 태어났다. 친가 쪽에서는 엄격함과 침울함을 이어받았고, 외가 쪽에서는 실무 능력과 유머 감각을 물려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1837년까지 12년 동안 모친의 집에 와서 직업도 갖지 않은 채 독서와 창작 수습에만 전념했다. 이때도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로 고독과 명상과 독서 속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는 예민한 감수성과 회의적인 성격으로 인해 더욱더 인간의 내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인간 본성 속의 신성을 믿으면서도 죄악의 검은 동굴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에 따라 나중에 많은 단편소설들과 일련의 로맨스들을 통해서 죄인들의 우화와 지성과 자연적 감정의 갈등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어느 사회에나 있는 인간 심리와 인간 고뇌에 대한 그의 명철한 인식을 보게 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최초의 소설 《팬쇼(Fanshawe)》를 익명으로 자비출판 했으나 만족스럽지 못해 곧 모두 회수해 파기해 버렸다. 이후 한동안 단편소설의 창작에만 전념했다.
1837년에 당시까지 발표된 단편소설 36편 가운데 18편을 한데 묶어 《진부한 이야기들(Twice-Told Tales)》이란 제명의 단편집을 본명을 사용해 최초로 내놓았다. 이어 1846년에 두 번째 단편집 《구목사관의 이끼(Mosses from an Old Manse)》를 출간했다. 여기에 실린 첫 작품인 〈구목사관(The Old Manse)〉은 그의 진귀한 자전적 에세이이고, 이 밖에 유명한 〈젊은 굿맨 브라운(Young Goodman Brown)〉, 〈모반(The Birth-Mark)〉, 〈라파치니의 딸(Rappaccini's Daughter)〉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1852년에는 단편집 《눈의 이미지와 다른 진부한 이야기들(The Snow-Image, and Other Twice-Told Tales)》을 출간했다. 여기에는 1832년에 발표한 〈사자의 부인(The Wives of the Dead)〉, 〈내 친척 몰리뉴 소령(My Kinsman, Major Molineux)〉 외에도 1850년의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이선 브랜드(Ethan Brand)〉 등이 실렸다.
호손은 저명한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제를 했을 뿐 아니라 정치계에도 본의 아니게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1839년부터 2년 동안 보스턴 세관의 계량관으로서 소금과 석탄의 중량을 다는 일을 담당했다. 1846년에는 세일럼 세관에 수입품 검사관으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184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휘그당이 승리를 차지하고, 다음 해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민주당원이었던 호손은 일종의 정치 보복으로 세관에서 해고당했다. 세관을 그만두고 나서 곧 《주홍 글자》의 집필에 착수했다.
성공적인 《주홍 글자》의 여세를 몰아 1851년 버크셔 체재 중에 집필한 《일곱 박공의 집(The House of the Seven Gables)》을 간행했고, 이어서 1852년에는 《블라이드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를 출간했다.
1853년 영국의 리버풀 영사에 임명되었다. 1853~1856년의 영국 체재 중의 기록을 담은 《영국 노트북(The English Notebooks)》은 그의 다른 노트북 이상으로 아주 상세하고 의미가 깊다. 이어서 1857~1859년에는 로마와 플로렌스에서 생활했다. 특히 플로렌스에서는 영국의 시인 브라우닝 부부(Robert and Elizabeth Barrett Browning)와 친교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기간의 생활은 《이탈리아 노트북(The Italian Notebooks)》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 그 후 호손은 귀국해 다시 콩코드에 정착했다.
1860년에 그의 마지막 장편 로맨스인 《대리석 목양신(The Marble Faun)》을 미국과 영국에서 출간했다. 이 작품은 영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호평을 받았다.
1864년에 호손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5월 11일 피어스와 함께 뉴햄프셔(New Hampshire) 여행길에 나섰다가 5월 19일 밤에 플리머스(Plymouth)의 한 여관에서 잠자던 중 사망했다. 5월 23일 호손은 늦봄의 화사한 햇빛과 신록의 훈풍 속에 뉴잉글랜드의 저명한 문인들인 롱펠로, 홈스, 필즈, 에머슨 등이 19세기 미국 문학의 실질적인 대가를 잃고 망연자실한 가운데 콩코드의 한 묘지에 조용히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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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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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페르시아(현 이란)에서 영국인 부모 앨프리드와 에밀리의 딸로 태어나, 가족과 함께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십대 초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하면서 전화교환원, 타이피스트 등으로 일했다. 두 번의 이혼을 경험한 후 1949년 런던에 정착해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 첫 장편소설 『풀잎은 노래한다』 발표 이후, 『마사 퀘스트』 『금색 공책』 『19호실로 가다』 『다섯째 아이』 『런던 스케치』 등 50권이 넘는 책을 썼다.
레싱은 계급, 인종, 성별의 격차로 빚어진 인습과 폭력, 억압에 평생 저항해온 작가이자, 공산당에 가입하는가 하면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 반핵 운동 등 현실 정치에도 목소리를 높인 지식인이었다. 서머싯 몸 상, 메디치상,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고 200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 <타임스> 선정 ‘전후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에 이름을 올렸다.
2008년 발표한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1990년대 후반부터 뇌졸중으로 투병하면서도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 결실이다. 제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돌이킬 수 없이 부서진 부모의 삶과 자신의 기억을 예리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해냈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내면의 삶을 작품화하여 “문학의 얼굴을 바꾼 작가”로 평가받는 레싱은 2013년 런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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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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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 25일 엘라 비어트리스 케이시와 클레비 레이먼드 카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가 다니던 제재소를 비롯해 약국, 병원 등에서 일했다. 1957년 메리앤 버크와 결혼해 이후 딸과 아들을 얻었다. 1958년 치코주립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문학적 스승 존 가드너를 만나 문예창작 강의를 수강했다. 1963년 험볼트주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아이오와대학교의 작가 워크숍 대학원 과정에서 수학했다.
단편 「분노의 계절」(1961)이 문예지에 수록되면서 본격적인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어 두 권의 시집 『클래머스 근처Near Klamath』(1968), 『겨울 불면증Winter Insomnia』(1970)을 출간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와 아이오와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생활을 이어가다 1974년 알코올의존증과 가정 문제로 인해 사직했다. 1976년 첫 소설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가 출간되고, 이듬해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같은 해 11월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개최된 작가 회의에서 시인 테스 갤러거를 만나고, 1978년 아내와 이혼한 뒤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83년 대표작 『대성당』을 출간하고, 미국예술문학아카데미로부터 밀드레드 앤드 해럴드 스트라우스 생활 기금의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대성당』으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1987년에 암이 번진 왼쪽 폐를 일부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이듬해 암이 뇌에서 재발해 7주에 걸친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기존의 작품들 중에서 고른 선집 『내가 전화를 거는 곳』(1988)이 출간되었으며, 같은 해 하트퍼드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6월 초 양쪽 폐 모두에서 암이 재발하고, 같은 달 갤러거와 결혼식을 올렸다. 8월 2일 포트 앤젤레스의 자택에서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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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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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체코의 브륀에서 야나체크 음악원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밀란 쿤데라는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프라하의 예술아카데미 AMU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다. 1963년 이래 ‘프라하의 봄’이 외부의 억압으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으며, 1968년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수모를 겪었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들』 2권만이 쿤데라가 고국 체코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 불역되는 즉시 프랑스에서도 명작가가 되다. 그 불역판 서문에서 아라공은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한바 있다.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들을 썼고 프라하의 고등 영화연구원에서 가르쳤다. 밀로시 포만(Miloš Forman), 그리고 장차 체코의 누벨 바그계 영화인들이 될 사람들은 두루 그의 제자들이었다.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무렵의 숙청으로 인하여 그의 처지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은 도서관에서 제거되었고 그 자신은 글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되는 역경을 만났다. 1975년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왔을 때 “프라하에서 서양은 그들 스스로가 파괴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한 후 르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다가 1980년에 파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레사와 토마스는 우연히 서로 만났다가 사고로 함께 죽는다. 그들의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 배경에는1960년대 체코와 1970년대 유럽을 뒤흔들어놓은 시련이 깔려 있다. 지금은 멀어져버린 체코이지만 쿤데라의 작품 한복판에 주인공인 양 요지부동으로 박혀 있는 체코,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라기보다는 신화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나라, 유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그 본질이 더 잘 보이는 듯한 그 나라. 변함 없는 성실성과 배반,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찢겨진 존재들의 복합성, 그리고 또한 둘로 쪼개진 세계와 유럽의 드라마와 작가의 근원적 정신질환의 원인은 체코에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 후 소설가로서의 성공에 대해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화가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1968년까지 나는 체코 국내의 소설가였을 뿐 아무것도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작품들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습니다만 체코 안에서 작가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프랑스를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선택한 겁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은 파리였고 나로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밀란 쿤데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다. 지혜의 그물망이 촘촘하게 얽혀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삶은 다른 곳에』 『불멸』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이별의 왈츠』 『느림』 『정체성』 『향수』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가 탁월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아서 메디치 상, 클레멘트 루케 상, 유로파 상, 체코 작가 상, 컴먼웰스 상, LA타임즈 소설상 등을 받았다. 미국 미시건 대학은 그의 문학적 공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8년에 출간된 『이별의 왈츠』는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문학상 프레미오 레테라리오 몬델로 상을 수상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우리의 삶을 마치 모자이크처럼 정교하게 수놓으면서 사랑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쿤데라는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 번역가 등의 거의 모든 문학장르에서 다양한 창작활동을 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일구었다. 후기 작품으로는 『향수』와 오늘날 현대 소설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의를 쿤데라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지식, 문학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풀어 낸 에세이집 『커튼』 등이 있다. 2013년 유작이 된 마지막 소설 『무의미의 축제』를 발표했다. 농담과 거짓말, 의미와 무의미, 일상과 축제의 경계에서 삶과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노련한 거장의 시선이 담긴 작품이다. 2023년 7월 11일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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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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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풍요롭고 자유주의적인 집안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나보코프 가족은 런던을 거쳐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1922년 아버지가 극우파 러시아인의 총에 맞아 살해되자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나보코프는 외국어, 테니스 강습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1923년부터 러시아어로 장편소설, 단편소설, 희곡, 시, 번역서를 내면서 중요한 러시아 망명 작가 중 하나로 명성을 얻다가 1940년 아내와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에 정착한 나보코프는 1941년부터 웰즐리 칼리지에서 강사로 지내다가 1948년 코넬 대학교 러시아문학 교수로 임용되어 1959년까지 재직했다. 1955년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롤리타』가 출간되었으며, 『프닌』(1957)은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1941), 『벤드 시니스터』(1947), 『말하라, 기억이여』(1967), 『롤리타』와 함께 미국에서 출간된 작품이다. 1960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이주했고 1977년 몽트뢰에서 사망했다. 이 외에도 『창백한 불꽃』(1962), 『아다 혹은 열정: 가족 연대기』(1969), 『어릿광대를 보라!』(1974) 등 다수의 작품을 썼으며 미발표 작품으로 『오리지널 오브 로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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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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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쿠바에서 농학자였던 아버지와 식물학자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부모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이주한 뒤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접하며 자랐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전 작품에 녹아들어 있다. 칼비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교 농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던 중 레지스탕스에 참가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조셉 콘래드에 관한 논문으로 토리노 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레지스탕스 경험을 토대로 한 네오리얼리즘 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1947)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당시 이탈리아 문학계를 대표하던 파베세, 비토리니 등과 교제했다. 『반쪼가리 자작』(1952), 『나무 위의 남작』(1957), 『존재하지 않는 기사』(1959)로 이루어진 ‘우리의 선조들’ 3부작처럼 환상과 알레고리를 바탕으로 한 작품과 『우주 만화』(1965)와 같이 과학적인 환상성을 띤 작품을 발표하면서 칼비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59년부터 1966년까지 비토리니와 함께 좌익 월간지인 《일 메나보 디 레테라투라》를 발행했다. 1964년 파리로 이주한 뒤 후기 대표작인 『보이지 않는 도시들』(1972)을 발표했으며 이 작품으로 펠트리넬리 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1984년 이탈리아인으로서는 최초로 하버드 대학교의 ‘찰스 엘리엇 노턴 문학 강좌’를 맡아 달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강연 원고를 준비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1985년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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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워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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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미국 조지아주 이턴턴에서 소작농 부부의 여덟째 아이로 태어났다. 1961년 애틀랜타의 스펠먼대학교에 입학했고, 역사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워드 진과 스토턴 린드의 영향을 받아 흑인민권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년 뒤 뉴욕의 세라로런스대학교로 편입했으며, 졸업 후 인권운동을 위해 남부로 귀향했다. 1968년 첫 시집 『한때』를 발표하고 1970년 첫 장편소설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번째 인생』을 출간했다. 웰즐리대학교와 매사추세츠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했으며, 단편집 『사랑과 고통』, 시집 『혁명하는 피튜니아』, 장편소설 『머리디언』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1980년대에는 여성주의 저널 『미즈』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82년 『컬러 퍼플』을 출간해 이듬해 미국도서상과 흑인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열정적인 사회운동가로서 다양한 분야에 목소리를 내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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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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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9월 10일 잉글랜드 중부 지방 노팅엄 근교 탄광 지대에서 아버지 존 아서 로렌스와 어머니 리디어 비어즐 로렌스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 광부로서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중산층 출신의 교사였다. D. H. 로렌스는 문학을 좋아하고 교양이 있으며 엄격한 청교도였던 어머니 덕분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고 고학으로 1908년 노팅엄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간간이 시를 발표하던 그는 26세가 되던 1911년 폐렴에 걸려 요양을 하게 된다. 이듬해 그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그보다 네 살이 위였던 독일인 프리다 부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그녀는 노팅엄 대 은사의 부인이었다). 이미 세 자녀의 어머니였던 그녀는 로렌스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했으며 로렌스는 1913년 장편 『아들과 연인』을 발표한다. 그는 1914년 프리다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고 부인이 전 남편과의 이혼에 성공하자 정식으로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입대를 지원했으나 폐병 때문에 거부당했다. 그해 그는 최초의 단편집 『프러시아 장교들과 다른 사람들』을 발간한다. 이어서 그는 1915년에 장편 『무지개』를 발간했고, 1920년 이탈리아 피렌체로, 이어서 1922년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동안 그는 『사랑에 빠진 여인들』을 비롯해 다수의 작품들을 미국에서 발표해 호평을 받았으며 1925년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채털리 부인의 연인』 집필을 시작한다. 이 작품 발표 후 그는 병세가 악화되어 베니스 요양원에 입원했다가 1930년 3월 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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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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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옮긴책으로는 『백경』, 『오만과 편견』, 『여성의 창의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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